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 335. 어머니의 유품(1)
* * *
“주인님….”
“끝났나 보네.”
상황이 정리되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며 정신을 차리던 릴리가 깨어나자마자 은현의 품을 느끼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으, 으윽….”
그녀와 동시에, 공석수의 품에 안겨져 있던 페데리카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척였다.
“보스?”
자신이 몸을 작게 흔들어 깨우며,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흡!?”
이윽고 페데리카가 점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남성의 몸에 안겨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두 눈을 부릅뜬 그녀가 공석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
“보스?”
정신이 깨어나고, 몽롱했던 정신이 맑아질수록 페데리카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가가 덜덜 떨린다.
“…보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페데리카의 상태를 걱정하며 그녀를 다시 한번 불렀지만.
“…지마.”
“예?”
“만지지 마아아!”
페데리카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공석수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보, 보스! 왜 그러십니까!”
무작정 자신의 얼굴을 보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부림을 치는 페데리카를 보고,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강하게 그녀를 안았지만.
그럴수록 페데리카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보스! 접니다! 석수입니다!”
“뜨거워…. 뜨거워! 내 몸에 손대지 마!”
“페데리카 아가씨!”
이윽고 공석수가 다급히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자, 페데리카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아….”
거센 저항의 몸부림이 점점 약해지고, 작은 떨림과 동시에 탄식하는 페데리카의 흐린 동공이 뒤늦게 색을 찾아갔다.
트라우마에 시달려 정신을 차린 페데리카는 그제야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공석수의 얼굴을 확인했다.
“석…수야?”
“네. 아가씨. 접니다. 석수입니다.”
“흐…으윽….”
공석수의 얼굴을 확인한 페데리카가 이윽고 어깨를 흐느끼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디 갔었어….”
“아가씨…?”
정신을 차린 페데리카의 얼굴은 습격을 받기 전과 완전히 딴판의 모습이었다.
마치 어렸을 적, 자신이 처음 페데리카의 호위를 맡게 되었을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연약하고 가녀린 소녀 때의 모습.
20대 후반의 끝에 접어든 그녀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시절을 상기시킨다.
“내가…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릴리와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지더니, 눈을 뜬 그녀의 모습은 공석수에게 매우 낯선 상황이었다.
일단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순순히 사과했다.
“나 두고…어디 가지 마….”
“예. 알겠습니다.”
간절한 염원이 담겨 투정이 어린 페데리카의 부탁에 공석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페데리카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스르륵 또다시 두 눈이 감겼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또다시 잠에 빠지는 페데리카의 모습을 보고, 공석수는 의문을 느꼈다.
그 의문을 해소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녀를 이상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은현과 릴리를 응시했다.
“…….”
페데리카와 함께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고, 은현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릴리는 공석수의 의문이 담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냥 쇠약해져 있을 뿐이야.”
“…뭘 한 거지?”
“꿈을 보여줬을 뿐이야.”
“꿈이라고?”
공석수는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릴리에게 되물었다.
마법 같은 분야에 정통하지는 않았던 것도 있지만, 그런데도 릴리의 설명은 너무 두루뭉술했다.
“제 어머니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그대로 경험하도록 재현시켰어.”
그게 릴리가 생각한 그녀의 악연들과 결착을 짓는 방식.
“…….”
그 결과 페데리카의 정신은 퇴행할 정도로 무너졌고,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키며 몸부림을 쳤던 이유는 꿈속에서 그녀가 수십 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끔찍한 경험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페데리카가 겪은 꿈속에 등장한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부하들이었으며.
그 부하들의 모습은 그동안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있던 부하들의 행동과 성격을 그대로 똑같이 옮겨 왔다.
릴리는 그렇게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부하들이, 자신의 마피아 보스에게 정욕을 품고 달려들도록 상황을 조작했을 뿐이다.
그 결과 정신이 무너진 페데리카의 모습은 참담했다.
“이건….”
그녀를 안고 있는 양팔 중, 하체를 받치고 있는 공석수의 왼팔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전신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의 하체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실금을 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공석수는 얼굴을 굳혔다.
