〈 369화 〉 369. 신수 부활(1)
* * *
저녁의 시간에도, 은현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무언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기에, 저녁 식사는 따로 준비해달라는 전달을 받은 릴리는 은현과 베르단디를 제외한 4인분의 식사만을 준비했다.
결국에는 여성들만의 저녁 식사 자리가 형성된 현재, 떠오르는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에린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첫 경험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은현이 짓궂게 자신을 괴롭혔는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등등.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자신과 공통된 경험을 했을 세 사람에게 술술 말을 풀었다.
“그 사람이 침대 위에서는 좀 거칠기는 하지.”
“그, 그런가요…?”
“저는 오히려 제가 그런 걸 바라니까, 주인님도 응해주시죠.”
“걔도 참 여러모로 변태니까.”
은현이 일리아나의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을 해왔을 것이 틀림없다.
그 또한 마찬가지지만, 그를 더욱 그렇게 부추기는 것은 욕정에 왕성해진 아내들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으니까.
당황하는 에린의 반응을 즐기는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는 즐겁게 은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전 지하 공방의 비밀 조교실에서 엘레노아를 괴롭히는 것도 목격했지만, 아내들과 관계를 가질 때의 은현에 대한 인상은 정말 대단했다.
오히려 어젯밤의 그 행위는 첫 경험인 자신을 배려하는 상냥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
‘나도 곧…거칠게 다뤄주려나…?’
그것을 상상하자니, 에린의 마음속이 두근거린다.
이윽고 현관의 문을 열고, 은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한창 식사를 이어나가던 도중,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던 메이드,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은현을 반겼다.
“오셨어요?”
“응.”
“바로 식사하실 건가요?”
늘 상 있는 일로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코트를 벗어 릴리에게 건네주고는 흘끗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저녁을 먹고 있던 아내들을 본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네. 금방 준비해드릴게요.”
“나도 준비해주거라.”
“네. 알겠습니다.”
릴리는 은현과 함께 실체화로 모습을 드러내어, 자연스레 식탁 위에 앉는 베르단디를 포함한 2인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일리아나는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준비는 끝났어?”
“기초 공사는 끝났고, 지금은 에밀리아와 인형들에게 공사의 진행을 맡겼어.”
“공사? 무슨 공사를 얘기하는 거야?”
대화를 듣던 에린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사당을 만들 거거든.”
“사당?”
사당이라는 단어는 에린에게 있어서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표현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어 본 에린의 반응에 은현은 작게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저녁부터 먹고 얘기하자. 어차피 같이 갈 예정이었으니까.”
던전 주택의 내부, 완공될 예정인 장소에는 에린의 역할이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응. 알았어.”
은현의 말에 에린은 더는 자세히 묻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 ◆ ◆
식사를 마치고, 은현은 일리아나와 함께 에린을 데리고 던전 주택의 바깥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거야?”
“아까 얘기한, 제단이 만들어지는 곳.”
그렇게 설명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 장소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본래 이 던전의 주인이 있었던 장소.
가장 심부에 위치해 있는 아르키스의 묘소의 바로 옆, 새로운 공간에 확장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공간에는 거대한 사당이 지어지고 있는 와중의 한창이다.
은현이 가지고 있는 권능을 이용하여 대량의 물자를 조달하고, 자세한 내부 구조가 기록된 설계도대로 건축된 건물의 오차는 1mm도 나타나지 않았다.
“…독특한 모양이네.”
일리아나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거의 다 완공된 사당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용도는 신을 모시는 신전과 비슷하다는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건축에 사용된 자재들이나, 건축 양식, 모양들이 하나 같이 생소하다.
그러면서도 그 거대한 크기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기에 충분했다.
“와, 와아….”
에린은 몇 시간 만에 떡하니 지어진 거대한 건물의 크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은….]
에린보다 더 놀란 것은 다름 아닌 구미호다.
그야 그럴 것이 눈앞에 건축된 것은 거대한 크기의 사당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당을…?]
지구가 멸망하기 약 400년 전, 지구의 어떤 장소에 존재했을 사당을 똑같이 재현시켜 건축하고 있는 광경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니까 사당이 대체 뭐야?”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육성으로 묻는 에린의 말에 은현이 입을 열었다.
“신수님도 알아보셨어?”
“응. 미호도 굉장히 놀라고 있는데?”
“그렇구나.”
구미호는 조용히 은현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사당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자신은 그저 에린의 몸 속에 잔류하고 있는 사념에 불과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내 어떠한 가능성을 깨닫고 은현의 생각을 추측했다.
[설마…?]
구미호가 그렇게 추측을 통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은현은 말을 이었다.
“에린, 에린은 네 힘의 주인인 신수님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알고 있어?”
“미호의 이야기? 글쎄. 미호는 자기 얘기를 잘해주지 않아.”
자신의 몸에 잠들어 있었던 신수의 잔류 사념.
구미호는 처음으로 에린의 몸을 빼앗으며 애슈턴의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였던 이후로도, 그렇게 자주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약 1년 이전의 시점부터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투덕거리며 말다툼도 해왔지만, 그만큼 대화도 많이 하고 가까워졌다고 에린은 내심 생각했다.
자신을 무시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적도 적지 않다.
그래도 조언이 필요할 때는 조언을 해주면서 자신을 돕는 것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구미호도 자신의 과거 이야기만큼은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럼 신수님이 어떤 경위를 통해서 네 몸 안에 들어갔는지는 기억해?”
