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305. 캐러밴 여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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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이었던 소녀의 가정이, 단번에 망하고, 노예로 팔리면서 겪었던 험난한 이야기들.
최종적으로는 반인반마(半人半?)로 신체가 변이되어버린 릴리의 이야기는 에린의 가슴 속에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제국의 잔당인 흑마법사에게 노예로 팔렸고 인체실험을 당하면서 악마로….”
“언니.”
“…….”
“그만…. 이제 괜찮아. 더는 말해주지 않아도 돼.”
오히려 듣고 있는 에린 쪽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에린은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는 릴리의 말을 제지하고, 그녀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꽉 쥐어주었다.
오른손을 통해서 전해지는 소녀의 작은 떨림의 에린의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언니도…많이 힘들었구나.”
자신이 겪어왔던 경험과는 질적으로 틀리다.
아이테르에서 신분의 차이로 인해 많은 학생들의 멸시와 조롱, 차별 대우를 받아오면서 힘든 인생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가족에게 배신을 당하고, 노예로 팔려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에린에게는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엘빈이 있었다.
아버지의 배신으로, 끝까지 품고 가려고 했던 어머니와 최악의 형태로 결별하게 된 릴리의 사연을 자신의 경험과 비교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모욕이다.
에린이 릴리에게 ‘악마’라는 첫인상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열 수 있었던 항상 밝고 성실한 모습으로 집안을 관리하고 덩달아 보육원의 아이들까지 돌보고 있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에이라와 동갑의 나이지만, 같은 평민의 신분으로 에이라보다 한집에서 오래 동거하게 된 릴리에게 내적인 친밀감을 형성하고 말을 놓게 된 계기였다.
그런 밝고 생활력 넘치는 친한 언니의 과거가, 너무나도 무겁고, 암울하고, 잔혹해서, 에린은 뭐라 위로를 해주고 싶었음에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말을 잃고 소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눈물을 보고, 릴리가 애석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내뱉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은현에게.
두 번째는 은현과 관계를 맺은 이후,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에게.
그리고 이번에 에린과 에밀리아의 앞에서.
에밀리아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으며, 릴리의 이야기를 듣고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에린만이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고 있었다.
은현은 담담하게 자신을 끌어 안아주며 자신을 받아주었고.
일리아나는 애석함이 묻어나오는 찡그린 인상으로. 엘레노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릴리를 다독여주며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의 끝에 자신을 위로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에, 릴리는 한때 무너져 내릴 뻔했던 자신의 마음이 다시 치유되고 있었다.
“에린, 나는 지금 행복해. 주인님과 마님들이나, 너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보육원의 아이들도 잘 커가고 있고.”
“…응.”
릴리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린은 푹 숙여 훌쩍이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는 여동생 같은 아이의 마음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슬슬 해가 져가네.”
뒷좌석에서 한창 이어가던 암울한 이야기를 듣던 은현이 허공의 저녁노을을 응시하고 중얼거렸다.
“야영 준비하자.”
“네. 주인님.”
릴리의 이야기로 시간이 지날수록 침울해지는 에린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한 은현의 배려였다.
좋은 타이밍에 들어오는 은현의 제안에 릴리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의 중에서도 릴리는 외출용으로 리폼시킨 메이드복을 착용하고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적당한 자리에 터를 잡아 주차를 시킨 다음, 은현과 에린이 모닥불을 피우고, 트렁크에서 장비를 꺼내와 모닥불 위에 더치 오븐을 설치하는 동안, 릴리가 캐러밴의 부엌에서 요리를 준비했다.
“꽤 능숙해졌네.”
“그럼, 당연하지. 헤헤, 나도 이제는 은위계 모험가잖아.”
능숙하게 모닥불을 피우고 장비의 세팅을 망설임없이 하는 에린의 모습에는 더 이상 초짜같은 어수룩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듯 들어오는 은현의 칭찬에, 에린이 뿌듯한 듯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을 해왔다.