“설마 아가씨가 이렇게 무너진 이유가….”
“당신이 짐작한 대로겠지.”
그녀가 무엇을 당했을지, 짐작한 공석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릴리의 행동에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담담하네.”
그런 그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은현이다.
“…아가씨의 업보가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공석수는 언젠가 이러한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마피아 보스의 딸로 태어난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사고방식은 ‘약육강식’ 그 자체.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가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세상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와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왔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이윤을 창출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조직을 키워나가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사고방식.
그것이 옳은 방식이든, 잘못된 방식이든, 그녀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이면서도 비인간적인 결단을 서슴없이 내려왔다.
그 업보를 돌려받고 있는 것이라고, 공석수는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 어째서 저 여자를 멈추지 않았어?”
“나도 그 악의 축의 한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지키는 것. 그게 선대께서 나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나에게는 아가씨가 어떤 결정으로 어떤 해악을 끼치던 중요하지 않았어.”
그녀가 많은 사람을 도구와 수단으로 쥐어 짜내어 이윤을 착취하든, 몇 명의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던 공석수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0대의 시절에 마피아에 들어와, 보스의 눈에 띄어 그의 딸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았다.
당시 페데리카의 나이가 6살.
이후 약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생을 함께했으며, 브로디아 마피아의 선대 보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페데리카를 지키라는 유언.
그는 선대 보스가 죽고 나서도, 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지금까지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충직한 부하이자 오빠, 가족.
누구에게는 악마의 수하 그 자체인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뒤틀린 인간성의 결정체.
공석수는 자신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페데리카의 몸을 조심스레 바닥에 눕히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릴리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만해.”
“아가씨가…너와 너의 어머니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기억 속에 새겼어.”
“그만해.”
진심이 담긴 공석수의 사과를 정면으로 맞닥뜨린 릴리의 양 주먹이 꽉 쥐어졌다.
사과를 멈추라는 릴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폭발하려는 분노를 꾹 참은 목소리에도, 공석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죽음으로 사죄를 할 테니, 제발 아가씨만은….”
“그만해!”
마침내 참지 못한 릴리의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사과한다고? 사과하면 끝나?”
“…….”
“우리 집이 붕괴하고, 내가 경험했던 끔찍했던 기억들은? 어머니가 경험했던 끔찍했던 기억들은 사라져? 없었던 게 돼? 그 기억들을 모두 잊고 예전처럼 웃으며 살 수가 있어?”
무너져내린 릴리의 감정이, 말이 무릎을 꿇은 공석수의 귀에 사정없이 박혔다.
반박할 수 없는 그 감정의 격류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공석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없잖아….”
주먹을 꽉 쥔 릴리의 목소리가 아래로 흘러 내려옴과 동시에, 그녀의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는 어느새 슬픔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진 순간부터, 나와 어머니를 버린 순간부터, 나의 지옥이 시작된 거야.”
그 지옥은 릴리의 머릿속에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당신이나 저 여자를 죽일 생각은 없어. 저 여자는 죽어서는 안 돼.”
페데리카를 죽이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자비로운 처사다.
릴리는 페데리카의 머릿속에 ‘놋쇠 황소’의 화형과 많은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윤간을 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기억으로 각인시켰다.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도록 주기적으로 그 기억을 플래시백시켜 그때의 체험을 생생하게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그때 감각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현실 같아서, 살면서 그녀의 인생을 두고두고 끔찍하게 괴롭힐 것이다.
자신처럼 끔찍한 경험과 기억을 머릿속에 안고 가면서, 살아가도록.
페데리카의 남아있는 여생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꿈에서 느꼈던 그 감각은 주기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플래시백 될 예정.
몸은 멀쩡하더라도, 그녀의 정신은 많은 부하에게 강간을 당한 기억과 전신을 불태워지는 감각을 계속해서 맛보게 될 예정이다.
고칠 수도 없는, 릴리가 페데리카의 머릿속에 건 저주는 그렇게 남은 여생을 평생 괴롭게 만들 것이다.
자신과 어머니가 그 고통과 기억들을 모조리 안고 살아가야 했던 것처럼.
