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349화 (349/730)

〈 349화 〉 349. 타락한 영웅(2)

* * *

주먹을 꽉 쥐며 바닥의 묘비를 몇 번이고 내려치는 일리아나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쁜 X끼.”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는 공허한 표정으로.

누군가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누군가는 동료들의 안색을 살피며 염려를 하고.

누군가는 신성력으로도 복구시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두 눈에 입어 깨어날 수가 없는 상태로.

각자가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숨은 영웅을 기렸다.

그런 가운데, 가장 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일리아나다.

“내 대답 들어준다고 했잖아…. 이렇게 가버리면 어쩌라고?”

“누님….”

안쓰러운 표정으로 일리아나를 쳐다본 제라드는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이윽고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

일리아나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모두 쏟아낼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다른 동료들 모두가 제라드와 같은 방식을 취한 것은 아니다.

“야. 그만 울어.”

“…….”

“이렇게 운다고 저 자식이 살아 돌아와? 아니잖아.”

최저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계속해서 나락으로 떨어져 나가는 이 분위기가 아니에스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앨리스의 두 눈을 치료하기는커녕 악화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눈 자체를 뽑아버리는 강경의 수단밖에 취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 짜증이 나 있었다.

전혀 대답도 하지 않고 미동도 없이 은현의 묘비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일리아나를 보고, 아니에스가 더욱 인상을 쓰며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

“누, 누님!”

“그만.”

은현이 없을 때, 팀원의 불화나 싸움을 중재하는 것은 언제나 리오드와 제라드였다.

레이넌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아니에스의 말이 맞아. 우리가 이곳에서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지.”

자신들을 이끌어준 숨은 영웅을 기리는 묘비를 만들고, 팀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은현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소중한 동료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은 그만큼 커다랬으며 동료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공허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각자의 돌아가야 할 자리가 존재했으며, 이 상실감과 슬픔을 극복하고 공허한 마음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나가야만 했다.

미르바빌라 제국의 황제를 죽이고,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이후.

훗날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는 여섯 명은 각자의 계획을 밝혔다.

“나는 앨리스를 데리고 성국으로 가겠어.”

아니에스는 시력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앨리스의 상태를 호전시키고 케어하기 위해 본국으로.

“나도 왕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리오드는 집안의 귀족 가계를 잇기 위해 페르니아스 왕국으로.

“저는…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흑마법사의 잔당들을 조사해보고 싶습니다.”

제라드는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의 화근을 추적하기로.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리오드의 물음에 레이넌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렌디르 왕국에서 다시 모험가로 활동을 할 생각이야.”

“그렇군.”

남은 것은 아까 전까지 눈물을 쏟아내며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던 일리아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모조리 쏟아낸 덕분인지, 지금의 그녀는 침착해 보였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지쳐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옳다.

“난…당분간 숲에서 혼자 조용히 살고 싶어.”

현재 그녀의 감정 상태를 생각해본다면 생각보다 정상적인 대답에 가까웠기에, 동료들 모두 그녀를 염려하기는 했지만, 그 결정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동안…고마웠다.”

실질적인 리더는 따로 있었지만, 그가 죽은 현재 리오드는 동료들과의 마지막 작별인사에서 작게 고개를 숙였다.

“뭐래. 안 어울리게.”

“아닙니다. 형님!”

“네가 제일 고생이 많았지.”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심적으로 지쳐있는 일리아나나, 혼수상태에 빠진 앨리스를 제외한 셋이 시큰둥하거나, 후련함, 고마움이 섞인 감정을 각자의 방식으로 내비쳤다.

그렇게, 레이넌은 오랫동안 합을 이뤄온 팀원들과의 작별인사를 마치고, 렌디르 왕국의 수도로 귀환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 전쟁을 끝낸 여섯 명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던 남자의 귀환은 왕국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다.

“제국의 황제를 물리치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다준 ‘레이넌 바르펠트’에게 백작의 지위를 수여한다!”

포상으로, 국왕에게서 직접 작위의 수여를 받은 레이넌의 상승세는 매우 가팔랐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던 귀족 가문의 여식과도 정을 나누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었고, 그와 아내를 꼭 닮은 아들과 딸도 하나씩 낳으면서 전쟁 이후 레이넌의 인생은 매우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저 모험가 활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갔던 평민 출신의 모험가였던 레이넌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성공의 역사를 쓰며 출세한 이야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성공과 출세를 모든 이들이 기뻐하며 그를 떠받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빠르게 위로 치고 올라오고,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 받을수록 위기의식을 느꼈던 렌디르 왕국 내부의 고위 귀족 세력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보…. 최근 고위 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요. 아버지께서도….”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심시키고, 레이넌은 다른 귀족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전혀 굴하지 않았다.

평민의 출신이었던 자신은 정치나 다른 이들의 위에 서거나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넌은 언제나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정면으로 고위 귀족들과 맞부딪쳤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그런 그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그를 따르며 지지하는 세력들도 생겨났을 정도.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이라면 레이넌도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귀족들이 있었기에 그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자연스레 레이넌을 지지했던 세력이 파벌을 형성해나가고, 고위 귀족들의 적대세력과 부딪치며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으며 이권을 가져오고 빼앗기는 등의 끝이 없은 싸움이 계속 지속이 되던 차.

“배, 백작 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저택이 습격을 받아서…!”

검은 복면을 썼다는 정체불명의 자들이 레이넌의 저택을 습격하여 사용인들을 습격하고, 백작 부인과 두 아이를 납치해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레이넌을 찾아왔다.

간신히 살아남은 고용인은 레이넌에게 습격자들이 남겨두었다는 검은 편지를 전했다.

