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화 〉 310. 몽마의 마성(??)(1)
* * *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 객실로 복귀한 은현은 곧장 에린과 릴리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정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해서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갈 거야.”
“사비로스 공작령? 그곳이 어딘데?”
자국인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의 지명도 이제야 익혀가기 시작했던 에린에게는, 타국의 지명은 알쏭달쏭한 장소였다.
단지 ‘공작령’이라는 단어 때문에 아르미타스령과 마찬가지로 수도만큼이나 활기를 띠고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렌디르 왕국 안에서 수도 다음으로, 아니, 수도만큼이나 활기가 있는 곳이지.”
“그…아르미타스령하고 비슷한 거야?”
“활기 자체는 사비로스령이 더 번성하고 있지만, 아르미타스령하고 비교를 하자면…사비로스령은 아르미타스령에 비해 질이 더 나빠.”
“질이 나빠? 왜?”
“그 영지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있는 이유가 아르미타스령과는 좀 많이 틀리거든. 아르미타스령의 경우에는 대규모의 농장지대를 시작으로 영민들의 농사가 주된 사업이야. 많은 양의 곡식을 대량생산을 해내서 공작 가문에도 화폐 대신, 곡물로 세금을 징수하고 있기도 하고, 타 영지나 페르닌으로 곡물을 수출할 정도로 대규모의 사업이지.”
“응. 나도 그래서 막 신인 모험가가 됐을 때, 가끔 밭을 망치는 마수들의 처리나 경비의 의뢰로 몇 번 본 적이 있었어. 헤헤, 아줌마가 구워준 감자 맛있었는데.”
정해진 계약기간 동안, 의뢰를 수행하면서 마수가 등장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을 때, 힘이 남아돌았던 에린은 농부들과 함께 농사를 도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기 아들, 딸과 비슷한 나잇대의 소녀라며 함박웃음을 지어주면서 새참으로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주었던 농부들의 호의는 정말로 따뜻했었다.
모험가를 그만두고 자기 아들에게 시집이 올 생각이 없냐는 권유를 받기까지 해서, 거절하는데, 난감했던 해프닝도 있었다.
“맞아. 그래서 혹시라도 주된 수입원이었던 농사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숙련된 모험가가 신입 모험가들을 데리고 교육을 할 겸 농장지대의 순찰을 꾸준히 돌고 있는 것도 그 이유야.”
“그런데 아르미타스령은 왜 이야기하는 거야? 사비로스령은 뭔가 다른 게 있는 거야?”
“아르미타스령이 대규모의 농장지대를 이용해서 농업을 중심으로 영지를 운영하고 있지만, 사비로스령의 경우에는 농업이 아니라, 관광업과 도박업을 중심으로 영지를 경영하고 있어.”
“관광과 도박…아….”
에린은 은현의 말을 듣고 곱씹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릴리의 표정 또한 좋지 못했다.
“주인님 혹시….”
“릴리의 생각이 맞아.”
혹시나 한 마음으로 물어보려던 릴리의 추측을 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5년 전, 릴리의 아버지를 비롯해 주기적으로 이 영지의 다수의 어른을 태우고 향했다는 도박장이 바로 사비로스령이었던 거지.”
이 영지에서 사비로스령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다.
아침에 일찍 출발해서, 쉬지 않고 달린다면, 저녁쯤에 도착할 거리.
같은 렌디르의 국민만으로 벌이는 사업이 아니라, 타국의 재산이 많은 고위 귀족, 또는 대규모의 상회를 운영하는 대부호 등.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국민이든 타국민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조리 고객으로서 응대하는 사업방침은 왕국의 변경 쪽에 있는 지리적인 이점도 훌륭하게 챙기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곳의 젊은 영지민들은 계속해서 사비로스령으로 이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
이 영지에서 5년 전에 있었던 사건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
두 사건의 공통점이 한 장소로 이어지고 있었다.
“릴리.”
“…네.”
“나는 지금 이 영지의 주인인 영주의 기억 속을 읽은 정보를 말해주고 있는 거야. 5년 전, 너와 네 어머니를 노예로 만들어, 끌고 갔던 사람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과 연결되어 있어. 어쩌면….”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가보면, 릴리의 어머니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현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이러했다.
“이 영지의 영주는 그때 수작질을 걸어왔던 그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눈을 감았어. 그 결과 너와 네 어머니는 그 끔찍한 경험의 시작이었지. 하지만 그 영주를 죽이지 않고 그대로 왔어. 가장 먼저 네 의사를 묻고 싶었으니까. 나는 네가 원한다면…. 네가 바라는 걸 해줄 생각이야. 그게 어떤 것이든.”
은현은 그 여자 영주의 어깨를 으스러뜨리면서, 당장 목뼈를 부러뜨려 목숨을 빼앗지 않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먼저 릴리의 의사를 확인한 후에 결정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은현의 다짐을 들은 릴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원한다면 죽여주겠다는 잔인하면서도 상냥한 배려였지만, 돌연 릴리는 무서워졌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달라는 부탁.
그 잔인한 부탁을 하는 것에 대한 결심이 아직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릴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생각했다.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흉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사비로스 공작령에 있다.
“제가 부탁하지 않는다면…이곳의 영주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일단 내 화풀이로 어깨를 부숴 놓고 오긴 했지만…. 나에 대한 입막음과 이 이상 영민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통제하라고 조건으로 공포를 심어두고 왔지. 이 이상 개판이 되는 건 좀 그러니까. 이 영지에는 릴리가 아는 사람들도 많은 거지? 식당에서 마주쳤던 것처럼.”
“…감사해요.”
릴리는 은현의 배려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복수를 해야만 한다면….”
