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 339. 인생은 라인(2)
* * *
공작 저택에 과거 엘레노아의 침실이었던 방은, 엘레노아가 은현에게 시집을 가고,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개인 집무실로 바뀐 상태였다.
새롭게 정비된 지 약 3개월이 지난 지금.
엘레노아는 자신의 개인 집무실에서 무수히 많은 서류 뭉치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새롭게 개축되는 공작령의 신전 관리 업무, 게다가 은현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그의 주도하에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업의 관리를 맡은 그녀는, 어떤 면에서 이 영지의 주인인 알렉스보다도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완공은 약 2개월 뒤로 예상됩니다.”
“그렇군요.”
정기적인 신전의 개축 경과를 보고받는 도중, 엘레노아는 사제에게 물었다.
“저희 신전의 관리를 맡아줄 새로운 주교님은 정해졌나요?”
“아직입니다.”
“후우…그런가요.”
엘레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령의 모험가 길드의 성장세에 힘입어, 실력 있는 다수의 사제와 성기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지금.
베스타 교가 국교인 에레니아 신성국에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파견 요청과 함께, 신전의 관리를 맡아줄 주교의 파견 요청도 함께 넣었지만.
이에 대한 답신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양국 간의 거리도 만만치 않으며, 신성국 내부에서도 파견할 인력과 주교의 선정 문제로 많은 토의를 거치면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문제.
하지만 엘레노아나 공작령의 신전 사람들로서는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실질적으로 공작령의 신전이 완공되었음에도, 신전에게 근무를 해줄 사제들과 성기사들, 신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차라리 엘레노아님께서 공작령 지부 신전의 주교를….”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그, 그렇긴 하죠.”
주교의 임명은 신성국에서 교황과 대주교들, 다수의 추기경들의 토의로 결정되는 사안이다.
아니에스가 엘레노아를 자신의 후임으로 강력하게 밀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아니에스는 오히려 엘레노아의 주교 임명을 반대하는 쪽이었다.
한 신전 안에 소속된 자리를 부여하는 것은 엘레노아에게 있어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는 족쇄 같은 자리다.
“게다가 저도 주교의 자리에는 앉을 생각이 없어요.”
엘레노아 또한 그 생각은 아니에스와 동일하다.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는 은현의 곁이어야 하지, 한 신전의 관리자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신전 개축의 경과에 대한 정기 보고를 마치고, 사제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 엘레노아의 집무실을 나갔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고 착용하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뒀다.
고개를 위로 숙이고 눈을 감으며 굳어있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몸을 풀었다.
그러면서 처리한 안건들과 처리해야 할 안건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강 노예들의 정리는 모두 끝났고….”
게이트를 통해서 에린과 에밀리아가 데리고 온, 은현이 구매했다는 불법 노예들의 신분 해방은 모두 마쳤다.
나이가 어린 미성년의 아이들은 에린의 인솔을 통해서, 보육원으로 보냈다.
그 이외의 성인 남녀들은 알렉스와의 상의로 공작령의 대규모 농장지대에서 노동을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는 형식의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임시방편을 마련해주었다.
무상으로 해방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신분을 해방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신분은 ‘농노’로서 농장지대의 주인인 공작 가문에 종속된 신분이다.
평민의 아래 신분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정당한 사유재산권을 인정받으면서 제대로 임금이 지급되는 형태에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드시, 반드시 이 은혜는 갚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열심히 일해서 저희를 사주신 몸값,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전하던 중년 남성의 마음에 엘레노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자신이 한 일은 은현이 보내온 노예들과 오빠인 알렉스의 사이에 다리를 연결하여 그들의 처우 개선을 신경을 써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온 것을 떠올리고, 엘레노아는 그때 느꼈던 뿌듯함과 따뜻함이 가득한 기쁨을 가슴 속에 되새기며 미소를 지었다.
우우웅
“응?”
잠시간 굳어있는 몸을 풀며 감상에 젖어 있는 도중,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통신용 수정구슬이 진동하며 신호를 보냈다.
서랍에서 수정구슬을 꺼내어, 작동을 시켰다.
수정구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 엘레노아는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은현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현재 모험가와 상회의 경영을 겸업하고 있는 전직 사기꾼, 지스의 얼굴이었다.
[오! 마, 마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네. 무슨 일이죠?”
엘레노아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스의 인사를 받았다.
평소 무슨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연락을 하던 사이가 아니었던 둘의 통신은 이번이 겨우 세 번째.
엘레노아는 그런 그가 직접 자신에게 연락해온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통해서 은현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려 할 경우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하려는 것이라면,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생각을 품으며 수정구슬 안의 지스를 응시했다.
애초에 과거에 은현에게 사기를 치려 했었다는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은현은 그가 다시는 사기를 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숨통을 틀어쥐면서 옭아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엘레노아의 입장에서 지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제, 제가 무언가 잘못했습니까? 저 요즘 진짜로 착하게 살고 있는데요? 모험가 길드나 보육원에 기부도 하고요.]
그런 엘레노아의 시선이 날카로웠기 때문일까, 지스는 괜히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고양이 앞에 놓인 생쥐처럼, 잔뜩 쫄아있는 그의 표정은 굉장히 한심했다.
“아뇨. 그런 거 아니니 얘기하세요.”
[…….]
마치 트집 잡을 것이 없나, 경계하는 날카로운 시선에 지스는 쉽게 말이 트이지 않았다.
