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 330. 드러난 사육장(4)
* * *
“마수! 마수가 풀려났다!”
“살려줘어어!”
“비켜어! 내가 먼저 올라갈 거야!”
감옥 콜로세움에서 풀려나 자유를 만끽하게 된 마수들이 일제히 포효를 내지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우오오오!
가슴 속에서 토해 내어지는 우렁찬 미노타우로스의 포효가 블랙마켓의 내부를 가득 채운다.
포효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찌르르한 전격을 맞은 것 마냥, 전신의 소름이 쫙 돋으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조용히 해!]
여자의 외침에 혼비백산한 움직임을 보였던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귓가를 파고 들어온 아름다운 미성이었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와 강제로 가슴의 진정을 끌어낸다.
마치 누군가가 ‘말’로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대열을 맞춰 올라가. 올라갈 수 없다고 판단되면, 다른 입구를 찾아.]
‘광역 정신지배’를 통해서 혼비백산한 사람들의 감정을 조작한 릴리는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여 혼란을 잠재웠다.
차례와 순서를 지켜 조바심을 내지 않고 모두가 올라갈 수 있도록 교통과 상황을 정리해나갔다.
“으, 으아아!”
“저 사람은….”
멀찍이서 마수들에게 쫓기면서 피난의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릴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젯밤 자신과 은현을 블랙마켓의 VIP석으로 안내했던 점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기억도 모조리 지워버리자.’
그렇게 결심을 마치고, 릴리는 자신의 정신지배 영역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그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기억들. 모조리 잊어.]
혹시라도 이번 사건의 주모자인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질 것은 우려하고.
혼비백산한 블랙마켓의 조직원들과 고객들의 이틀 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굳이 이틀 치의 기억을 지워버린 이유는 자신과 은현이 그저께 블랙마켓에서 벌였던 상스러운 플레이들까지 그들의 기억 속에 남겨둘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릴리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버림과 동시에,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도록 사람들의 정신지배를 이어나갔다.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간단한 명령이라지만, 몇백이 되는 인원들의 정신을 동시에 지배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천천히….’
어차피 뒤쪽에서 에린과 백귀들, 에밀리아와 인형 부대, 또한 범블비를 이용한 강력한 전력이 마수들의 전진을 무리 없이 막아주는 상황이니, 릴리의 입장에서도 급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블랙마켓으로 이어진 비밀 입구들은 카지노 호텔 쪽의 입구, 한 곳만이 아니다.
매일 수천 명이 드나드는 블랙마켓을 단 하나의 공간만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어서는 비밀 입구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릴리가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한 명령을 이행하여, 각자가 들어왔던 통로를 찾아갔다.
“좋아.”
혼돈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의 정리를 마치자, 릴리는 작게 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뒤를 돌아보며 한창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던 에린과 에밀리아의 모습을 응시했다.
싸움을 할 수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가 최선이다.
통신용으로 건네주었던 귀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아티팩트를 활성화했다.
“주인님. 들리시…?”
[끄아아악!]
아티팩트를 활성화하자마자, 느닷없이 들려오는 한 남자의 비명에 릴리는 몸을 움찔했지만.
[들려. 말해.]
이내 은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은 지금 마수들을 모두 풀어줬어요. 블랙마켓의 인원들이 모두 지상으로 대피할 때까지 마수들의 전진을 막고 있는 상황이에요.”
[알았어. 페데리카가 옵티머스의 등장으로 카지노 호텔이 붕괴하는 걸 보자마자, 그쪽으로 향했어. 이쪽도 금방 정리하고 갈게.]
“네. 조심하세요….”
[너야말로. 다치면 안 돼.]
“…네.”
작은 배려가 담긴 따뜻한 은현의 말에, 릴리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 ◆
“크아악!”
또 한 명의 건달의 팔뚝에 단검을 내리찍어버리고, 은현은 귀걸이의 통신용 아티팩트를 통해 통신을 이어나갔다.
“알았어. 페데리카가 옵티머스의 등장으로 건물이 붕괴하는 걸 보자마자, 그쪽으로 향해갔어. 이쪽도 금방 정리하고 갈게.”
