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화 〉 361. 마중(2)
* * *
곧장 던전 주택의 내부로 복귀한 에린은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세 여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으응?”
스프를 떠먹고 있던 일리아나가 수저를 멈추고 거실로 들어온 에린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벌써 와? 놀고 들어오라고 했더니.”
“헤헤, 제가 지금 차림새가 조금 그래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린의 차림새는 빈말로도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푸석해진 머리카락과 고블린 토벌을 진행하면서 몸에 튄 피와 악취들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흐응. 그렇네. 아가가 열심히 했다는 증거니까. 현이한테 꼭 포상받았으면 좋겠네?”
“네! 감사해요!”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응원해주는 일리아나의 말에 에린은 기운차게 대답했다.
굉장한 의욕으로 가득 차 있던 에린을 보고 귀엽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엘레노아와 릴리도 마찬가지였다.
에린은 이내 릴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언니, 잘…마무리 짓고 왔어?”
“응.”
릴리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굉장히 간결하고 힘이 없는 대답은 누가 보아도 괜찮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가슴 속에 품었지만, 표정에 그 생각이 다 드러나는 에린의 얼굴을 보고, 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아. 에린. 주인님하고 좋은 시간 보내고 와야 해?”
“…응. 그럴 게.”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가고, 혼자 들어왔어?”
“아, 현이는….”
“아이는 이 성녀 아이의 저택으로 향했다.”
엘레노아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실체화를 통해 육체를 구현한 베르단디였다.
“나에게도 한 그릇 주겠느냐?”
“네. 베르단디님.”
자연스레 테이블에 앉고는 릴리에게 부탁하자,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에린은 베르단디의 설명을 보충했다.
“현이는 알렉스님을 만나러 갔어요.”
“오라버니를?”
“네.”
은현은 에린이 준비를 마치는 동안, 남은 시간을 활용하여 흑랑단 쪽과 연계해서 정기적으로 수집한 정보들을 종합하고, 아브로스와 알렉스와 함께 앞으로의 정세를 예측하고 변화에 대비하는 회의를 가졌다.
그 안에서 중요한 화제는 현시점에서 은현과 알렉스만이 알고 있는 유리아의 비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엘레노아는 아직 은현에게나 알렉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어떠한 대화의 흐름이 오가고 있는지는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흐응. 아가.”
“네?”
인사를 마친 에린을 일리아나가 불렀다.
“전에 내가 줬던 책 기억하니?”
일리아나가 줬던 책이라고 한다면, 딱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녀의 정사가 담겨 있는 성인 소설.
가끔가다가 그 책 속의 등장인물을 은현과 자신으로 망상하며 홀로 자기 위로를 했던 적도 있었다.
“…….”
“표정을 보니, 기억하고 있구나?”
“네,”
피식 웃으며 눈웃음을 짓는 일리아나는 말을 이었다.
“힘내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에린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는 에린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멈춰있던 식사를 재개했다.
“베르단디님, 그 사람하고 같이 있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하계에 있을 때마다, 항상 은현의 곁에 붙어있는 그의 여신인 베르단디가 은현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후후, 오늘만큼은 아이도 신수 아이와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말이다.”
적극적으로 에린을 밀어주자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의도에 편승하기 위한, 베르단디의 배려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아, 고맙구나.”
흘끗 옆으로 시선을 옮겨 자신의 앞에 음식이 담긴 그릇을 놓아준 릴리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네….”
그런 여신의 손길을 릴리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베르단디의 모성으로 채워가고 있는 릴리의 마음이 조금씩 호전되기를 바라면서 배치한 은현의 배려이기도 했다.
정말로 부모와 딸 같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둘의 광경에 일리아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흐응?”
여신의 손길을 좋아하는 악마와 악마에게 모성을 느끼고 있는 여신이라니, 어딘가 뒤틀려 있어도 한참이나 뒤틀려 있었지만, 이 관계가 그렇게 썩 나빠 보이지만도 않아 보였다.
릴리는 마음속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베르단디에게 의존했고.
베르단디는 흔쾌히 릴리의 그 의존을 받아 들여주었다.
일리아나는 미소지으며 릴리에게 물었다.
“릴리. 이번 여행에서 그 마법. 사용해봤어?”
“네.”
릴리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몽마의 고유 능력인 꿈의 세계, ‘몽환의 숲’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마법의 사용 분야에 있어서 스페셜리스트인 일리아나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릴리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이유가 있었지만, 순전히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면 슬슬 다음 단계를 시험해보아야 할 때인가?”
“흐음?”
“다음 단계인가요?”
일리아나의 말에 베르단디와 엘레노아가 흥미를 보였다.
◆ ◆ ◆
“그렇군. 사비로스 공작령을….”
은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브로스와 알렉스는 침음을 삼키며 표정을 굳혔다.
브로디아 마피아라는 거대 조직을 무너뜨렸다는 사실과 동시에, 사비로스 공작령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아브로스와 알렉스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죄송하지만, 이유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하게 된다면, 이 개인사의 주인인 릴리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
애초부터 이번 은현의 여행에 릴리와 에린이 동행했다는 사실은 이미 엘레노아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
굳이 은현이 이야기해주지 않더라도 대략적인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인 정세를 생각해보고 정치적인 움직임을 생각해보았을 때, 은현이 취한 행동은 렌디르 왕국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존재했다.
“영지의 상황은 어때?”
“많이 발전하고 있지.”
은현의 물음에 알렉스는 말 그대로 답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성과는 뉴비 모험가의 유입이다.
모험가의 육성에 많은 예산을 들여 시행되고 있는 복지정책은 은현의 의도가 들어가 시행된 정책이었다.
