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 307. 붕괴한 가정(1)
* * *
은현에게서 여관주인의 짧은 이야기를 들은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젊은 사람들이 영지를 떠나고 있어?”
“응.”
짐을 풀고 밥을 먹을 식당을 찾기 위해 소규모의 광장을 걷고 있던 도중, 길거리의 활기가 없었던 이유는 해명이 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은현의 표정이 살짝 평소와는 달랐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은 항상 은현이 무언가에 신경이 쏠렸을 때, 짓는 표정이다.
“주인님께선…그게 신경이 쓰이시는 건가요?”
“응.”
“하지만, 시골 사람이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잖아. 모험가 길드에서만 봐도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지명도 들어본 에린의 입장에서는 은현이 무엇을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맞아. 어떻게 보면 특색도 없는 작은 규모의 시골 영지를 떠나서 일확천금 같은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해 영지를 떠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지. 그래도 그것도 한두 명이어야지. 게다가 시기도 이상해.”
젊은 영지민들이 눈에 띌 정도로 규모가 줄어든 건, 약 1년 전부터라고 했다.
적어도 그전까지 이 영지는 이렇지 않았다는 뜻.
“릴리, 네가 보기에, 약 5년 전의 영지의 상황을 생각해보았을 때, 1, 2년 만에 이렇게 분위기가 침체 될 정도로 경기 악화가 진행되었다는 게 자연스러워 보여?”
“그렇지는 않죠….”
영지 안에서 가장 활발한 유동인구를 보여야 할 광장에는 싸늘한 바람들 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닥에 나돌아다니는 쓰레기가 바람에 밀려 굴러다니는 광경 위, 이렇다 할 노점도 보이지 않았다.
음식이나 물건들을 사줘야 할 손님들 자체가 거리를 돌아다니지를 않으니, 노점들도 활동을 안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내부에 활기 자체가 없다.
“일단은 걸어 다니면서 천천히 돌아다녀 보자. 이 영지의 상황이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릴리의 부모님에 대한 행방이니까.”
“주인님….”
우선순위로 자신을 배려해주는 은현의 말에 릴리가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언니. 나 배고파. 빨리 식당 찾아다녀 보자!”
“응. 알았어.”
자신의 손을 붙잡아 당기면서 앞서나가는 에린의 모습을 보며, 릴리는 미소를 지었다.
기쁘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픈 경험들의 늪속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은현과 그의 사람들에 의해서, 릴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을 가슴 속에 가득 품으며, 은현과 에린과 함께 주변을 적당히 돌아다니다가, 한 식당을 골라 내부로 들어갔다.
밥을 먹고 있는 손님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한산한 내부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어서 오세요.”
적당히 네 사람이 앉을 자리를 골라잡아, 앉자마자 점원이 건내준 메뉴판을 보며 메뉴를 주문했다.
에밀리아는 인벤토리 내부에 수납해둔 아티팩트들의 조정을 하고 싶다면서 여관방에 남고 싶다고 하였기에, 밥을 먹으러 나온 것은 세 사람뿐이었다.
“에휴…그쪽도?”
“그렇다니깐?”
한숨을 푹 쉬며 기운이 빠지는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옆 테이블의 대화가 들려왔다.
“자네는 그나마 아들이 둘이라서 다행이지. 나는 하나뿐인 아들이 반년 전에 나가서 감감무소식이야. 차라리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 편지라도 한 통 써준다면 다행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원.”
“…아저씨?”
“엉?”
“응?”
귓속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릴리의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자신들에게 걸어온 말임을 깨달은 두 중년 남자가 옆을 돌아보며 은현의 테이블을 발견했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릴리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얼굴의 표정이나 생김새는 과거에 소녀였을 적의 인상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 인상을 떠올린 중년 남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설마…릴리냐?”
“…네.”
“이럴 수가….”
둘 중 한 중년이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작게 탄식했다.
다른 중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릴리의 행색과 주위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굉장히 깔끔한 복장의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릴리의 모습에서는 자연스레 격식과 기품이 흘러나왔다.
“그때…네 어머니와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냐?”
“어쩌다 보니 정말로 좋은 분은 만나게 돼서 구원받을 수 있었어요. 이분은….”
이윽고 릴리가 은현을 바라보며 그의 소개를 시작했다.
“지금 제가 모시고 계신 주인님이에요. 성함은….”
“알베르라고 합니다.”
“……?”
은현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던 순간, 먼저 선수를 치며 자신을 소개하는 은현의 행동에, 릴리가 살짝 당황했다.
“아.”
눈빛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은현의 의도를 깨닫고 릴리는 뒤늦게 탄식했다.
이곳이 고향인 릴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페르니아스 왕국도 아닌 타국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여 가명을 사용하겠다는 의도였다.
“이 아이는 에리에요.”
“아, 안녕하세요.”
느닷없는 은혀의 지목에 에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을 겉으로 최대한 숨기며 곧장 호응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귀족 같아 보이진 않는데?”
