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309화 (309/730)

〈 309화 〉 309. 붕괴한 가정(3)

* * *

“용서해라! 제발…제발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테니…!”

자신이 노예로 팔려가면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뻔뻔하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하고, 추했다.

이 울분을 해소하고 싶은 충동적인 욕구를 필사적으로 자제한 릴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옷 위로 떨어져 흡수되는 동안,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끈을 풀고, 돈주머니 안에 있던 내용물을 아버지의 앞에 동화가 들어있던 나무 상자 안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리, 릴리!? 이것은…!?”

달그락거리며 나무 상자를 가득 채우다 못해 쏟아져 내리는 금색의 동전들을 보고, 릴리의 아버지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제가 일을 시작하면서 모아둔 전 재산이에요.”

“어, 어째서….”

“이걸로 새로운 일을 하시든, 평생을 놀고먹으시든, 또 도박하시든,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릴리는 더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저는 앞으로…당신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동안…키워주셔서 감사했어요.”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제부터는 남남의 관계라고 선을 긋는 ‘결별’을 의미했다.

멍하니 자신의 앞에 쌓인 작은 규모의 금화 더미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뒤로하고, 릴리는 조용히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디 가느냐!”

뒤늦게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릴리는 철저히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던 도중, 갑작스레 뒤를 따라 걷고 있던 릴리가 발걸음을 멈추자 은현이 뒤를 돌아보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흐…윽….”

고개를 푹 숙이며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릴리. 괜찮아.”

“죄송…해요. 못난 꼴을 보여드려서….”

릴리는 그렇게 흐느끼는 자신을 끌어안아 등을 토닥여주면서 위로를 해주고 있는 은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나도 한심하고 추한, 자신의 집안 사정을 낱낱이 드러내게 되어, 차마 은현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지금 당장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무너져 내려가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은현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마, 맞아. 언니. 나도 언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슬픈 눈으로 릴리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포옹을 해오던 에린도 릴리의 마음을 위로하는데 합세했다.

“에린.”

“응?”

“릴리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 좀 쉬게 해줘.”

“어, 응. 알았어.”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릴리의 팔을 풀고, 작게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에린에게 맡긴 은현은 한쪽을 응시했다.

“근데…혼자서 뭘 하려고?”

“조금 알아볼 게 생겼거든.”

“…알았어. 조심해야 해?”

“그래.”

은현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한 에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 앞에서 두 여성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은현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아이는….]

‘네.’

둘만이 남게 되자, 베르단디는 은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담담하구나.]

‘글쎄요.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릴리와 아버지의 해후가 이루어진 것을 멀찍이서 지켜보았을 때.

무책임하면서도 비굴한 아버지의 사과와 부탁을 듣다못해, 몇 번이고 둘의 대화에 난입하려던 것을 뜯어말려야만 했던 에린과는 달리, 은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고요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그 기대에 배신을 당했을 때의 반동으로 전해져 오는 충격은 품고 있던 기대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전부터 릴리에게 그녀의 가정 사정에 대해서 듣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러한 상황은 진즉부터 예상했었다.

릴리의 무너져가는 마음과 슬픔에는 공감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없었다.

은현은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신수 아이처럼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래도 저 악마 아이는 이제, 아이의 여자가 아니 더냐.]

‘그런 짓을 해봤자 의미가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릴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스스로 아버지와 있었던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리를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은현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에요.’

은현은 지금 릴리를 위해서 별도의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지금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이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요.’

은현은 머릿속으로 이 영지에서 일어난, 2년간 영지의 젊은 사람들이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대거 이주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는 지금 이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5년 전의 악마 아이가 경험했던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연관이 없다면 그때 이 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지, 말지를 정하면 된다.

하지만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릴리의 어머니의 행방을 찾는 것과도 연결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악마 아이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구나.]

베르단디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그게 무엇이냐?]

‘예전에, 아르키스 미궁에서 왕녀님을 데리고 탈출했을 때, 왕녀님이 했던 말 기억하세요?’

[…….]

베르단디는 천천히 이전에 나누었던 은현과 유리아의 대화를 떠올렸다.

­‘운명의 메르헨’속의 유리아는 말이죠. 렌디르 왕국의 사비로스 공작가의 자제에게 시집을 가요.

­어마마마는 사비로스 공작의 진짜 모습을 모르세요. 겉보기에는 청렴하고 자신의 영지를 풍요롭게 만들고 나라 떠받치는 공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으니까요. 그의 진짜 모습은 젊은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에 돈과 지위로 여자를 사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어마마마께서는 몰라요.

‘그런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다수의 젊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으니까요.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요. 마치 누군가가 선동해서 사람들을 공작령으로 자진해서 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게다가 이런 소규모 영지에 수작질을 걸고 있다면, 다른 영지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또 에요.’

[…그렇구나.]

또다시 은현의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도록 유도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이전부터 느꼈던, 자신의 운명의 길 위에 누군가의 간섭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의구심.

은현은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 ◆

“후우….”

해가 지면서 저택의 내부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집무실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지방 소영지의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기고는 강제로 의자에 앉히는 강압적인 행동에 귀족 영주가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다.

“크윽!? 무슨…. 흡!?”