이 모험가의 예산에 조금이라도 보태도록, 자신이 정기적으로 제조한 포션들을 판매하며 큰 이윤을 남기고 있는 금액 일부가 지스를 통해서 공작 가문에 기부의 형태로 들어가도록 굴러가는 구조도 짜놓은 등 다양한 수를 동원하여 영지의 내부 경제가 활성화되도록 도왔다.
“네 말대로 모험가들을 육성하고는 있다지만, 뭘 계획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전쟁.”
“……!”
은현이 내놓은 살벌한 키워드는 아브로스와 알렉스를 동시에 몸을 움찔 떨게 하기 충분했다.
“…어디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거냐?”
“…….”
굳은 표정을 짓는 아브로스의 질문에 은현은 침묵을 지켰지만,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모릅니다.”
전쟁하게 될 대상도, 시기도, 장소, 이유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무언가가 크게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과 불안은 점점 쌓여만 갔다.
마치 불카노스의 망치로 자신의 신의 무구인 열쇠를 제작했을 때.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강력한 예감을 느꼈을 때와 비슷하다.
그렇기에 은현은 언젠가 앞날을 위해서 대비하고 있다.
병력을 육성하는 수단으로 많은 모험가가 이곳으로 찾아와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도록.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을 이용하여 그 환경을 정돈하고 상황을 유도했다.
“그렇군. 알았다.”
“믿어주시는 겁니까?”
그저 언젠가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자세한 설명이 빠진 막연한 예감만이 우선된 그의 생각을, 아브로스는 너무나도 선뜻 믿어주었다.
“네 녀석이 하는 말이니, 분명 이유가 있겠지.”
“…….”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그리고 너는 이제 엘레노아의 남편이야.”
“하, 그렇지.”
은현은 작게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아르미타스령으로 유입된 인구에 대한 정책으로….”
이후로 알렉스는 은현과 함께 급격히 성장해가는 영지의 내정을 안정화하기 위한 토의를 이어갔다.
“발전한 영지와 달리, 나빠질 우려가 있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병사들이나 기사들의 인원을 확충할 생각이다.”
“그러면 일단 아르미타스령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험가들에게도 한번 권유를….”
아브로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조용히 두 눈을 감으며, 영지민과 백성들을 책임지는 이 영지의 주인과 귀족으로 성장해가는 아들의 목소리를 귀속에 담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공작 저택에서의 논의를 마치고 은현은 저택을 나왔다.
“현아!”
정원을 지나 밖을 나가던 도중, 밝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은현은 고개를 돌렸다.
잔뜩 기대감이 차 있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뛰어오는 에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동시에 무거워지는 마음도 존재했다.
아내들과 베르단디가 노골적으로 이렇게 밀어주는 데는, 그만큼 자신이 에린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명확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완전 어장이나 치는 쓰레기 같은 마인드잖아.’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내들과 베르단디의 등쌀에 떠밀려, 릴리와의 여행 끝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신의 고민을 청산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공작님하고 얘기는 잘 끝냈어?”
“응.”
은현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응. 오늘 뭐 하려고?”
“옷도 사고, 밥도 먹고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장비도 사고. 그리고….”
그 이후의 일정도 있었지만, 은현은 그 일정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에린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중점을 맞추기로 마음을 먹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고기가 먹고 싶어!”
뉴비 파티와 함께 고블린 토벌을 진행하면서 닷새를 가까이 보존 식으로 끼니를 때워왔던 에린은 안 그래도 매우 배가 고픈 상태였다.
“그래. 가자.”
은현은 일단 몹시 배가 고파 보이는 에린의 배를 채우기 위해 중앙 광장을 지나 식당들이 늘어선 상점가로 향했다.
오후 4시쯤에 시작된 이른 저녁 식사 시간대의 식당들 내부는 그럭저럭 한산했다.
단둘이 식당을 찾아와, 시작부터 6인분의 바비큐를 주문해온 것에 점원은 미친 것이 아닌가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재차 확인한 끝에 은현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평균에 비해 많은 음식을 먹어치우는 모험가 손님들도 있었지만, 남녀로 구성된 두 명이 6인분의 식사를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광경도 매우 드물었다.
이후에도 은현과 에린의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추가로 필요한 장비가 있는지, 마음에 드는 보석이나 장신구가 있는지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와아….”
에린 또한 여자라서 그런지, 반짝이며 아름다운 보석을 보고는 감탄을 했다.
“사줄까?”
말만 한다면 얼마든지 사줄 용의가 있었지만, 에린은 미련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니. 나도 이 정도는 살 수 있어.”
괜히 1년 차에 금위계의 등급으로 승급했던 게 아니다.
쓸데없이 무언가에 낭비하는 성향도 아니고, 그동안 일을 해오면서 저축했던 에린의 개인적인 재산도 상당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린은 혹시라도 이런 식으로 은현이 이전에 약속했던 ‘소원’을 사용해버릴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싶었다.
그 소원은 에린에게 있어 그 사용처가 명확하게 존재했다.
은현과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 해가 지고 밤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떻게…말을 꺼내지?’
은현과 함께 어두워져 가는 광장의 밤길을 나란히 걸으면서, 에린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며 고민했다.
이윽고 일리아나의 조언을 떠올렸다.
전에 내가 줬던 책 기억하니?
표정을 보니, 기억하고 있구나?
힘내렴?
일리아나가 선물해주었던 소설 속에서는 요염한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을 꼬실 때 어떠한 행동과 대사를 읊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현아.”
“응?”
에린은 은현의 한쪽 팔을 붙잡고 꽉 끌어안았다.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팔을 끼워 넣음과 동시에, 양팔로 가슴을 조이며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팔을 단단히 고정했다.
“…에린…?”
갑작스러운 자신의 돌발행동에 은현이 작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에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읽은 소설 속의 내용과 상황이 매우 흡사했기에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나…. 오늘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