[네. 조심하세요….]
릴리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은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미 대부분, 건달들의 정리가 끝난 상태.
더 위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자신 쪽이 아니라, 릴리와 에린, 에밀리아 쪽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릴리의 걱정은 순수하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그녀의 말에 답해주었다.
“너야말로. 다치면 안 돼.”
[…네.]
살짝 기쁨이 담겨 있는 어조를 들어보니, 그녀 쪽도 그렇게 마냥 힘겨운 상황은 아닌 모양.
마지막 남은 건달의 어깨에 칼날을 박아넣고, 그의 복부를 걷어차며 마무리를 장식했다.
“크헉!”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치는 건달의 어깨에 박혀 있던 단검, ‘리딜’은 어느샌가 다시 은현의 손에 복귀한 상태.
권능을 해제하여 단검의 모습이 아닌 초기의 백은빛의 열쇠로 되돌아간 자신의 ‘신의 무구’를 응시하며 은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그럭저럭 이요.’
[신의 권능을 사용한 감상치고는 매우 담백하구나.]
‘만들어진 권능 자체는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단지 소모되는 신력의 양이나, 지속시간은 좀 아쉬울 뿐이에요. 이 부분은…아직 제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은현은 이번 열쇠의 사용으로 자신의 반신(半?)으로서의 역량을 정확히 가늠했다.
‘역사를 가져오는 열쇠’는 여신들이 내려준 은혜인 권능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은현만의 권능.
그것을 발동시키는데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신력의 소모와 짧은 지속시간은 신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격이 사용한 권능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의 장점이지만…. 나는 아이가 너무 가파른 성장에 목을 매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조바심….’
은현은 베르단디가 지적한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히 자각하며, 그 단어를 조용히 곱씹었다.
확실히, 자신은 조바심을 내고 있다.
현재 자신의 성장은 틀림없이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가파르다.
하지만 그것은 비교하는 다른 이들이 ‘인간’의 틀에 속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빠름과 가파름.
반신으로서 현재 자신은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반신이 되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매우 드문 경우.
비교할 수 있는 존재도 없기에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아이는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으니.]
베르단디는 생각에 잠긴 은현의 상체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계속 보고 있었지 않느냐. 아이의 노력을.]
‘…감사해요.’
머릿속으로 떠오른 고민이 베르단디의 위로에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분명 아이의 영혼의 격도 착실하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 쉽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정 못 미더우면, 다시 한번 나의 모유를 마셔보는 것은 어떠냐?]
‘…….’
느닷없는 베르단디의 권유에 은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허공의 등 뒤에서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꽉 끌어안고 있는 베르단디의 표정이, 은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의도로 이야기를 해온 것인지, 은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베르단디는 지금 자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다.
날이 갈수록 가까워지는 관계 속에서, 거리낌 없이 능청스럽게 장난까지도 칠 수 있게 된 베르단디를 보며 은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굳이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 권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아이도 점점 날이 갈수록, 나에 대한 사양이 없어지고, 능청스러워지는 것이, 뭔가 재미가 없구나.]
당당하게 응석을 부려오겠다는 사도의 모습을 보며 여신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 ◆ ◆
“에린! 이제 됐어! 우리도 도망치자!”
블랙마켓의 고객들이 모조리 지상으로 피난을 완료하자, 릴리는 뒤에서 마수들을 막고 있던 에린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응! 알았어! 에밀리아! 철수!”
“명령을 수락합니다.”
“백귀님들! 고생하셨어요! 진짜 감사해요! 나중에 또 봬요!”
마수들의 진격을 막아내던 도중,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에린의 감사 인사에, 백귀들이 멈칫하며 에린을 바라보았다.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투구들로 가려져 백귀들의 표정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우뚝 서서 에린의 모습을 보고 있는 백귀들의 반응은 기묘했다.
마치 이전의 주인과 달리, 신수의 힘을 이어받아 새로운 주인이 된 소녀는 굉장히 밝고 활기가 가득하다.
