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304. 캐러밴 여행(1)
* * *
“만약 아가가 너한테 고백하면, 받아들여.”
“…….”
단도직입적인 일리아나의 요구는 굉장히 단호했다.
오히려 이 요구를 거절한다면 정말로 실망할 것 같다는 아내의 눈빛을 읽었기 때문에 더더욱 대답을 망설였다.
“그리고 우리처럼 사랑해줘. 그거면 돼.”
“아니, 네 마음은 알겠는데. 너랑 엘레노아는…릴리는 정말로 괜찮아?”
“이미 우리끼리는 얘기 다 끝났어. 심지어…베르단디님도 허락하셨고.”
여기에 베르단디는 또 언제 끼어있었단 말인가.
현재 자신의 곁에 보이지 않는 여신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그렇다고 이 의문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아니…. 왜 여러분들끼리 모두 결정을 내리세요? 제 의사는요?”
도대체 언제 이야기를 끝내두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다.
반문해오는 은현의 얼굴을 곱게 흘겨다 보고,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너의 그 등신 같은 눈치로 어떻게 이 문제를 상담하니? 양심을 아예 버린 게 아니면, 그냥 우리 결정에 따라. 너도 아가가 싫은 건 아니잖아.”
정말로 은현이 에린을 싫어했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으며, 에린의 마음이 더 상처 입기 전에 에린을 집 밖에서 따로 살게 내버려 두도록 조치를 했을 것이다.
은현은 지금 망설이고 있다.
아마도 엘레노아와 관계를 맺었을 때도 이런 얼굴이었으리라고, 일리아나는 짐작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딸이나 여동생처럼 먹여가고 재우면서 키웠던 아이를 여자로 자각을 하게 되니, 심경이 매우 복잡했다.
“아가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밖에 없었어. 이제는 몸도 마음도, 모두 너나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이제 와 거리를 멀리할 생각이야?”
현재 에린의 마음은 은현과 그의 아내들에게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
소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엘빈이 되살아났음에도, 한번 강하게 품기 시작한 마음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생각해봐. 너랑 나의 시작도 사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잖아. 단지 내 이기심으로 시작된 거지만.”
은현은 충분히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다고, 그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엘레노아도, 릴리도 마찬가지다.
“…노력해볼게.”
“잘 생각했어. 후우….”
작게 숨을 토해내며 관계를 맺고 녹초가 된 몸을 은현에게 기대었다.
체중을 맡겨오는 일리아나의 상체를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한 번 더 할래?”
“…….”
일리아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아꼈지만, 이내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좋아.”
솔직히 몸 상태는 굉장히 피곤했지만, 아까의 기분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다는 욕구는 일리아나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꽉 끌어안고 있던 은현의 품에서 벗어나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와줘.”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은현을 향해 양팔을 내뻗어, 전신으로 그를 유혹했다.
◆ ◆ ◆
“다 챙겼니?”
“네!”
“흐응….”
아르키스 미궁의 던전 입구 부근.
일리아나는 많은 양의 짐의 적재를 마친 에린의 대답을 듣고,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커다란 상자를 응시했다.
일반 마차보다는 조금 크고, 넓은 폭과 높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매끄러운 모서리의 곡선을 자랑하는 독특한 모양의 이동식 상자는, 이번 여행에 맞춰 은현이 새로 제작한 발명품이다.
말이 마차를 끌 듯, 앞서 개발한 ‘레토나’라는 자동차의 위에 끄는 방식으로 이용된다고 은현이 설명한 바가 었다.
이른바 ‘캐러밴’이라는 ‘이동식 주택’이라 부르던 은현의 얼굴을 떠올리고, 시큰둥한 비음을 흘렸다.
“어디서 또 이상한 걸 만들어서는….”
도대체 이런 것들을 어떤 아이디어로 계속 제작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도 저는 좋아요. 일리아나님 안에 아직 안 들어가 보셨죠? 간이 샤워 설비도 있고, 부엌도 있어요! 설치된 침대도 얼마나 푹신한데요!”
“아가는 기분이 좋나 보네.”
반면 에린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1년 만에 재회하게 된 은현과 이번에는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이 매우 부풀어 오른 모양.
“헤헤. 그런가요?”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에린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면서도, 곧장 일리아나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어서요! 안에 구경시켜드릴게요!”
“알았어.”
자신이 제작한 것이 아님에도, 에린은 이번에 제작된 은현의 캐러밴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어린 딸아이처럼, 갓 성인이 된 소녀는 처음보는 이 캐러밴이라는 것에 눈을 반짝 빛내고 있었다.
