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306. 캐러밴 여행(3)
* * *
“…….”
저녁 식사를 먹고, 약간의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캐러밴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은 은현을 당혹감에 들게 만들었다.
자신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릴리의 몸을 인식하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인가.
2층의 간이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에린이 자신이 품으로 기어들어 와, 가슴팍을 꽉 끌어안고서 고운 숨결을 내쉬고 있는 소녀의 존재 때문이었다.
“으응…. 헤헤.”
잠을 뒤척이며 더욱 강하게 은현의 상체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키고는, 실실 웃으며 푹 잠에 빠져있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할 말을 잃었다.
‘…얘는 위기의식이란 게 없나?’
허벅지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돌핀 팬츠는 물론, 배꼽과 허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짧으면서도 헐렁한 끈나시 민소매 티는 맨살의 면적이 터무니 없이 많이 드러나는 건강미가 넘치는 모습이다.
게다가 자신의 상체에 엉겨붙어 잔뜩 밀착시킨 가슴의 감촉과 민소매 티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가슴의 굴곡은 은현의 마음속에 이상한 기분을 들도록 만들었다.
속옷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자신을 남자로 의식하고 있는지도 의문이 들 정도.
‘아니, 의식은…하고 있겠지.’
은현을 남자로 보고 있지 않다면, 아무도 없진 집의 방안에 틀어박혀서 혼자 은현을 떠올리며 자기위로를 했을 리가 없다.
깡말라 몸과 마음이 위태위태했던 2년 전과는 달리, 살집이 붙고 건강미가 넘치는 균형 잡힌 몸매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이것이 신수인 구미호로서의 능력의 일부가 무의식적이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요망해져선.’
성인이 된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
“…후우.”
스스로 그런 자각을 하고 있을 리가 없겠지만, 이런 무방비한 모습으로 접근을 해오는 것은 은현의 남자로서의 부분을 여러모로 시험에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해소하기엔 많이 애매한 상황.
결국 스스로의 인내로 이 부분을 참아내야만 했다.
문득 여행을 떠나기 전, 일리아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가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밖에 없었어. 이제는 몸도 마음도, 모두 너나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이제 와 거리를 멀리할 생각이야?
‘그렇다고 건드리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배덕감으로 은현의 마음속의 감정의 폭주를 이성이 간신히 제지하고 있었다.
뭐 어때? 에린도 원하고 있는데, 그냥 엘레노아나 릴리처럼, 받아들이면 되잖아.(악마)
야. 너 여기가 지구였으면 완전 쓰레기에 도둑놈이야. 나이 차이에 아내와 연인이 몇 명인데, 양심 뒤졌냐?(천사)
머릿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필사적으로 말싸움을 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일어나자.”
결국에는 이성이 이겼다.
“으응….”
은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의 상체를 끌어안고 있는 에린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팔에 힘을 줬다.
“조금만 더 자자아….”
“자고 있어.”
억지로 엉겨 붙어오는 에린을 떼어내고 릴리에게서도 벗어나 몸을 일으킨 은현은 두 사람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문을 열고 캐러밴 바깥으로 나와 크게 기지개를 켠 은현은 야외에 설치된 간략한 야영 도구들을 회수했다.
“에밀리아.”
“마스터의 부름을 확인. 슬립 모드를 해제합니다.”
캐러밴의 문 옆에 가만히 앉아, 고개를 살짝 떨구며 슬립모드에 들어가 있던 에밀리아가 곧장 은현의 말에 반응했다.
“밤 동안 마수의 접근은?”
“없었습니다.”
슬립모드의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돌아가는 경계 마법의 효과는 매우 유용했다.
덕분에 불침번의 로테이션도 생각할 필요도 없이 편안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는 생략하자. 아, 그래도 두 사람이 일어나면 어제 먹고 남은 스튜는 데워서 먹을 수 있도록 따로 담아둬.”
“명령을 수락합니다.”
야영 도구들을 모두 정리할 즈음, 릴리가 캐러밴에서 나왔다.
정리가 거의 다 되었음을 깨닫고,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인님보다 늦게 일어나서….”
“괜찮아. 이 정도로.”
뒤늦게 릴리와 함께 정리의 마무리를 마치고, 따로 냄비에 담아둔 스튜를 가지고 캐러밴 안으로 들어갔다.
“에린.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으응….”
출발하기 전에 캐러밴 내부에 설치된 부엌의 인덕션을 이용해서 스튜가 담긴 냄비를 달구고 곧장 아침을 먹을 준비를 시작했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에린이 비몽사몽한 눈으로 간이침대의 쿠션들을 소파 상태로 되돌리고, 테이블을 만들어 냈다.
“기대되는구나….”
“…….”
“아이야? 내 얼굴에 뭐가 묻었느냐?”
“아니요. 좋아서요.”
단지 밥 타이밍만 되자마자 곧바로 실체화를 해오는 베르단디의 행동이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
하계의 음식이라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은현은 이내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계의 이런저런 일들을 베르단디에게 경험시켜주고 싶다는 소망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곧 소영지에 도착하니까 준비하자.”
“…현이는 진짜로 대단한 것 같아.”
감지를 통해서 전방에 중소규모의 영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지시를 내리는 은현의 모습을, 에린이 감탄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감지 기술을 배우긴 했지만, 펼칠 수 있는 범위도, 지속 시간에도 현저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운전을 멈추고, 트렁크에서 여행의 필수품이 담긴 배낭들을 모조리 꺼내어 각자가 메었다.