너무 놀란 끝에 비명을 지르려던 입속으로 단단하고 거대한 무언가를 억지로 쑤셔 넣으며 그의 목소리를 막았다.

“움직이지 마.”

“……!”

짙은 살기가 깔린, 스산한 남자의 목소리에 전신의 털이 곤두선듯한 소름을 느끼며 귀족 영주가 얼굴을 굳혔다.

“여자 영주라니. 보기 드무네. 하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

“끄…으으!”

의자의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꽉 붙잡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악력에 어깨의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뒤에서 자신을 찌르는듯한 잔혹한 살기에 눌려 귀족 영주의 가슴 속에는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점점 빠르게 뛰어갔고, 입이 틀어막힌 상황에서,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렇구나. 한 사람당 금화 50닢의 가격을 매겨서 뒤로 받는 대가로, 젊은 영민들이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눈감아 줬군. 심지어 여자는 인당 80닢까지.”

“읍!? 으읍!”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이 얼굴과 눈으로 금방 드러났지만, 자신의 몸을 의자 위에 고정한 채로 뒤에 서 있는 남자는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해는 해. 단지 성별의 차이로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도 업신여겨지고 무능하다고 멋대로 평가를 당하는 기분은 참을 수 없겠지.”

“…….”

마치 자신의 기억을 엿본 것이라도 된 것 마냥, 정확하게 과거에 자신이 느꼈던 심경을 서술해오는 남자의 말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어깨를 꽉 붙잡혀 으스러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고무 같은 동그란 공의 무언가는 여자 영주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전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여자라도, 지금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면 자신은 죽는다.’라는 것을 본능과 몸이 깨닫고 있었다.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젊은 영민들을 억지로 떠나라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미래는커녕 발전 가능성도 없는 이런 시골 깡촌 영지에서 제 발로 나가겠다는 거였으니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을 거야. 심지어 그렇게 눈을 감아준 영민들의 숫자만큼 돈도 주겠다는데, 단기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그냥 두 눈을 감아버렸겠지.”

“…….”

“아들이 하나 있구나.”

“읍!? 으으읍!”

아들의 존재를 언급하자, 여자 영주가 등골을 시리게 만들었던 공포에서 강하게 저항하며 호소했다.

딱 보아도, ‘제발 아들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뜻.

“걱정하지 마. 네 아들은 안 죽여. 게다가 너도 죽이지는 않을 거야. 너도 지금, 그들이 많은 사람을 한데 모아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는 것 같으니까.”

“흐, 흐으….”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로,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협력해오고 있던 네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아니, 오히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눈을 감고 모르는 척 방관하고 있는 태도가 더 질이 나빠. 그리고 5년 전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해서, 내 사람이 평생 아물지 않는 큰 상처를 입었어.”

우드득

“끄…흐으윽!”

어깨를 꽉 잡고 있던 남자의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자, 여자 영주의 어깨뼈가 단번에 으스러졌다.

“사실 이것도 많이 봐준 거야. 너의 그 판단 하나에, 다수의 가정이 붕괴가 되어버렸으니까. 네가 제때 그들의 수작질을 차단하고 제대로 대응을 했다면, 내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어. 그렇게 하지 않은 너의 무능함에 대한 대가야.”

“끄…으으.”

“너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리지 않는 건, 이곳에서 너를 죽이면 이 영지에 있는 영민들은 더욱 큰 혼란을 맞이하기 때문이야. 너 하나를 죽인다고 이 엿 같은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너 때문에 그 고초를 겪었던 내 사람이 겨우 네 죽음 따위를 원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자신을 죽여봤자 얻을 수 있는 아무런 이익도 존재하지도 않고, 상황이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뜻.

하지만 끝의 말은 그때 그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의 죽음을 바란다면, 망설임 없이 다시 자신을 죽이러 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회를 줄게. 첫째, 나를 추적하지 않는다. 나는 말이야. 언제 어디서든 마음이 바뀌면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너의 저택에 들어와, 너를 죽일 수 있어.”

“흐…으윽!”

“둘째, 지금부터라도 당장 경비를 강화해. 이 이상 영민들이 외부로 빠져나가려는 건 막아야 하지 않을까? 아, 너와 뒷거래를 하는 그들의 보복을 신경 쓰고 있는 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강한 분노의 감정이, 자신의 한쪽 어깨를 으스러뜨린 남자의 손에서 여자 영주에게로 전해져 왔다.

“내가 처리할 거거든. 내 사람의 인생을 망친 그 개자식들을.”

으스러진 어깨를 꽉 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고, 남자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며 여자 영주와 거리를 벌렸다.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여자 영주의 입속에 틀어막혀져 있던 고무 같은 구체가 사라졌다.

“하아, 하아….”

“지금 당장 치료를 받으면 조만간 어깨는 다시 쓸 수 있어. 만약 내가 말한 두 가지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끄…흑!”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남자가 여자 영주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은백색의 머리카락 아래, 우스꽝스러운 광대 가면으로 얼굴을 감춘 남자가 재차 경고했다.

“다음에는 어깨가 아니라, 네 목을 으스러뜨릴 거야. 명심해.”

“알…겠…어요….”

목이 졸리면서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여자 영주는 힘겹게 말을 내뱉고 나서야 정신을 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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