[그 양반 주위에는, 다 이런 기센 여자들밖에 없는 건가…?]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눈썹을 치켜뜨며 되묻는 엘레노아의 말에 지스는 화들짝 놀라며 과장된 리액션을 취했다.
과거 모그라프 변경 지원 때, 일 대 다수로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의 단원들을 때려눕혔던 에린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자신의 입을 지스가 찰싹 때리며 저주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빨리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후우….]
침대 위에서의 엘레노아를 모르는 지스의 입장에서는, 에린보다도 엘레노아가 더 무서웠다.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지스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한 가지 제보를 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보?”
[예. 그…제가 한창 사기를 치면서 신참 모험가들을 등쳐먹으면서 만나게 된 동업자가 하나 있는데….]
“…계속 얘기하세요.”
엘레노아는 지스의 내부 고발 이야기에 찡그렸던 인상을 풀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 ◆ ◆
화창한 맑은 날씨가 전개되고 있는 오후.
아르미타스령의 광장은 굉장히 활기찼다.
상가 거리로 정해진 구획은 음식점이나, 무기나 방어구를 판매하는 대장간, 포션이나 약재들을 판매하는 연금술 공방 등의 다양한 곳들이 즐비해 있다.
“엄청 활기차졌네….”
에린은 시끌벅적한 거리를 걸으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길거리는 어느새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섰고.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은 둘째치고, 모험가들이나 상인, 귀족, 평민들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매우 다양하다.
3개월이라는 짧은 단기간에 무수히 많은 건물이 건축된 것도 그렇고, 이렇게 대규모의 인구가 밀집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공작가에서 많은 지원을 해준 덕분이지.”
현재 공작령의 모험가 길드는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 신참 모험가들인 뉴비들이 첫 시작점으로 가장 선호하는 장소다.
기초적인 장비와 포션의 지원부터, 수수료 면제 등 다양한 혜택들을 비롯해 뉴비들이 많은 경력을 쌓기에 제일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기 때문.
그렇게 모험가들이 한 장소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으로, 모험가들과 연계된 다양한 사업들도 들어서면서, 현재 아르미타스령의 상권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아무리 그래도…이렇게 보면, 이젠 페르닌에도 전혀 안 꿀리지 않아?”
에린은 신기한 표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함께 걷고 있는 엘빈에게 물었다.
“글쎄, 나야 페르닌의 광경을 제대로 볼 일은 없었으니까.”
사망한 이후로, 대낮의 페르닌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었던 엘빈에게는, 현재 아르미타스와 비교를 해볼 수 있을 만한 다른 거리의 기억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그렇게 에린이 갑작스럽게 활기가 가득해진 상가의 거리에 대해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엘빈의 손을 끌어당기며 나이 어린 소녀가 노점들을 가리켰다.
“오빠! 저거! 저거 먹어보고 싶어요!”
“그래. 뛰지 마.”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자신의 오빠를 보고, 에린은 기가 찬 시선을 보냈다.
“…….”
기다랗고 가는 특별한 모양의 귀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마법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 하프 엘프 소녀를 정성스레 돌보고 있는 엘빈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 엘빈에 에리스를 목마에 태워주고 놀아주고 있던 모습은 아직도 에린에게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감사합니다.”
“흐흐, 형씨! 동생들이 아주 예쁘구만! 또 오라고! 서비스 많이 줄 테니까!”
“그, 그러겠습니다.”
엘빈은 갓구운 풀빵이 담긴 봉투를 받고, 값을 지불하자, 웃음꽃을 피운 노점 주인의 인사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풀빵 하나를 꺼냈다.
“뜨거우니까 조심히 먹어야 해.”
“네! 아아~.”
방긋 웃으며 입을 벌리고 있는 에리스의 입에 풀빵을 넣어주자 에리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호호 불었다.
“흐, 흐허워효!(뜨, 뜨거워요!)”
“그러니까 조심히 먹으래도.”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허둥대는 어린 소녀를 본 주위의 사람들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런 가운데, 웃지 못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에린뿐이다.
“흥,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여동생은 에리스인 줄 알겠어?”
“갑자기 또 웬 시비야?”
느닷없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툴툴거리는 여동생의 언행에 담담했던 엘빈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에리스한테 하는 것만큼 나한테도 좀 잘해봐. 진짜 어이없어.”
“에리스와 같은 대우를 너에게 하라는 소리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 왜 말이 안 돼!”
빽 소리를 지르는 에린의 투정에, 엘빈은 작게 한숨을 쉬었고, 봉투 속에서 풀빵을 꺼내 에린의 입가에 내밀었다.
오빠의 행동에 에린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아~.’해라.”
“뭐?”
“에리스와 같은 대우를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린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엘빈이 자신의 입안에 상냥하게 풀빵을 넣어주고, 자신이 그것을 에리스처럼 활짝 웃으며 받아먹는 것을 상상하니, 오글거려서 참을 수가 없다.
만약 현재 에린의 모습이 구미호로 변신해있었다면, 아홉 꼬리와 수인의 귀가 소름이 돋아 털을 삐쭉 세웠을 정도.
“하, 하지 마! 절대로 하지 마! 하면 때릴 거야!”
에린은 맨날 자신에게는 못생겼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에리스는 정성스레 보살피는 것에 서운함 때문만이 아니다.
그 서운함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낀 것은 짜증이다.
그저 오랫동안 보아온 오빠가 저렇게 에리스를 상냥하게 챙기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근질근질하고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참을 수가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라고?”
“하지 마! 나한테 상냥하게 같은 거, 절대로 하지 마! 방금 손발이 사라질 뻔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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