그리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귀족의 지위를 반납해라.

레이넌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귀족의 지위를 버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이 나라의 위에 올라가겠다는 야심이나, 권력욕도, 재물욕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지금껏 자신의 뒤를 받쳐주고 지지했던 파벌 귀족들과 많은 지원을 해주었던 장인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망설일 수 있는 요소는 되지 못했다.

그렇게 귀족의 지위를 반납하겠다는 선언을 공식적으로 하고, 뒤이어 누군가를 통해 또다시 검은 편지가 레이넌에게 배달되었다.

­밤 9시. 포르테나 항구의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범선으로 찾아와라.

편지에 쓰인 지령에 따라, 레이넌은 마차를 타고, 사흘을 꼬박 달려 왕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하나의 범선을 발견했다.

자신을 속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함정의 가능성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던 터라, 단 한치의 고민과 망설임도 없이 범선의 내부에 올라탔다.

“비켜!”

자신의 진입을 방해하려는 선원들과 병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며 아내와 자식들을 찾기 위해 선실 내부를 이 잡듯이 찾아다녔다.

“여보! 얘들아!”

하지만 편지에 쓰여 있었던 범선의 선실에서도 아내와 아이들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마지막의 가장 끝 방을 열어젖혔을 때.

“크윽!? 이건….”

방안에 가득한 수면향의 습격을 받은 레이넌은 사흘을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병사들과 선원들의 사투 끝에 누적된 피로가 몰려와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바다의 한 가운데.

“……!”

바닷속에서 계속 심해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급하게 몸을 허우적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양손과 다리가 구속되고 구속한 철수갑에 달린 무거운 쇠공은 수면 위로 올라가려는 레이넌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이렇게 나는 죽는 건가?’

아내와 자식들을 빼앗기고, 그저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자신의 끝은 이런 비참한 결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들이닥치는 것일까.

원하고 바랬던 거머쥔 칭호와 업적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내는 전쟁을 끝낸 영웅.

그저 가족들과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나라에서 부여한 ‘책임’이라는 것에 부응하기 위해 부족한 소양을 채우고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 귀족으로서 행동하고자 살아왔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부여하는 것이냐고.

어째서 나에게 이런 끝을 맞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심해로 가라앉으면서, 질식사로 생명이 끊어져 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결국, 레이넌은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에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이런 결말을 강요할 수가 없다.

그렇게 신을 부정한 순간 그의 영혼에 말을 걸어오는 하나의 음험한 목소리.

[살고 싶나?]

점점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목소리는 레이넌의 마음속에 확실히 닿았고 점점 또렷해져 갔다.

[복수하고 싶나?]

애타게 찾던 신의 존재를 부정한 순간, 그를 찾아온 것은 신이 아닌 악마였다.

◆ ◆ ◆

“뒤늦게 알았지. 렌디르 왕국의 고위 귀족들이 나를 비밀리에 처리할 수단으로 너희 조직을 골랐다는 걸.”

레이넌은 감금되어 있던 공석수를 담담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공석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답이었다.

그의 사망 사실은 세상에 공표되지 않았다.

대영웅, 레이넌의 사망 사실만으로 대륙 전체가 큰 혼란에 빠져 파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영웅이 사망한 사실은 자국인 렌디르 뿐만이 아니라, 타국들 또한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민감한 문제.

거기에 렌디르 왕국의 고위 귀족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세력의 힘을 보존하기 위해 눈엣가시로 여겨 그를 처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전 대륙의 규모로 타국들의 질타와 비난을 받게 된다.

이미 레이넌을 처리하기 위한 고위 귀족들의 중심에는 사비로스 공작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와 비밀스러운 연줄을 유지하면서 온갖 더러운 일들을 마다하지 않는 브로디아 마피아에게 일을 맡긴 것은 최적의 인선이었다.

그때 당시 15년 전, 보스였던 페데리카의 아버지가 레이넌과 그 가족들의 처리를 맡긴 것이 바로 공석수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었어.”

레이넌은 순수하게 공석수를 칭찬했다.

퍼억!

그 칭찬이 시작됨과 동시에, 레이넌의 주먹 또한 행동을 시작했다.

있는 힘껏 공석수의 오른쪽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자, 그의 고개가 옆으로 크게 돌아가며 입안에서 이빨이 튀어나왔다.

“크….”

누적된 피로로 인해 몸 상태도 최악, 정신 상태도 최악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납치하고, 귀족의 지위를 반납하게 만들고, 나를 정신적으로 몰아넣었으니까.”

15년 전의 레이넌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을 잃어버렸고, 가족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면향으로 나를 재우고, 전신을 구속해 바닷속에 익사시키는 시도도 좋았어. 정말로 죽을 뻔했다.”

레이넌의 강점은 남들보다 많은 마력량을 기반으로 한 압도적으로 강한 신체 강화다.

타인들보다 뛰어난 근력과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는 레이넌에게 일반적인 공격은 웬만해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 그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선택한 살해 방식이 바로 익사였다.

수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근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이라면, 기도가 막혀 호흡을 못하게 된다면 사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네 녀석이….”

“운이 좋았거든.”

“선상에서 바다 한복판에 떨어뜨렸어! 그대로 해양 마수의 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내려주신 ‘신’을 만났으니까.”

“…….”

냉정을 잃은 공석수의 질문에 대답한 레이넌의 대꾸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심장한 발언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공석수에게는 그런 문제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존재했다.

“아가씨는…. 페데리카 아가씨는 어디 있지?”

“당연히 이 배 안에 있지.”

“당장 아가씨를…!”

“보고 싶다는 거겠지?”

레이넌은 냉정을 잃은 공석수의 얼굴을 보며 비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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