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355. 뉴비 교육(1)
* * *
“악마 아이야.”
“…베르단디님?”
어머니가 남긴 유품과 편지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던 릴리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금발녹안 여신의 등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냥하게 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베르단디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느냐?”
“아….”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여신의 감정에는 따뜻한 상냥함이 가득했다.
“괜찮다. 괜찮아.”
풍만한 가슴 속에 릴리의 얼굴을 끌어당기고, 머리를 쓸어내리며 가지런히 정리를 해준다.
그 느낌이 너무나도 포근하고 따뜻해서, 마치 정말로 과거에 어머니가 자신을 품에 안아주는 것처럼.
모성이 가득한 그리운 상냥함.
“아…으….”
릴리는 왠지 모를 그 그리움에 작게 몸을 떨었다.
“지금 이곳에는 나와 악마 아이밖에 없다. 그러니….”
꽉 끌어안은 릴리의 귓가에 베르단디는 상냥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마음껏 울어도 좋다.”
그 말이 지금까지 꾹 참아왔던 감정의 둑을 상냥하게 허물어버리는 것 같아서.
릴리는 어깨를 떠는 흐느낌을 더욱 키워나갔다.
“흑…. 흐윽…. 흐아앙!”
베르단디를 껴안고 릴리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석양이 보이려던 이른 저녁.
은현이 방으로 들어왔다.
“좀 어땠나요?”
울다가 지쳐, 릴리가 침대 위에서 베르단디의 품에 안겨서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은현이 베르단디에게 상태를 물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된 것 같구나. 지쳐서 잠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무엇을. 아이의 사람인데.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좋았다.”
베르단디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체화된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지만, 하계에서의 베르단디는 신력의 힘을 제한당했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인간 여성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간접으로 은현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상냥하게 릴리의 이마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내려주고,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로 자신의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이다.
흘끗 시선을 은현에게로 옮긴 베르단디는 우려가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번 일을 악마 아이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냐?”
“…견딜 수 있도록 지탱해줘야죠.”
은현의 역할은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을 자각하고 큰 절망에 빠져 있는 릴리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그녀를 곁에서 돌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 상실감은…누군가가 옆에서 마음대로 지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그 공허함을 가득 채워나가는 슬픔은 타인이 옆에서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현도 가족을 잃어봤기에 잘 알고 있다.
악마에 의해 부모와 가족이 모두 살해를 당하면서, 세상에 혼자만 남겨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는 어떤 부정의 감정들은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 자신의 경우와 현재 릴리의 경우에는 한 가지 차이점도 있다.
“릴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함께 있어 주죠.”
그때의 당시에 은현이 혼자였다면, 지금의 릴리에게는 은현이 있고, 베르단디가 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에린도 있다.
그녀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서 발을 벗고 나서주고, 노력해줄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고맙고 도움이 되는지, 은현은 알고 있다.
20대의 자신은 그 슬픔과 외로움을 혼자 이겨내야만 했고, 누군가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하소연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은현은 릴리의 그 고통을 공감해주고 평생을 함께하며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한 것 같아 기쁘면서도…. 고맙구나.”
베르단디는 마치 자식의 성장을 바라보듯 감개무량하면서도 쓰디씀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400살이 넘도록 나이를 먹어온 자신을 아들 취급하듯이 대할 수 있는 것은 베르단디뿐이라 생각하며, 은현도 헛웃음을 지었다.
“이만 자겠느냐?”
“네. 그래야죠.”
소영주 티즈가 빌려준 손님용 방에 준비된 침대는 1인용으로 베르단디와 릴리가 함께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이즈다.
재빠르게 담요를 가져와 바닥에 깔아 잠을 자기 위한 준비를 마련했다.
“침대에서 자지 않는 것이냐?”
“…어떻게 자나요. 그 1인용 침대에서 셋이.”
“흐음, 그냥 내가 다시 영체화를….”
“아뇨. 지금은 그냥 릴리를 그렇게 안아주세요.”
굳이 베르단디를 실체화시켜 릴리를 위로해줄 수 있도록 부탁한 것은, 간접으로나마 모성을 느끼게 만들어 심신의 안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배려가 포함된 은현의 특단의 조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 베르단디의 품에 안겨서 감정을 쏟아낸 릴리에게는 계속 베르단디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후후, 알았다. 아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니. 기꺼이 도와주마.”
“영광입니다.”
은현은 그렇게 미소지으며 잠에 빠졌다.
◆ ◆ ◆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릴리는 조금씩 두 눈을 떴다.
‘…숨 막혀.’
두 눈을 뜨자마자, 릴리는 갑갑함을 느꼈다.
맨살의 부드러운 살결과 좋은 냄새는 전신을 나른하게 만들었지만.
얼굴을 덮어버리는 물컹한 감촉은 릴리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흣!?”
의식을 완전히 각성시키고, 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키려던 릴리는 이내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났구나.”
“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다 보자, 자신을 내려다보며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금발녹안의 여신은 릴리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조심스레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보였던 추태를 자각한 릴리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베르단디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릴리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 베르단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아, 그, 저어, 그게….”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잔뜩 머뭇거리던 릴리가 허둥거리다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베르단디의 품에서 벗어났다.
“어, 어제는 제가 너무 추태를….”
“후후, 괜찮다. 나를 어미로 생각하고 응석을 부려오는 모습이 꽤 귀엽기도 했다.”
“아….”
미소지으며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주는 베르단디의 말에 릴리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억지로 대화를 전환 시키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주인님은…나가셨나요?”
“곧 돌아올 거다.”
타이밍 좋게 방문이 열리고, 은현이 들어왔다.
