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337. 어머니의 유품(3)
* * *
처음 만났을 때, 릴리의 어머니는 굉장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영지의 농사에 필요한 일손이 크게 부족해져,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농노를 구매하기 위해 다수의 노예를 사들였다.
그들 중에 릴리의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티즈는 그렇게 사들인 노예들에게 밥을 먹이고, 힘을 키워 살이 붙도록 만들고, 농사를 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었다.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노동의 대가로 밥과 옷, 잠자리를 제공한 티즈와 노예들의 관계는 일종의 계약이나 마찬가지.
티즈가 구매한 노예들은 릴리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이었다.
값이 싸고, 잘 키워서 건강하게만 자라준다면.
오랫동안 농사일을 해주면서 영민들의 배를 곪지 않도록, 아이들로 선별해서 구매한 것이다.
그중에서 릴리의 어머니를 구매한 것은 반은 동정이었으며.
반은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키워줄 모성이 있는 여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녀는 함께 구매한 농노들을 제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폈소.”
너희들을 보면…떨어진 내 딸이 자꾸 생각이 나.
그래서…그냥 둘 수가 없네….
“많은 아이가 그녀를 의지했고, 그대의 어미는 처음 해보는 고된 농사일 속에서 아이들의 버팀목이 돼주었소.”
농사일로 힘들고 지친 몸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
릴리는 작게 탄식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해서 과거형으로 말하는 티즈의 말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두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확인하고, 은현이 그녀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
원래부터 마피아의 건달들에게 잔뜩 시달린 뒤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은 릴리의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야위어져만 갔고.
마침내 농사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어머니의 여생을 들은 릴리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흐…으윽….”
릴리의 마음속이 다행과 안도로 가득 채워지며 어깨를 흐느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딘가, 이상한 곳에서 다른 남자들에게 능욕을 당하며 맞이한 최후가 아니라.
좋은 장소와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안심이 돼서.
“미안, 미안해요…. 엄마…. 내가,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하고,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했다.
그런 릴리와 그녀를 위로하는 은현을 안내하던 티즈는 어떤 방 앞에 멈춰 서서, 방문을 열었다.
이윽고 발을 들이민 방안의 내부는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찬 창고였다.
그런데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것이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열어보시오.”
티즈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어 릴리에게 내밀었다.
“이건…뭔가요?”
눈물을 쏟으며, 눈가가 붉게 퉁퉁 부은 릴리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그대가 이곳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겠소?”
“그건….”
“릴리.”
너무 당혹스러워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릴리를 은현이 불렀다.
“네?”
“네 어머니는…믿고 계셨던 거야. 네가 꼭 찾아올 거라고. 아니, 정확히는….”
흘끗 은현이 티즈를 바라보자, 티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청년의 말이 맞소. 그녀는…계속해서 희망을 놓지 않았었지. 남편이, 그대의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그대를 데리고 자신을 찾아오기를.”
“아….”
“그녀의 사연은 우리도 들어서 알고 있소. 아내와 딸을 팔아넘긴 남편에 대한 이야기에, 나를 비롯한 모두가 분노했지. 그런 남자 따위는 그냥 기다리지 말고, 포기하라고. 기대를 하는 만큼 상처를 입는 것은 본인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소. 그런데도 그녀는…희망을 놓지 않았소. 가족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한순간의 판단으로, 나와 딸을 버렸어도…. 그건 그 사람의 본모습이 아니에요. 꼭 정신을 차리고…. 딸 아이를 되찾아서 저를 데리러 올 거예요. 저는…믿어요. 남편이니까.
과거에 처녀였던 자신을 사랑했고, 가정적인 남편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릴리의 어머니는 남편이, 릴리의 아버지가 꼭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열심히 다시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딸을 되찾은 뒤, 자신을 찾아와 사죄를 해온다면.
뺨 한 세 대 정도는 때려주고 용서해주겠다며, 헛웃음을 짓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남편은 딸을 데리고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병세가 악화되어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그대의 어미가 남긴 유품이오. 언젠가…그대나 그대의 아버지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그 유품만큼은 보관해달라고 했지.”
티즈는 농노였던 릴리의 어머니가 말한 유언을 받아들이고 유품을 지금까지 지켜온 것이다.
“아….”
유품을 손에 쥐고 있는 릴리의 손이 떨렸다.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팔찌?”
상자의 안에 있었던 것은 정성스레 수가 놓아 진 팔찌와 다수의 편지이다.
조심스레 상자 속에서 편지지를 꺼내 들자, 티즈가 말했다.
“그 편지들은 그녀가 남긴 말들을 모두 내가 글로 옮겨 적은 그대의 어미의 유언이오.”
만약에 자신이 죽고 나서도, 늦게라도 남편과 딸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릴리의 어머니가 남긴 말들이 적혀 있는 편지.
“먼저 가게 돼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었소.”
“아…. 엄마…. 엄마….”
릴리는 편지와 팔찌가 담겨 있는 상자를 꽉 끌어안고 눈물에 잠겼다.
너무 늦게 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릴리의 가슴 속이 가득 매어졌다.
“영주님.”
“말하시오.”
“하룻밤만 묵을 방을 마련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느끼고 있는 릴리를 흘끗 바라보며, 은현은 정중하게 티즈에게 부탁했다.
릴리가 혼자 그녀의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공간과 장소를 제공해주었으면 하는 은현의 의도를 파악했다.
