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화 〉 340. 에린의 고민
* * *
엘빈은 이래라저래라 하는 여동생의 행동에 인상을 썼다.
“귀찮군. ‘그 녀석’은 너의 이런 응석을 모두 받아 들여주고 있는 건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 녀석’의 언급이 은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둘 사이에 연결된 공통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많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응석을 부리는 누군가의 언급에 에린마저도 곧바로 은현을 떠올렸다.
그런 엘빈의 은현에 대한 언급은 에린에게 그다지 반가운 화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현이 얘기가 왜 나와?”
“릴리와 함께, 셋이서 여행을 갔다고 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정확히는 에밀리아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엘빈은 그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에린은 릴리를 부르는 엘빈의 친숙함에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언니랑 친해?”
“비슷한 공통점이 많으니까.”
신분도 그렇고, 인간의 특성을 벗어난 점이나, 은현에게 종속된 정령과 사역마라는 점들은 둘 사이에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잘 돌본다는 성격까지 비슷하다.
무뚝뚝한 인상의 엘빈의 첫인상으로 그를 대하는데 긴장감을 가졌던 처음과는 달리, 엘빈의 딱딱한 말투는 거칠어졌던 흑마법사의 시절에서 벗어나, 점차 인간성을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많은 기여를 한 이는 지금 그의 옆에서 풀빵을 씹고 있는 에리스의 영향이 컸다.
“오빠! 더 주세요!”
“알았어. 그래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저녁을 못 먹게 되니까. 앨리스님께 혼나면 안 되잖아?”
“두, 두 개만 먹을게요….”
엄마의 언급이 나왔기 때문일까, 에리스의 동공이 흔들린다.
엘빈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봉투에서 풀빵을 두 개 꺼내어 손에 쥐여주었다.
많은 개수도 아닌데, 가녀린 소녀의 손바닥은 두 개를 모두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위태위태했다.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풀빵 하나를 입속에 털어놓고 오물거리는 에리스의 표정이 풀어진다.
조금 식은 탓인지, 아까처럼 뜨겁지 않은 풀빵을 씹고, 내부에 있던 팥소의 단맛이 입안에 퍼지자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렇게 풀빵을 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엘빈의 손을 맞잡고 세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엘빈은 에리스의 보폭에 맞춰 걸음걸이를 신경 쓰면서, 반대편에서 따라 걷고 있는 에린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직도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냐?”
“…남이사.”
직접적인 엘빈의 질문에 못마땅함을 느낀 에린을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마음을 전하는 것뿐인데, 그렇게 힘든 일이야?”
“오빠는 너무 여자의 마음을 몰라. 이건 중요한 문제야. 혹시라도 거절당하면…그래서 어색해지는 건 더 싫어.”
그저 결심이 서지 않는 것일 뿐이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고, 잘해주고 있는데.
이 이상으로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다는 욕심과 지금의 관계를 부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사이에서, 에린은 깊은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태다.
“그 녀석이 너와의 관계를 그렇게 허투루 생각할 것 같지 않은데.”
자신의 사람으로 들어온 인연은 끝까지 책임지고 끌어안고 가는 은현이 에린과의 관계를 소홀히 대할 리가 없다는 것이 엘빈의 생각이다.
흑마법사인 자신을 비롯해 악마라는 특성을 가진 릴리마저도 구제해서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는 만큼.
강직한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은현이다.
“…오빠.”
“왜.”
“오빠는 에리스를 여자로 볼 수 있어?”
“미쳤냐?”
난데없는 비유는 곧장 엘빈의 이마를 다시 한번 찡그리게 했다.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에리스의 표정을 살폈지만.
에리스는 군것질에 정신이 팔려 에린의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런 작고 여린 소녀를 여자로 볼 수 있냐는 여동생의 질문은 도저히 정상이 아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품는다면, 에리스의 아버지인 데르킨에게 얼마나 얻어맞게 될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오빠도 그렇잖아.”
“야, 할 수 있는 비유가 따로 있지. 어떻게….”
“현이가 나를 보는 표정이 그래.”
“뭐?”
“오빠가 에리스를 돌봐줄 때 짓는 시선 하고 똑같아. 현이는…나를 여자로 보고 있지 않아.”
기껏해야 한창 성장하고 있는 여동생을 챙겨주는 오빠, 더 심하게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 같은 시선을 종종 느끼곤 했다.
그것이 매우 기분 좋고 따뜻하긴 했지만, 에린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최근에는…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어.”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최근에는 복잡한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현의 시선도 느꼈다.
자신이 방안에서 은현을 생각하며 자위를 하고 있었던 것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에린에게는, 그런 은현의 시선도 굉장히 신경 쓰이는 요소 중 하나였다.
“흐음.”
여동생의 침울한 표정을 본 엘빈은 이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언니.”
“응?”
에리스가 엘빈의 손을 놓고, 자리를 옮겨 에린과 엘빈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언니는 그 아저씨 좋아해요?”
“…아저씨.”
에리스가 은현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새삼 그의 내력을 꿰뚫어 보는 소녀의 안목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에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해.”
“그런데 왜 숨기고 있어요?”
“그야….”
말을 머뭇거리며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그런 에린을 올려다보며 에리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언니 안 싫어하는데요? 좋아해요.”
소녀는 무엇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에리스의 목소리에는 정말로 그렇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신비함이 깃들어있었다.