“릴리? 일어났구나?”
“아, 네…. 죄송해요. 주인님. 곧바로 식사는 어떻게….”
“괜찮아?”
은현의 질문에 릴리는 숨을 삼켰다.
“…….”
솔직히 괜찮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릴리는 애써 웃음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이죠.”
자신의 주인에게 괜찮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미소는 딱 보아도 위장적이었지만.
“그래.”
은현은 릴리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주, 주인님….”
“괜찮아.”
다른 말도 없이 괜찮다는 단 한마디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한마디였다.
포옹을 풀고, 릴리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로 화답한 은현은 이내 베르단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베르단디님.”
“알았다.”
베르단디는 곧바로 고개를 주억이며 실체화를 풀고 영체화의 상태로 허공을 날아 은현의 뒤로 와서는 릴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자. ‘집’으로.”
“아….”
집이라는 단 한 단어만이 들렸을 뿐인데, 릴리는 몸을 떨었다.
악마가 되어버리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평생을 흑마법사와 악마의 실험체로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자신에게도 구원의 빛이 내려왔고,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공허함 속을 채워가는 것은 슬픔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깨닫는 작은 기쁨에 릴리의 눈가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
「사랑하는 우리 딸, 힘들었던 만큼,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엄마. 저 지금 굉장히 행복해요.’
릴리는 어머니의 유언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에 기쁨을 느꼈고, 앞서 걷는 은현과 베르단디의 뒤를 따라 걸었다.
◆ ◆ ◆
“축하해. 에린.”
“아, 아하하…. 고마워요.”
에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모험가 일을 시작 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금위계의 승급이라니, 굉장히 대단한 거야.”
새로운 초신성으로 떠오르는 에린의 소문은 다시 한번 모험가 길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모험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험가가 에린처럼 1년 만에 금위계의 등급을 달성했던 모험가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참의 딱지를 떼고 동위계로 승급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1년에서 2년.
동위계에서 은위계로 승급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3년에서 5년.
은위계에서 금위계로 승급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7년 이상.
모험가의 등급을 승급하는데 걸리는 평균적인 시간들.
자신의 몸과 장비가 전재산이나 마찬가지며 직업의 수명이 굉장히 짧다는 특성상, 금위계까지 승급을 해보기도 전에 많은 모험가가 위험 속에서 목숨을 잃어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륙을 통틀어도 소수에 달하는 인원수인 금위계의 모험가는 어느 나라를 가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많은 의뢰의 건수 달성률과 모그라프 변경의 마수전선에서 살아남아, 굵직한 활약과 실적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모험가가 되기 이전부터 매우 우수한 실력을 쌓고 있었다는 기초가 확실히 덕을 보고 있었다.
“쳇…겨우 1년 차밖에 되지 않는 햇병아리가 벌써?”
“야, 그래도 저 여자랑 흑기사가 단둘이서 철호단을 아예 개박살을 냈다고 그러던데, 어찌보면 금위계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냐?”
에린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이번에 철호단 길드와의 해프닝도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모험가의 뉴비들을 대상으로 등을 처먹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들을 체포하는데, 큰 공헌을 한 에린에게 공작 가문은 개인적인 보상과 동시에 공식적인 포상으로 실적을 챙겨주었다.
그 결과 이번에 나온 안건이 바로 ‘금위계 승급’이다.
“아무리 그래도 윗선들 제치고 어떻게 1년차한테 금위계 승급을 시키냐고. 완전 전형적인 낙하산 아니야?”
안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에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미안해. 에린.”
“아, 괜찮아요. 뭐…이해는 해요.”
다짜고짜 새로 들어온 신입이 자신들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위로 올라오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싸움을 걸어온다면 받아줄 용의는 있었지만, 그들은 말로만 투덜거릴 뿐, 직접 에린에게 손을 대지는 못한다.
은현과 공작 가문이라는 뒷배경이 아니더라도,
이미 에린의 실력이나 소문은 모험가 길드의 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말로는 그렇게 질투를 하며 안 좋은 소리를 늘어놓아도, 에린의 무력 수준이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덤빌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굳이 저렇게 뒷담화를 하며 투덜거리면서 정작 자신에게 덤비지도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을 쏟을 가치를, 에린은 느끼지 못했다.
그냥 무시가 답이며 상대해주지 않는게 정답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친 것이다.
“그럼 위의 응접실로 가자.”
“네.”
트리샤의 안내를 받아 위층의 개인 응접실에 들어온 에린과 마주 앉은 트리샤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에린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어서 불렀어.”
“일이요?”
“응…. 딱히 돈이 되는 일은 아니기도 하고, 이런 귀찮은 일은 아무도 맡아주려고 하지 않아서.”
그런데 굳이 그런 일을 자신에게 부탁하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에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가 자신의 모험가 활동에서 많은 부분에 도움을 주고 배려를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며, 시간만 남는다면 트리샤의 부탁은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이번에 모험가 길드에서 신참 모험가인 뉴비들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교육을 하는 커리큘럼을 짜고 있는 건 에린도 알지?”
“네.”
이론이나 기초 훈련, 장비 지원 등 다양한 방면으로 모험가들을 육성하는 복지 정책은 공작 가문에서 직접 모험가 길드에 명령을 내려 시행 중인 정책이다.
“영지 내부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정말 순조롭지만…정말 중요한 게 아직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아서 말이야.”
“중요한 거라면….”
“실전 경험이지.”
“아….”
에린은 트리샤가 무엇을 부탁하려는 것인지를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시범으로 한 뉴비 파티의 교육을 에린에게 맡기고 싶은데. 받아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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