티즈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손님용으로 준비된 방에 안내를 받아, 은현은 방안의 침대에 상자를 끌어안고 있는 릴리를 앉혔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 주고 말을 걸었다.
“릴리 이곳에서 쉬고 있어. 너무 울지만 말고.”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릴리를 방에 두고, 은현은 방을 나왔다.
방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티즈는 침중한 얼굴로 은현에게 물었다.
“혼자 둬도 괜찮겠소?”
“강한 여자입니다. 지금은…혼자 있게 두고 싶어요.”
“그대는 저 처자와 어떤 관계요?”
“아내입니다.”
“그렇군….”
찾아온 남자가 평민의 신분처럼 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라는 것에서, 티즈는 처음부터 어떤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
말을 아끼면서 굳은 은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티즈는 자신의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음을 확신했다.
“살아는 있소?”
“거리를 전전하는 비참한 생을 살고 있죠.”
“결국…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군….”
릴리의 아버지가 릴리를 데리고 찾아오기를 바랐던 릴리의 어머니가 가졌던 바람은, 결국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편은 오지 못했고 딸만이 자신을 찾아왔으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애석한 상황이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무엇을. 감사를 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소.”
티즈는 순수한 은현의 감사에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은현이 품에서 금화가 다발로 든 주머니를 꺼내어 티즈에게 내밀었다.
티즈는 범상치 않은 두둑한 크기의 돈주머니의 내부가 모두 금화 다발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하루치를 묵는 방세라기엔 너무….”
“방세뿐만이 아닙니다. 제 아내의 어머니가 남기신 유언이 적힌 편지나, 유품들을 지금까지 보관해주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노예로서가 아닌, 하나의 사람이자 인격체로서 마지막까지 릴리의 어머니를 대우해주었던 티즈의 성품은 존경받아 마땅한 대우를 하고 싶었다.
“저와 제 아내가 느끼고 있는 감사의 크기만큼을 보답해드리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셨으면 합니다.”
“…….”
티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이 돈주머니의 양은 소규모의 영지인 자신의 영지 경영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액수.
욕심이 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만큼 부담스러운 액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물러설 생각을 보이지 않는 은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티즈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감사히 받겠소.”
은현이 내민 돈주머니를 받아든 티즈는 묵직한 주머니의 무게에 작게 신음했다.
“음….”
은현은 창문 밖을 응시했다.
바깥의 농장의 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을 응시하고, 티즈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이른 시간이군요. 마침 할 것도 없는데, 농사일이나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밭 일을 해본 적이 있소?”
“물론이죠.”
집안에 온실 환경까지 갖추어 각종 채소들을 재배하고 있는 은현이 농사에 대한 지식을 모를 리가 없다.
“그대는 신기한 청년이오. 밭 일을 할 줄 아는 귀족 청년이라니.”
“아무렴 직접 농사를 짓는 영주님만 할까요.”
“그것도 그렇군.”
티즈는 넉살 좋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은현의 반박에 헛웃음을 지었다.
◆ ◆ ◆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아마도 그 못난 인간이 정말로 잘못을 뉘우치고 너를 데려왔다는 뜻이겠지.」
“…엄마.”
편지의 서두를 읽자마자 릴리의 가슴이 매어졌다.
정말로 티즈의 말대로, 자신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한 끝에, 딸과 함께 자신을 데리러 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배신당하고, 팔리고 나서도, 남편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그 미련함이.
릴리를 더욱더 슬프게 만들었다.
「아니면, 정말 기적처럼 우리 딸이 멋진 남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훌륭한 남편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거나. 하지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겠네.」
“아니에요. 기적은…있었어요.”
악마로 변이되고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자신에게 내려온 구원의 기적은 존재했다.
「릴리, 이 엄마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 한때는 너를 만나게 해준다는 약속을 사람들이 지키지 않아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절망했지만…. 이 영지에서의 농노 생활은 나에게 불행스러운 생활이 아니었단다.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지.」
이상한 곳으로 팔려가지 않았고, 좋은 장소와 좋은 사람들이 있는 이 장소에 팔려오게 된 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웠다고 릴리의 어머니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기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머니 또한 기적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
안도와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이 릴리의 가슴 속에 차오른다.
「그러니까, 너무 늦게 왔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단다. 너는 너무 착하고 여리니까, 분명 늦게 찾아왔다고 눈물을 흘리고, 자책하고 스스로를 상처입힐까 봐, 이 엄마는 너무 걱정돼.」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고 임종이 가까워질수록, 릴리의 어머니는 릴리를 걱정했다.
「아픈 몸 때문에 우리 딸을 찾으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혼자 내버려 두게 해서,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함께 노예로 팔리게 되고, 릴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연신 거듭되는 어머니의 사과들.
“아니, 아니야…. 엄마…. 내가,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내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흐윽….”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릴리의 손은 강하게 떨리고, 편지지 위로 떨어진 릴리의 눈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리 딸의 생일을…한 번도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상자 안에 릴리를 생각하면서 만든 팔찌를 넣어둘게.」
「이런 것밖에 남겨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아….”
릴리는 조심스레 상자 속에 정성스럽게 땋아진 수제 팔찌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엄마는 릴리가 앞으로도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
“엄마….”
「사랑하는 우리 딸, 힘들었던 만큼,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흐, 으윽….”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편지지와 유품으로 남겨둔 자신의 팔찌를 품에 꽉 끌어안은, 릴리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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