이윽고 주먹을 꽉 쥐고 결심이 선 표정으로 은현을 바라보았다.
“저와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원흉인 사람을 처리하고 싶어요. 그것도….”
릴리의 가슴속에 타오르기 시작한 증오심은 오직 한 대상만을 생각했다.
“제 손으로 하게 해주세요.”
은현에게 모든 것을 부탁하는 것은 응석이다.
주인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마지막에 손을 더럽히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고, 릴리는 굳게 다짐했다.
“알았어.”
사역마의 결의를 들은 주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나도 도와줄게! 언니를 힘들게 한 나쁜 놈들 모두 혼내주자!”
“…응. 고마워. 에린.”
살벌하면서도 강한 결의가 무색하게, 밝은 얼굴로 조력의 의사를 밝히는 에린을 보고, 잔뜩 무거워졌던 릴리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 ◆ ◆
“아…젠장….”
“형님.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도 남정네들뿐이다. 싶어서 말이지. 솔직히 여자가 하나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요즘엔 숫자가 예전 같지 않네.”
한숨을 내쉬며 푸념을 늘어놓는 우두머리 건달의 인상이 잔뜩 찡그려져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수면제가 든 물을 마시고, 마차 안에서 모조리 잠들어있는 사람들을 응시한 우두머리 건달은 이번에도 젊은 여자를 상대로 재미를 보지 못해 욕구가 쌓여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부하로서는 그런 푸념조차도 사치나 마찬가지.
“그래도 할당량이 채운 게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채우지 못한 채로 돌아갔다가는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아, X발 진짜. 인생 X같네. 아주.”
부하의 지적을 들은 우두머리 건달의 인상이 더욱 찡그려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할당량을 모조리 채우고 갈 수 있으므로, 부하의 말은 괜한 걱정이었다.
“그런데…항상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보스께서는 도대체 어디에 쓰시는 겁니까?”
“난들 알겠냐. 보나 마나 뭐 적당히 빚을 지게 하고, 노예로 팔아먹으면서 돈을 쥐어 짜내겠지. 아니면 또 획기적인 사업방식을 생각해냈다던가.”
확실히 근 3개월에 한 번씩, 이렇게 대규모의 사람들에게 사비로스령으로 가면 큰 성공과 함께 돈을 벌 수 있다고 적당히 구슬리고, 한데 모아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우두머리인 보스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은, 그들로서는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 이익을 만들어 내는지, 그 원인과 과정들은 말단인 자신들에겐 공개되지 않은 정보였다.
그저 결과가 자신들에게 이익으로 이어진다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우린 그냥 위에서 던져주는 콩고물을 얻어먹고 살면 되는 거야. 가끔가다가 괜찮은 여자가 있으면 품으면 되는 거고. 흐흐.”
너무 많이 알려고 한다면 다친다.
우두머리 건달은 그런 부분에서 자신의 주제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조직의 밑에서 5년을 넘게 일해온 자신은 어느새인가 말단 깡패들을 부리는 말단 중간관리자가 되었다.
“엉…? 형님. 앞에 뭐가 있는데요?”
“뭐?”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고 있던 부하가 넓게 트인 길 위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우두머리 건달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전방을 주시했다.
“…뭐야. 저게? 어린애?”
검은색의 고풍스러운 레이스가 달린 고딕 드레스를 입은 사람의 모습.
마차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신장이나 외양적인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다.
“잠깐 멈춰 봐.”
우두머리 건달은 부하에게 마차의 운행을 잠시 멈추라고 명령했고, 어린 소녀의 앞에서 멈춰선 마차 위에서 내렸다.
“꼬마야. 혼자냐?”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범상치 않으며, 입고 있는 외출용 드레스 또한 굉장히 고급스럽다.
“…어째서 이런 길거리에 어린애가 혼자서?”
현재 정차한 이곳은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향하는 길의 한가운데지만, 어린 여자아이가 혼자서 이곳까지 오기엔 그렇게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심지어 소녀의 신발이나, 드레스는 먼지나 흙 하나 묻지 않고 매우 깨끗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부하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 어떠냐. 흐흐.”
딱 봐도 대부호나 고위 귀족의 딸 같은 차림새의 소녀를 보고, 우두머리 건달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에 실실 웃기 시작했다.
이 아이를 몸값으로 부모에게서 거액의 돈을 뜯어낼 상상을 하자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꼬마야. 마차에….”
“이 목소리….”
“응?”
풀숲을 해치고 등장하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마차에 타고 있던 다수 건달의 시선이 풀숲 쪽으로 향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총 세 명.
남자 하나와 여자 둘, 세 사람 모두 젊은 측에 속하는 구성 중에서,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여성에게서 증오스러운 감정이 담긴 시선을 받고 우두머리 건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기억하지 못해?”
“뭐?”
“5년 전…. 나와 어머니를 노예로 만들어서 데려갔잖아.”
꾹 참고 있는듯하면서도, 짜내듯 힘겹게 말하는 메이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뺨 위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이, 우두머리 건달의 과거에 기억 속에서 자신이 품었던 어떤 여자를 연상시켰다.
“설마…그때 그 애인가?”
“…….”
이빨을 꽉 깨물고 주먹을 떨고 있는 메이드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과거에 자신과 다수의 남자가 가지고 놀았던 한 아이 어머니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
점차 또렷해지는 기억 속의 소녀와 지금의 현재 여자의 모습에서 큰 격차를 느낀 건달들의 우두머리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쓰레기 남편의 딸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했다니!”
“…있어?”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메이드 여성은 과거 자신과 어머니를 강제로 데려갔었던 건달을 보고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로 두 눈을 부릅떴다.
격해진 감정과 함께, 릴리의 두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흘렀다.
“어머니! 어디에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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