1년을 가까이 모험가의 솔로로 활동을 해오면서 익힌 경험들이 어디로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고스란히 에린의 몸과 머릿속에 각인되어 활용되었다.
“바로 끓일게요.”
릴리가 출발 전부터 미리 준비해두어 숙성시켜둔 재료들을 가지고 나와, 모닥불 위에서 달구어지고 있는 더치 오븐 냄비 위에 재료들을 모조리 투입시켰다.
릴리의 조리가 시작되자마자, 에린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 속의 토마토 스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이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캐러밴 내부의 간이침대를 미리 깔아두었다.
“아…맛있는 냄새….”
해가 지면서 쌀쌀해진 날씨의 아래, 에린은 시간이 지날수록 졸여지면서 위로 올라오는 스튜의 향을 맡으며 표정이 풀어졌다.
“후후, 조금만 기다려.”
식기구를 가지고 나와 은현과 에린에게 스튜를 담아준 뒤, 은현이 숟가락으로 연해진 고기를 국물과 함께 떠먹으면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앗, 뜨뜨….”
후후 불며 뜨거운 스튜를 식혀가면서 입안에 넣던 에린이 몸 안을 가득 채우는 따뜻하고 향긋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언니, 맛있어!”
“응. 많이 먹어.”
“나도 한 그릇 줄 수 있겠느냐.”
“아….”
느닷없이, 은현의 뒤에서 나타나 실체화를 한 베르단디가 말을 걸어오자, 릴리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은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관계를 맺은 이후, 두 눈에 보이게 된 여신의 영체화 모습은 은현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왕 이렇게 된 것, 릴리에게는 최대한 베르단디의 존재에 익숙해지는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작게 미소를 지으며 베르단디에게도 스프를 담아 그릇을 건냈다.
“으음…. 확실히 이 맛은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감각….”
“좋아해주시니 저도 기쁘네요.”
부드럽다 못해 살살 녹아내리는 소고기의 육질을 씹으며, 행복감을 만끽하던 베르단디의 표정은 은현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여신과 함께 동석하게 된 기묘한 식사 속에서,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에린이 은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현아.”
“응?”
“전에 내가 말했던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 만나봤어?”
“아저씨? 아, 그 포션 사기꾼?”
“…사기꾼인가요?”
둘의 대화를 듣던 릴리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다름 아닌 에린이 은현에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기꾼의 소개를 중개했다는 것이 살짝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응응. 그게 말이지….”
에린은 모닥불 앞에서 스프를 떠먹으며 모그라프 변경에서 자신이 겪었었던 해프닝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크라시르 기사단과 에린 사이의 해프닝의 과정 속에서, 지금 언급한 ‘포션 사기꾼’이라는 모험가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이야기를 들은 릴리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 남자가 주도하도록, 시켜서 많은 모험가들과 병사들의 진술을 확보했지.”
그리고 그를 통해서 확보한 수백 장의 진술서들은 궁정 회의에서 다른 귀족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랬구나….”
에린은 이후로 그 포션 사기꾼과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은현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긴 했지만.
에린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은현이 웃으며 알았다고 이야기만을 했을 뿐, 이후의 상황을 듣지는 못했다.
과거 은현에게 사기를 치려 했다가 그의 주변 인맥이나 정체를 깨닫고, 도둑이 제 발을 저려 은현에게 사죄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던 비굴한 사기꾼 모험가의 근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름대로 마음을 고쳐먹고 상회를 운영하고 있어.”
“…상인을 하고 있다고? 그 사람이?”
“응. 내가 개인적으로 제조하고 있는 포션들이나 약재, 기타 자재들을 페르닌에 납품하는 일을 맡기고 있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잖아.”
“뭐,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나한테 다짐하기도 했으니까 지켜보려고, 개인적으로 나한테 잘 보이려고 모그라프령에서 그렇게 발에 땀이 나도록 뛰려고까지 했으니까.”
다른 초보 모험가들의 등을 처먹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기는 했지만.
포션 사기꾼 모험가는 모그라프 변경에서 그를 보자마자, 은현의 앞에서 냅다 엎드리며 그날의 일을 사죄하면서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다.
