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308. 붕괴한 가정(2)
* * *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은현은 영지의 상황를 비롯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던 중년 남성들의 테이블에 은화 세 닢을 올려두었다.
“자네…? 이 돈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보답입니다. 이번 밥은 제가 사도록 하죠. 그리고….”
담담하게 고개를 테이블 위의 식사를 진행중이던 릴리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그 속이 한창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아니게 모르게 에린이 계속해서 릴리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도 릴리의 속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릴리의 아버지의 행방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기 드문 청년이구만. 하인의 기분을 챙기다니. 정말 귀족이 맞수?”
“…….”
따로 대답하지 않고, 싱긋 웃어 보이는 은현의 표정을 본 중년 남성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겠수다.”
“네.”
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다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와 식사를 재개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값을 치르고 식당을 나온 은현은 에린과 릴리를 데리고 중년 남성이 이야기해줬던 곳을 향해 길을 걸었다.
“…….”
한산한 길을 걸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는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에린이 은현의 팔을 잡아당겨, 그의 귀가 자신 쪽에 오도록 했다.
이윽고 릴리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떡해. 현아? 나, 이 분위기 못 견디겠어.”
“참아야지.”
“수, 숨 막혀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언니 지금 잔뜩 화나 있다고!”
“그건 나도 아는데.”
무표정으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걷고 있는 릴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오오라는 절대 범상치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단 한숨도 흘리지 않고, 꾹 닫혀 있는 입이 에린의 숨을 더욱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신수 아이의 걱정도 이해는 간다. 나도 악마 아이의 마음이 어떨지, 조금은 걱정이 되는구나.]
은현의 뒤, 허공에서 흘끗 릴리의 모습을 바라본 베르단디의 우려도 정확했다.
자신과 어머니를 팔아넘긴 아버지의 행방을 들른 릴리의 기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착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저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 밖에 없어요.’
[으음….]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베르단디는 침음했다.
마찬가지로 에린에게도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던 에린도 결국엔 끌어당겼던 은현의 팔을 풀었다.
자신도 릴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딱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린.”
“어, 응!?”
갈수록 바닥을 뚫고 심해로 가라앉아가는 릴리의 마음을 걱정하며 눈치를 보던 에린은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만 같은 릴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딱히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그냥 조금만…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응….”
에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는 은현의 뒤를 따라, 에린과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여행을 떠나기 전 엘레노아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릴리. 네가 어떤 선택을 내려도, 그 사람이나, 일리아나님이나, 에린도, 우리는 네 선택을 지지할 수 있어.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아 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던 엘레노아의 품은 매우 따뜻했다.
부모님의 행방에 대해서,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너도 생각하고 있을 거야.
엘레노아가 암시하는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아버지는 몰라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팔려나간 어머니가, 자신처럼 좋은 형편으로 살고 있을 거라는 희망은 품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은현의 등장은 기적과도 같다.
그 기적이 어머니에게도 일어났을 거라는 꿈에 그린 상상은 릴리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을 암시하는 엘레노아의 말은 상냥하면서도 잔혹하다.
그러니까 절대로 마음이 무너지면 안 돼. 그리고 네 과거에 대해서 꼭 제대로 된 결착을 짓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나와 일리아나님은 그거면 돼.
자신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현실적이면서도 최악의 상황을 미리 암시하는 잔혹한 말은 릴리에게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이번에도 그 사람이 널 이끌어줄 거야. 나를 구원해주셨던 것처럼. 그리고…에린과 함께 그 사람이 무리하지 않게 잘 돌봐줘.
자신을 염려하면서도, 자신보다 더한 엘레노아의 걱정은 다름 아닌 은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후우.”
엘레노아의 당부를 떠올린 릴리는 심호흡을 통해서 가슴 속에 요동치는 감정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이 여행의 목적은 잃어버린 자신의 어머니의 행방을 찾는 것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는 은현에 대한 보필이다.
엘레노아와 일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자신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몸속의 화를 가라앉혔다.
“…릴리.”
계속 길을 걸어가고 있던 은현이 발을 멈추로 릴리를 불렀다.
“네.”
“그 두 분이 말씀하신 장소는 아무래도 이곳 같은데….”
이윽고 손가락을 가리켜 한 골목에 주저앉아 있는 거지를 지목했다.
“저기.”
“아….”
은현의 손가락을 따라 그가 가리킨 방향을 응시한 릴리가 작게 탄식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골목으로 향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거지의 상태를 살폈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비쩍 마른 몸.
관리하지 못한지, 오래되어 덥수룩한 수염과 기다란 머리카락은 순간 거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의 앞에 선 메이드를 올려다 본 거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아가씨는…설마?”
“왜 이러고 살고 있어요?”
“…….”
담담한 표정과 달리, 릴리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갑고, 날이 서려 있었다.