“그럴까?”
“네!”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이 어린 소녀의 모습에, 에린도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스. 이 녀석이 고백하지 못하는 데는 아주 큰 이유가 있어.”
“이유요?”
에리스에게 중대한 사실을 알리려는 엘빈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소녀도 호기심을 보이며 이어질 엘빈의 말을 기다렸다.
“얼굴이 아주 못생겼거든.”
“…뭐?”
[풉!]
느닷없는 외모 공격에 에린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고, 동시에 구미호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얼굴이요? 으음….”
에리스는 엘빈의 말에 공감하기 힘든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지. 에리스, 절대로 저 녀석처럼 성장하면 안 돼.”
“아, 알겠어요. 오빠….”
한 치의 거짓말도 섞이지 않은 듯 굳은 얼굴로 덧붙이자, 에리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이없어! 자기는 뭐 얼마나 잘생겼다고!?”
“지금 이 얼굴은 본래의 내 얼굴이 아니다. 그러니까 비교하는 것도 무의미하지.”
“거짓말하지 마! 현이가 오빠 얼굴 만들 때, 생전의 본래 모습 그대로 똑같이 만들었다고 그랬는데!”
사망하면서 본래의 육체를 잃어버린 엘빈이 현재 세계수라는 나무의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를 신체의 그릇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에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본래의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핑계로 빠져나가려는 오빠의 양심에 기가 찼다.
“오빠는 양심에 털도 안 나?”
“안 나는데. 정령이라.”
“진짜 짜증 나!”
뻔뻔하게도 대꾸해오는 엘빈의 태도는 활활 타오르는 에린의 마음속에 기름을 붓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상 쓰지 마.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못난 얼굴이 더 못나지니까. 어머니가 물려주신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가 없어.”
“그러는 자기는! 오빠도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고블린처럼 생겼으면서!”
“지금…어머니의 외모를 비하하는 거냐? 네 어머니가 내 어머니다. 뭐하자는 짓이야?”
패드립 비슷한 발언을 들었다고 생각한 엘빈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내가 언제 엄마 얼굴이 고블린 같다고 했어! 니 얼굴이 고블린 같다고!”
밑도 끝도 없이 패드립으로 몰고 가는 것에 짜증이 잔뜩 치민 에린의 언성이 높아져 가자, 주위의 사람들이 언쟁을 벌이는 에린과 엘빈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 둘은?”
“어, 저 아가씨 그 수은의 제자 아니여?”
“방금 저 양반을 오빠라고 하지 않았나?”
“투덕거리며 싸우는 게 진짜 남매가 맞는 것 같은데?”
데르킨과 함께 모험가 길드에서 활동하면서, 엘빈 또한 제법 이름을 알려져 있음에도 모험가들이 그를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외향 때문이다.
평소 모험가에 드나들면서 의뢰를 수행할 때는, 그림자로 만든 전신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흑기사의 모습으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의 상가 거리를 걷고 있는 모험가들은 엘빈의 맨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두 남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추한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에리스가 에린의 치마를 움켜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내 어디가 엄마랑 안 닮았다고…!”
“언니.”
“응?”
“엘빈 오빠는…고블린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심통이 난 표정으로 항의를 해오는 어린 소녀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역시 에리스야.”
소녀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기뻤는지, 엘빈은 에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그녀를 안아 들어 올렸다.
“…씨이.”
마치 오빠와의 말싸움에서 진 것 같아서 도저히 분이 가시지 않았던 에린이 이를 갈았다.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의기양양하게 앞장을 서서 걷고 있는 얄미운 엘빈의 등 짝을 바라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떤다.
“아, 뒤통수 진짜로 때리고 싶다.”
자신은 저런 오빠의 멍에를 벗기겠다고,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수련을 해왔다는 것이 너무나도 허탈해서 손해를 보는 기분을 느꼈다.
엘빈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네 못생긴 외모 같은 건, 전혀 신경도 안 써. 할 거면 그냥 빨리 저질러버려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적어도 오빠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오빠도 모태솔로면서!”
태어나서 연애도 한번 해보지 못한 모태솔로가 지금 누구를 가르친다는 말인가.
안고 있는 소녀의 마음도 눈치채지 못하는 멍청하고 둔감한 엘빈이 감히 자신에게 연애에 대해서 훈수를 두다니, 기가 차다 못해 짜증밖에 나지 않았다.
‘자기나 잘할 것이지.’라며 작게 투덜거리면서, 엘빈과 에리스의 뒤를 따라 걸어가던 중.
“꺄악!”
“…비명?”
에린은 멀찍이서 들린 여성의 비명에 고개를 확 돌렸다.
“비명이라고?”
갑작스레 뒤따라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한 곳을 응시하는 에린을 보며, 엘빈이 물었다.
“나는 듣지 못했는데.”
“…나는 감각이 조금 예민하니까.”
신수의 힘을 이어받으면서, 조금씩 구미호의 특성에 동화되어 신체의 감각기관이 발달 된 에린은 타인들보다 감각이 예민한 편이다.
특히나 악취나 비명 같은, 안 좋은 것을 감지하는 데는 아주 뛰어난 수준.
‘미호야. 어떻게 생각해?’
네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명이 맞군.
혹시나, 싶어 물어본 구미호 의견도 에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빠. 잠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렇군.”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에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엘빈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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