“또 사기를 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걸 감시하기 위해서 내 일의 일부를 그 남자한테 맡긴 거야. 제조원가과 유통비, 소매가, 모두 내가 정해줬고 그 남자에게도 제대로 이익이 돌아가도록 설정했어. 만약 내 포션들을 내가 정한 기준의 값보다 더 비싸게 팔거나, 다른 마음을 품으려 하면 흑랑단을 통해서 나에게로 제보가 들어와.”
“아, 그렇구나.”
“심지어 그 남자가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는 2년간 공작령의 모험가 길드에서 신참 모험가의 육성에 보탬이 될 기부금으로 들어가. 그게 내가 그 남자에게 용서를 하는 대신 내건 조건이었어.”
이미 사기를 쳤던 신참 모험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과거의 손해 금액을 배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한 어떠한 방식으로도 그가 사기 친 금액을 다시 환원시킬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어떻게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일단 페르닌이나 공작령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 그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모험가들에게 피해액의 2배를 배상하고 싶다는 공고를 붙이긴 했지만, 이것도 확인하는 절차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니까.”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사기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배상금을 받아내려는 치졸한 자들도 등장할 수도 있고, 공고를 붙여놓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피해자들이 찾아올지도 미지수다.
“으음…하지만 그건 최종적으로 현이가 직접 그 사람이 배상해야 하는 금액을 대신 지불해주겠다는 거 아니야?”
“일단은 그렇긴 하지.”
“그렇게까지 해줘야 할 이유가 있어?”
솔직히 말해서 에린은 그 포션사기꾼에게 은현이 이렇게까지 선처를 해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쪽도 무조건적으로 돈을 갚아주겠다는 조건을 내건 건 아니야. 그자는 장사수완이 꽤나 좋거든.”
재치있는 입담으로 주위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고, 상품의 이점을 조리있게 잘 설명하여 물건을 판매하는 스킬이 꽤나 뛰어났다.
적어도 사기 쪽에 몸만 담그지 않았다면, 장사꾼으로써도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인재다.
“이건 투자나 마찬가지야. 막대한 배상금을 대신 갚아주는 대신, 그것을 빚으로 달아두고,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모조리 갚게 만들거야.”
은현에게 돈 따위는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이것은 사람에게 하는 투자나 마찬가지다.
그 남자에게 들어가는 돈도 그냥 버릴 생각이 없었다.
들어간 비용보다 더 많이, 굴리고 굴려서 이익을 뽑아 먹을 생각이니, 나쁜 계획도 아니었다.
“그 빚을 갚아나가는 기간 동안, 나는 장사 수완이 뛰어난 부하 직원 하나를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거지.”
은현이 흑랑단을 부리고 있는 수법과 비슷하다.
그들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을 모두 맡아주고, 활동에 필요한 최저한의 생계 비용을 대주는 대신, 그들은 평생을 까라면 까야 하는 은현의 수족으로 살아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매정함이 포함된 채로.
어찌 보면 이 포션 사기꾼의 대우는 흑랑단보다 좋다.
적어도 정보수집의 일환으로 목숨을 거는 일이 아닌 상업 쪽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목숨이 노려질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 아저씨가 사기나 치고 다니면서 나쁜 짓을 했다는 모험가인 건 아는데…. 현이도 지금은 고용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악덕 업주 같은 표정이야.”
에린의 솔직한 감상에 은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보여? 그래도 나름대로 사기꾼을 개과천선시켜서 사람처럼 써먹어 보려는 시도인데. 그리고 에린.”
“응?”
“원래 고용주와 고용인 같은 갑을관계는 주인과 노예와도 같은 관계나 마찬가지야. 신분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이 둘의 역할이, 자연스레 그런 관계를 형성해. 그러니까….”
은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성공하면 반드시 고용주가 돼.”
지구에 살았을 때, 에린의 나이대에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은현의 꿈은, 고용주보다 몇 단계 위, 건물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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