“왜…이러고 살고…있냐고요.”
처음의 질문과 달리, 목소리에는 점차 떨림이 묻어나왔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겨우 가라앉힌 화가 다시 그녀의 목을 타고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의 반응에, 마침내 릴리가 소리쳤다.
“나와 어머니를 팔았으면 그만큼 잘살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들이 굉장히 많았다.
어째서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것인지, 그동안 자신이 어떠한 경험들을 해왔는지, 묻고 싶었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일까. 이 꼴은?
비쩍 마른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앞에 놓여 있는 나무 상자에 놓여 있는 몇 개의 동화들.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자신과 어머니를 팔아넘겼단 말인가.
5, 6년 만에 만나게 되는 아버지의 초라한 몰골을 보고 있자니, 릴리의 가슴 속의 무언가가 계속해서 치밀어 올랐다.
이 울분을 어떻게든 해소시키고 싶은데,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허무해서,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릴…리냐…?”
“…맞아요.”
“…….”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릴리의 행색을 훑어본 그녀의 아버지가 할 말을 잃어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뒤늦게 다시 입을 릴리의 아버지는 아직도 상황의 파악이 되지 않는 듯 했다.
이윽고 딸의 복장을 다시 확인했다.
릴리가 입고 있는 외출용 메이드복은 깔끔하면서도 간소했다.
그러면서도 고급스러운 기품을 나타내고 있는 딸의 모습에는 5년 전, 연약했던 소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아세요?”
“…모른다.”
“…….”
처음부터 아버지가 어머니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이 질문을 했던 것인지, 릴리 스스로도 자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예상했던 대답을 듣고, 릴리는 몸을 돌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은현과 에린에게 걸어갔다.
“자, 잠깐…!”
“…뭐죠?”
릴리는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나를 데려가려 찾아온 것이 아니냐?”
“…뭐라고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를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묻자, 릴리의 아버지가 몸을 움찔 떨었다.
“부, 부탁이다. 나를 데려가라.”
“…….”
“다시는, 다시는 도박 같은 것에 손대지 않을 테니, 제발…제발 나를 부양해다오.”
릴리의 행색을 보고,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먹여 살리라고 뻔뻔한 요구를 해오고 있다.
“그게….”
말을 섞기는커녕 다시는 쳐다도 보기 싫다는 것이 역력한, 쌀쌀맞고 냉랭한 시선은 이내 가슴 속에 억제하고 있던 감정의 불길로 인해 격해져만 갔다.
떨리는 눈동자와 동시에,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힘겹게 말을 내뱉는 목소리에도 그 떨림이 묻어나왔다.
“그게 지금 저한테 하는 말의 첫마디가 그거인가요?”
“리, 릴리….”
“가장 먼저 저한테 했어야 했던 말은 ‘미안하다.’였어야 했어요.”
“미, 미안하다! 그때는 내가 정말로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서…!”
황급히 사과를 하였음에도, 릴리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가슴 속에 장작을 넣어 더욱 큰 불길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정말로 저와 어머니를 포기했었군요.”
한때는 그런 상상도 했었던 적이 있었다.
도박에 빠지면서 전재산과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신을 되찾으러 와주진 않을까.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려는 모습은커녕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하루 동안 모은 동화 몇 닢만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는 비참한 인생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꼴이 이게 뭐예요?”
지금 이렇게 거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고 있는 아버지를 본 순간, 그 실낱같던 희망조차도 산산이 부서져 가고 있었다.
릴리는 화가 났다.
가장 힘든 경험을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일진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마냥 자신에게 빌붙으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도, 돈을 벌려고 노력도 했었다. 하지만…모두가 나를 무시했어.”
혼자가 된 릴리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일을 구해서 생활을 이어나가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일거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도박에 미쳐 살아서 자신의 아내와 딸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그의 인성은 주위의 인맥과 영지민들 사이에 소문으로 순식간에 퍼졌기 때문이다.
일거리는커녕 순식간에 길거리에 내앉을 정도로 생활은 순식간에 궁핍해졌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돕지 않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며 가정을 팔아넘긴 남자에 대한 실망과 경멸, 조롱의 시선들이 무수히 날아왔으며 그 결과는 현재로 이어졌다.
“나, 나는 너의 아버지다. 설마, 나를 버릴 생각이냐?”
“…….”
뻔뻔하게 말을 이어오는 아버지의 말에, 릴리가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저를 버렸잖아요. 저를 노예로 만들어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데려가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저와 어머니를 팔았잖아요.”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나는…왜 그러면 안 돼요?”
품는 것만으로도 패륜이나 마찬가지인 이 감정이 멈추지를 않는다.
지금까지 꾹 참아왔던 가슴의 일부가 무너져내리고, 끓어오르는 감정의 절제가 되지 않았다.
“저와 어머니를 포기하셨으면서! 왜 저한테는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건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