“응. 그건 기억해. 현이가 말해줬었으니까. 나쁜 사람한테 속아서 배신당하고 죽게 된 거라며?”
에린이 신수의 힘을 각성시켰을 당시, 은현이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것도 에린의 방식으로 굉장히 압축되어 진 이야기였지만, 마력이나 신수의 힘에 대한 이론 같은 이야기에 취약한 에린은 이것이 한계였다.
“본래 신수의 힘은 아주 특별해. 오랜 시간 동안 대량의 마력을 한곳에 모아 갈무리하여, 더욱 정갈하고 깨끗한 기운으로 만들어 저장하고 축적하지.”
일반적으로는 인간들도 할 수 있을 법한 간단한 이야기지만, 그 행위를 이루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신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에린의 몸속에 있는 구미호님이 그 힘을 축적한 기간은 다름 아닌 천 년이니까.”
“…천 년.”
에린은 그 시간의 의미를 곱씹었다.
자신이 존경하며 마지않은 은현도 약 400살이 넘는 초월적인 존재.
그런 은현도 엄청 강한데, 자신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구미호의 힘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현이보다 대단해?”
“당연히 나보다 대단한 분이시지.”
은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정말로 운이 좋게 여신의 눈에 들어 신의 사도가 되었고, 여신의 사랑을 받아 신력과 신의 무구를 하사받으면서 ‘반신(半?)’이 된 은현.
자신만의 힘으로 막대한 마력을 한데 모아, 천 년 동안 정갈하게 갈무리하여 성장시킨 힘을 기반으로 스스로 ‘반신(半?)’에 필적하는 존재가 된 구미호.
엄연히 ‘반신(半?)’의 격에 미치지는 못한다지만, 여신의 도움을 받은 자신과 스스로 노력하여 자신의 격을 끌어올린 구미호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검술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에 재능이 없는 자신이 다양한 노력을 하여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개인의 노력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는 은현은 천 년 동안 자기 수양을 이어왔을 구미호에게 무한한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은현의 말을 듣고, 에린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는 진짜 엄청 대단한 거였구나….”
[이제 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구미호는 뒤늦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아보기 시작한 에린의 태도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대단함을 에린 스스로가 깨닫는 것과 누군가가 말해줘서 자신의 대단함을 깨닫는 것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실제로 은현의 설명으로만 듣고 감탄을 했을 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에린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겨우 20살밖에 되지 않은 인간 여성이 천 년의 시간 동안 자기 수행을 이어온 고난과 노력을 모두 헤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은현이 자신보다 대단한 존재에 대한 존경심을 보내고 있기에, 에린도 그에 따른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 구미호의 위업을 모두 이해한 것이 아니다.
거의 엎드려 절받기 수준의 감탄 따위는 구미호에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면서 내부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에밀리아를 발견했다.
“에밀리아. 공사는?”
인형들 진두지휘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에밀리아에게 은현이 말을 걸었다.
“모두 완료하였습니다. 현재 마무리 작업이 약 10분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흐응. 슬슬 나도 그럼 준비할게.”
“알았어. 부탁해.”
“응.”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일리아나는 발걸음을 옮겨 앞쪽을 향해 걸어갔다.
나무 계단의 위에 존재하는 제단.
에린은 그 제단의 중심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구슬을 발견했다.
“구슬?”
보석이나 장신구치고는 크고 영롱하다.
게다가 신비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이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일리아나는 천천히 나무 계단을 타고 제단 위로 올라가, 제단의 주위에 그려져 있는 동그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이것은 앞으로 진행할 작업에 대한 사전준비의 시작이었다.
“에린.”
“응?”
“신수님이 가지고 있던 마력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힘의 크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
구미호의 시체, 신수의 유해에서 흘러나온 정갈한 마력은 평범한 나무가 특별한 힘과 효과를 지녀 ‘페르니아스의 신목(??)’이라고 불리게 만들었을 정도다.
이미 사망했던 신수의 유해에 남아있는 마력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본래의 구미호가 가지고 있던 힘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나 될 수 있을까.
“신수님의 힘의 근원은 바로 그 막대한 마력이 저장된 여우 구슬이었지.”
구미호가 사망하게 되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 여우 구슬을 페르니아스 왕국의 초대 국왕, 오르타스 페르니아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결국, 여우 구슬을 빼앗기고 남아버린 구미호의 육체는 힘의 근원을 빼앗긴 껍데기에 불과했다.
오르타스는 점점 약해져 가는 구미호를 계속해서 몰아세우며 힘을 소모시키고, 끝에는 죽인 그녀의 시체를 땅속에 묻으며 그 위에 나무를 심었다.
죽어서도 그녀의 시체를 활용하기 위한 오르타스의 악랄한 사고방식이 낳은 결과가 바로, ‘페르니아스의 신목(??)’.
[네 녀석을 설마….]
은현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를 깨달은 구미호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왔다.
아무리 이쪽의 이론에 취약한 에린이라도, 은현이 설명하는 ‘여우 구슬’과 일리아나가 작업 중인 제단 위에 놓인 ‘구슬’을 보고, 은현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아. 설마…?”
“네 짐작이 맞아.”
은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신수, 구미호님을 부활시킬 거야.”
이것은 에린의 몸을 빼앗아 처음 은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구미호와 은현이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시작점이다.
“현아. 이쪽은 준비 끝났어.”
타이밍 좋게 일리아나가 준비를 마치고 은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구미호의 새로운 육체가 될 새로운 여우 구슬을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에린.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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