레토나와 캐러밴을 에밀리아의 인벤토리 내부로 수납시키고, 굳이 도보로 걷는 이유는 레토나의 존재를 쓸데없이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약 30분을 도보로 걸으면서, 영지의 성문에 도착한 은현 일행은 경비를 서고 있는 두 명의 위병에게 검문을 받았다.
“흐음…젊은 남자 하나에, 여자 둘, 거기에 어린애라….”
가만히 보기엔 여행에 적합한 성별과 나이대의 구성이 아니다.
“본 개체느으브읍….”
어린애가 아니라고 항의를 하려던 에밀리아의 말을 에린이 곧바로 틀어막았다.
에밀리아의 반응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이들의 행색을 살피다가, 에린의 허리춤에 찬 레이피어를 발견하고 에린에게 물었다.
“흐음…. 행색이 젊은데, 모험가요?”
“네. 여기 신분패요.”
은현과 에린이 각자의 모험가 신분패를 꺼내어 보여주자, 위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의 메이드는 모험가가 아니라, 제 하녀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제 여동생이죠.”
“…….”
에밀리아의 머리카락은 은현과 마찬가지로 은백색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는 얼버무리기 쉬웠다.
단지 기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애 취급하는 은현의 행동에, 에밀리아가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뭐…모험가도 좀 신분이 있으신 모험가 양반 같구먼, 들어가쇼.”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던 위병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네 명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영지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둘러본 에린이 감당한 감상을 내뱉었다.
“…그렇게 활기차지 않네.”
페르니아스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과는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사람이 넘쳐났던 아르미타스 공작령과 비교해봐도 분위기부터가 차이가 크게 났다.
전체적으로 축 처져 있는 분위기는 마수와의 전쟁 여파로 암울한 기운이 맴돌았던 모그라프 변경령을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그라프 변경령과도 달리 굉장히 허술하여 보수조차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영지의 성문은 영지민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기에도 미묘했다,
관문을 지나 도로를 쭉 따라 걸어, 중앙 광장에 도착해도, 돌아다니는 사람은 크게 많지 않았다.
“원래 아르미타스령은 공작가문이 경영하는 영지이기도 해서, 유동인구가 굉장히 많은 편이야. 모그라프 변경령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해야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군사 병력이 많이 배치될 수밖에 없지. 딱히 특색이 없는 중소규모의 영지들은 이런 쪽이 대부분이야.”
영지를 경영하는 귀족의 위계도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주위의 인맥이나 기대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 있다.
영지만의 어떠한 특산품이나 독자적인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체계 등으로 영지를 눈부시게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영주의 경영능력과 수완이 매우 뛰어 나야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에린처럼 영지의 주위를 물끄러미 둘러본 은현도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활기가 없기는 하네.”
그나마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밝은 감정보다는 피로에 찌든 노곤함이 가득했다.
흘끗 릴리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릴리, 네 생각은 어때?”
은현의 질문에도 릴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저도 거의 6~7년 만이라서….”
전혀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부분도 있었고, 오히려 더 낙후된 부분도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예전보다 영지의 인구수도 줄어든 느낌이….”
전체적인 릴리의 감상은 은현이나 에린과도 비슷하여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사람보다 더 자세한 감상이라고 해봐야, 사람의 숫자가 더욱 줄어든 느낌이었다.
“일단은…여관으로 안내하도록 할게요. 그리고….”
조심스레 자신의 눈치를 보던 릴리와 시선을 마주친 은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너를 위한 여행이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감사해요. 예전에 부모님이 운영하셨던 식당을 찾아 가보고 싶어요.”
“그래.”
앞장을 서는 릴리의 발걸음을 뒤따라, 넷은 여관을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쇠 종소리와 함께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관주인이 입구를 응시했다.
“어서오시오.”
“4인실의 큰 방 하나요.”
“은화 2닢이오.”
“네.”
여관주인이 제시하는 값을 치르고, 셋을 먼저 올려보내 짐을 풀도록 명령을 해둔 뒤, 은현은 카운터의 주인에게 물었다.
“영지에 무슨 일이 있나요?”
“음?”
“영지의 내부의 분위기가 좀 이상해서요. 활기가 없다고 해야 할지. 모험을 하면서 다른 곳도 많이 둘러봤는데, 이곳은 특히 그런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심히 걱정된다는 표정과 톤을 띄우며, 사람 좋아 보이는 컨셉을 연기한 은현이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흐음. 외지인이 보기에도 그런가.”
여관주인은 은현이 해온 지적을 딱히 부정할 생각도 없이 침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몇 년 전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고 있는 게 원인이오.”
“마을을 떠나요?”
“그렇수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반년이 되고 1년을 지나, 2년, 3년이 지나면서, 영지를 떠나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영지 내부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고 경기는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가 되는 영지의 내부 사정은 젊은 층의 영지민들을 더욱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악순환의 연속 그 자체다.
‘…뭔가가 있네.’
은현은 자세히 조사를 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일의 단편을 말해준 여관주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팁이에요.”
“흐흐, 뭘. 고맙수.”
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어 여관주인에게 주자, 여관주인은 한치의 사양도 없이 실실 웃으며 은화를 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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