“살아. 그게 내가 저 여자에게 내리는 형벌이야.”
“…알았다.”
공석수는 다른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가 결착을 지었을 때.
위층의 방에서 에린과 에밀리아가 나와 중앙 계단을 타고 은현과 릴리가 있는 홀로 내려왔다.
은현은 에린에게 물었다.
“끝났어?”
“응. 다 끝났어. 그…. 언니는?”
굳어 있는 릴리의 표정을 본 에린이 살짝 눈치를 보며 은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도 끝났어.”
“그렇구나.”
“…주인님. 이제, 그만 가요.”
모든 볼 일을 마친 릴리는 공석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래.”
저택을 나와, 블랙마켓에서 구매했던 노예들을 맡겨둔 여관으로 향하던 도중, 은현은 입을 열었다.
“에린.”
“응.”
“여관에 있는 노예들을 데리고 ‘게이트’를 이용해서, 에밀리아와 함께 먼저 아르미타스령으로 돌아가. 그리고 노예들의 사정을 엘레노아와 상담해. 페데리카가 모아둔 비자금을 사용하면 숙식 문제는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엘레노아라면 알렉스와 상담을 통해서 구매한 노예들을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대규모의 농장지대를 경영하고 있는 아르미타스령에게는 농업 쪽의 일손은 많을수록 좋았다.
“현이랑 언니는?”
“릴리와 갈 곳이 있어.”
고개를 떨구고 뒤따라 걸어오는 릴리를 흘끗 바라본 은현의 대꾸에, 에린은 그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자. 에밀리아.”
“명령을 수락합니다.”
에린과 에밀리아가 여관으로 향하면서 이탈했다.
둘만이 남게 된 은현이 릴리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릴리.”
“…주인님.”
“기분이 별론가 보네.”
“…최악이에요.”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원흉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 정신을 무너뜨렸다.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던 순간이 다가와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후련함은커녕, 짜증과 분노, 슬픔 등을 동반하면서도 허무함이 가득한 모순을 경험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런 말도 있었어. 복수는 공허하다. 누군가에게 당한 만큼 갚아줬다고 해서 그 분노가 모두 해소되는 거는 아니라고, 복수만큼 비생산적인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다양한 말들이 나돌았지.”
“…….”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은 은현의 말에, 릴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말들에 동의하지 않아.”
“…네?”
“세상에는 말이야. 의미 없는 행동 같은 건 없어. 네가 그것을 하고 싶다고 느낀다면, 그 행동은 너에게 있어서 해야만 하는 일이야. 아무리 허무하고 비생산적인 일이라도,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아.”
“…….”
그것은 지금까지 릴리가 페데리카에게 했던 짓이나, 자신의 어머니를 범했던 건달 우두머리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등의 잔인한 복수를 긍정하는 말이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한 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행동이 복수라면, 절대로 의미가 없지 않아.”
하늘을 올려 다 본 은현의 자조 어린 말은 굉장히 슬퍼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복수를 긍정함과 동시에,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듯 이해를 해주는 공감의 말이었다.
“주인님도…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요?”
“…있었지. 아무런 재능도 없었던 나에게 싸움을 가르쳐준 스승이자, 친한 형이 한 명 있었거든.”
은현은 오랜만에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주현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인님의 복수는…끝났나요?”
“잘 모르겠어.”
시에테에게 검을 배우고, 또다시 홀로 남겨지면서도 자기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 수련하여 성장했다.
마침내 주현성을 죽였던 중하위계의 악마무리들은 모조리 없애버렸다.
실비아를 죽게 만든 다크엘프들을 모조리 척살하였던 것처럼.
은현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한 결착을 이뤄내었다.
그런데도 끝났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아직 가슴 속에 남아있는 스승님의 원수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에테를 죽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강한 악마는 지구가 멸망하면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
“네?”
“이번 여행의 처음 목적, 기억나지?”
“네. 아….”
이번 여행의 처음 목적.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행방을 찾는 것.
“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은현의 그 말에 릴리는 작게 몸을 떨었다.
“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