역소환이 되면서 백귀들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동안, 에린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그 사람과 한 번 싸우게 해주세요.]
“어, 갤러해드…님?”
가끔 에린의 의식에 말을 걸어와, 초창기 때 세검술의 기초를 알려주었던 두 번째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백귀다.
[왜 뒤늦게 존대를 하는 건가요?]
“아, 그게…예전에 미호가 저한테 한소리를 한 적이 있어서….”
어째서 자신에게는 반말을 섞어가며 친구처럼 불러대면서.
자신의 부하들이나 다름없는 백귀들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에린의 태도에, 구미호가 불만을 품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전 주인님도 참…체통을 지키셔야지….]
에린의 차별 같은 대우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이제 막 20살이 되어가는 어린아이를 두고,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을 보이는 구미호의 태도도 갤러해드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두 분이 매우 친해지셨군요.]
“…저랑 미호가요? 으음, 잘 모르겠는데….”
자주 투덕거리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뿐이지, 그것을 친하다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을까?
하지만 에린도 그런 구미호가 싫은 것은 딱히 아니다.
“그것보다, 갤러해드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람이라는 게….”
[한 사람, 떠오르지 않나요? 저희의 새로운 주인이신 당신을 지금까지 성장시켜 주신 그 사람을 말하는 거죠.]
“현이요?”
에린은 단번에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를 깨닫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에도 한 번 부탁을 드렸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새로운 주인께선 잊어버리신 것 같아서요.]
“아….”
글쎄요. 하지만 저는 해보고 싶은걸요. 한 번 권유만이라도 해줄 수 있을까요?
뒤늦게 과거에 갤러해드가 했었던 부탁을 떠올리고 작게 탄식한다.
한창 아르키스 미궁을 답파 및 훈련을 하였을 당시.
던전 주택 내부에서 은현이 일리아나와 침대 위에서 나뒹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었다.
결국, 그때의 강렬한 방안의 광경에 본래 목적은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방치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 진짜 죄송해요. 깜빡 잊고 있었어요!”
[뭐…그때의 광경이 좀 자극적이었으니, 이해는 하지만…이번에는 잊지 말아 주세요.]
“…네.”
백귀들의 혼의 회수를 마치고, 재차 갤러해드의 부탁도 머릿속에 담아둔 에린은 에밀리아와 함께 후퇴했다.
내려온 입구와는 다른, 다른 출구를 찾아냈고, 그 통로를 통해서 셋은 지상으로 대피했다.
“나왔다!”
“후우….”
마침내 지상으로 탈출한 셋 중, 에린과 릴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슬슬 지하에서 걸었던 릴리의 세뇌가 풀리고, 지하 블랙마켓에 있던 사람들이 슬슬 정신을 차릴 시간이다.
“내, 내가 어째서 이곳에…?”
“나는 지하에 있었는데…?”
본인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에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우오오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붕괴한 카지노 호텔 건물이 있는 장소에서 우렁찬 마수의 포효소리에 에린과 릴리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은현의 계획대로, 블랙마켓의 감옥 콜로세움에 갇혀 있던 마수들을 풀어주고, 사람들의 피해 없이 지상으로 올라와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작전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릴리는 곧장 귀걸이의 아티팩트를 통해서 은현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주인님. 마수들이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알았어.]
“이제 저희는 뭘 하면….”
우우웅
다음의 행동 방침을 물으려던 순간, 허공에서 요동치는 기운을 감지하고, 놀란 릴리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역사를 재현하는 백은의 열쇠]
[소환, 궁니르]
어두운 밤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한 줄기의 별빛이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와아….”
“아….”
그 별빛의 중심에서, 익숙한 기운과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에린과 릴리가 놀람과 감탄, 존경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밤하늘을 응시했다.
이윽고 별은 아래로 떨어졌고.
[브류나크 창술]
[천벌]
콰아아앙!
지상으로 올라와, 붕괴한 카지노 호텔 부근에서 포효를 내지르던 미노타우로스를 꿰뚫고, 그 여파가 대지를 진동시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