“아니지. 전속 하녀도 데리고 다니는 데. 그러면 귀족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귀한 집안의 청년이 왜 꼴을 그렇게 하고 댕기나?”
두 중년들이 은현을 훑어본 끝에 내린 감상은 그러했다.
평민이라기엔 험한 일을 한 번도 안 해본 귀티가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하고 있는 복장이 굉장히 검소한 편이었다.
고급스러운 옷감도 아닌,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 코트로 전신을 치장하고, 귀족스러운 장신구나 사치품은 일절 치장하지 않았다.
이 영지의 영주나, 정말 가끔가다가 이곳을 들르는 귀족들이 보여주는 행색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
평소였다면 은현의 행색을 보고 멋대로 평가를 하는 이들에게 에린이 화를 내야 할 대목이었으나, 이번엔 나서지 않았다.
은현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 남성들의 표정은 그를 무시하려던 것이 아니라, 알쏭달쏭하면서 은현에 대한 판단이 잘 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에린도 살짝 공감하는 바였다.
유령의 상태로 처음 만났을 때도, 에린에 대한 은현의 첫 인상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면, 대규모의 영지를 운영하고 있는 공작 가문보다도 많을 것이 틀림이 없는데, 어째서 사치하나 안 부리고 저런 행색을 고집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나 아내들에 대해 돈을 쓰는 것은 아끼지를 않는다.
‘나는 현이가 조금 더 멋있어지고, 많은 사람들한테 인정받았으면 좋겠는데….’
작게 한숨을 내쉰 에린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이 복장은 여행할 때 굉장히 편합니다.”
“…그게 단가?”
“네. 그런데요?”
간결하게 자신의 소개를 마쳐버리자, 두 중년 남성은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유일하게 아는 이나 다름이 없었던 릴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중년 남성은 릴리와 그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는지, 당시의 상황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정말 다행이구나.”
“그래. 다행이야. 정말 잘 컸구나.”
“감사해요.”
“혹시…이 영지에 정착하기 위해서 온 거냐?”
“아뇨. 그것은….”
영지의 젊은이들이 대거 밖으로 나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두 중년 남성의 묘한 기대감이 섞인 시선을 받은 릴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귀족을 모시고 있는 메이드가 이런 변방의 영지에 정착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기대와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아저씨들 아까 해주셨던 이야기. 자세히 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음?”
“그…젊은 사람들이 영지를 떠났다는 이야기요.”
“아, 아아. 그 이야기인가. 에휴.”
릴리와 일행이 옆 테이블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쯤부터, 영지의 젊은이들이 대거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갔어.”
“사비로스 공작령이요?”
“그래. 거기. 갑자기 대여섯 명이 영지를 떠났던 게 시작이었어.”
시간이 지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떠난 사람들의 숫자가 두 자릿수가 되고, 세자릿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두 가지 정도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 그려?”
릴리와 중년 남성들의 대화에 은현이 난입해오자, 중년 남성들의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리하자면, 1년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말로 구슬려서, 사비로스 공작령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가 맞습니까?”
“그렇지.”
“무슨 말로 구슬리던가요?”
“글쎄…. 나도 직접 들은 건 아니라…. 아들의 말로는, 큰돈을 벌어서 부유하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말릴 새도 없이 대뜸 반년 전에 집을 나갔지.”
“큰돈, 성공.”
사람을 유혹하기엔 아주 쉬운 것들이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은현이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어째서 이 영지의 영주는 젊은 영민들이 대거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건가요?”
영지의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모두, 이 자리에 있는 중년 남성들의 다음을 이어, 영지의 운영에 기여하게 될 다음의 세대들이다.
만약 농업을 비롯해, 영지의 경영에 다양한 기여를 하고 있는 현재의 어른들이 나이를 먹고 노쇠하게 된다면, 그 일을 이어받고 계속해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은 그 어른들의 자식들이라는 뜻.
매정한 말로 들리겠지만, 오랫동안 사용한 톱니바퀴가 마모되어 새로운 부품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규모만 다를 뿐, 영지의 경영은 영주의 판단과 선택 아래, 이러한 영민들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글쎄…. 윗분들이신 영주님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겄수.”
“우리야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쁜 사람들이라, 그런 복잡한 것은 모릅디다.”
“…….”
난색 한 표정을 짓는 중년 남성들의 얼굴을 본 은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이러한 문제가 생길 것을 예측도 하지 못했던 무능한 바보이거나.
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영지의 손해에 버금가는 무언가를 받았거나.
은현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릴리가 셋의 대화에 다시 끼어들었다.
“아저씨들.”
“응?”
“지금 저희 아버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죠?”
“아, 그게….”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표정을 짓던 중년 남성이 말을 얼버무리며 자신의 옆 사람을 흘끗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아, 왜 나를 보나? 딸이 자기 아버지 보러 가겠다는데. 게다가 릴리의 입장에서는 머리카락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왜 자기와 어머니를 버렸냐고 말할 권리도 있는 거 아닌가?”
“뭐어…그건 그렇지만….”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중년 남성은 결국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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