“…냄새 좋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그윽한 편백나무의 향이 가득한 방 안의 분위기에 일리아나는 작게 감탄했다.
간단한 부엌과 샤워설비가 설치된 화장실, 각진 내부를 가득 채우는 소파와 테이블 등 생각보다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잠도 여기 안에서 잔다고?”
안락한 내부를 둘러 보았지만,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헤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현이한테 배워뒀거든요!”
에린은 중앙에 있는 테이블의 높이를 아래로 낮추고, 양쪽의 소파의 쿠션들을 끌어당겨 중앙으로 차곡차곡 배치했다.
등받이 부분에 해당했던 소파의 쿠션까지 바닥에 배치되면서, 훌륭한 간이 매트리스가 완성되었다.
밀착한다면, 성인도 세 명까지 함께 누워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형성되었다.
“거기다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또 있어?”
편백나무로 도배된 캐러밴의 벽면 일부를 막고 있던 잠금장치를 해제하자, 나무판자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바깥쪽 모서리 부분을 지지하는 기둥이 지지하는 훌륭한 2층 침대가 생겨났다.
그리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창문의 배치까지.
일반적인 마차보다 높이가 높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설계부터 설비들 모두가 최대한의 공간을 활용한 치밀한 구성의 결정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양쪽의 간이침대도 포함하면 총 다섯 명이나 잘 수 있어요! 진짜 대단하죠!?”
“…응. 그래. 대단하네.”
대단하다기보다 이것을 제작해낸 은현의 집념이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일리아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기가 막힌 얼굴로 생각했다.
‘신의 권능을 이런 식의 사적으로 이용하는 건, 아마 걔밖에 없을 거야….’
과거에 존재했던 물건을 복제하여 현실에 재현해낼 수 있다는 권능을 사적으로 남발하고 있는 은현의 행보는 이런 면에서는 거침이 없고 광기가 넘쳐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아온 건지….’
사람들의 문명에 침투시켜 강제적인 기술의 발전을 일으키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베르단디는 은현의 이러한 사적인 권능의 남발을 용인해주고 있었다.
경계가 애매모호한 권능의 남발로 제작되는 이러한 물건들은 어디까지나 은현의 사적인 취미의 영역이다.
지금껏 많은 고생을 해왔던 은현에게, 베르단디가 해주고 있는 선물이자 배려이다.
“현이는 이걸로 일리아나님이나 엘레노아님도 데리고서 다 같이 캠핑이라는 걸 가보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 캐러밴이 이번에 릴리의 어머니의 행방을 찾는데 시험 운행해보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뭐, 확실히….”
일리아나는 안락한 이동식 주택인, 캐러밴의 내부를 흘끗 둘러보았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네.”
평소 밖에 나가는 것을 귀찮아하고, 항상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일리아나가 ‘가끔 정도라면….’이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다.
내부의 그윽한 편백나무의 향기가 전신을 편안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일리아나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벌레의 대책도 확실해 보이고.”
야외에서 노숙을 할 때, 가장 싫었던 것이 접근해오는 벌레의 처리다.
직접 만지는 건 죽기보다 싫고, 그렇다고 마법을 사용하자니 이후의 여파가 더 귀찮다.
과거에는 노숙 중에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벌레의 무리를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화염계의 마법을 발동시켜 숲 전체를 불태워버릴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녀를 뜯어말리는 은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울창한 그 숲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쵸? 벌레는…저도 싫거든요. 이동하는 작은 집을 만들다니, 현이는 정말 대단해요.”
“후후.”
일리아나는 대꾸 대신, 작게 미소지으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매우 업되서 일리아나에게 캐러밴을 자랑하는 모습이 ‘이래도 안 살 거야!?’라며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열정적인 영업 상인 같다.
“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이윽고 던전 내부에서 은현과 엘레노아, 릴리가 연달아 나왔다.
“그러면 부탁할게.”
“얘기 다 끝났어?”
짐을 싸 들고나오는 은현을 포함한 세 사람을 응시하며, 일리아나가 물었다.
“응. 대강은.”
은현이 없는 동안, 그와 엮여있는 대외적인 정치적인 판단과 입장 등은 모두 엘레노아가 맡았다.
본래라면 은현이 부재중일 때, 두 아내 중 서열이 높은 일리아나가 이러한 판단을 하는 것이 맞았지만, 일리아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뭐, 엘레노아라면 잘하겠지.”
사람들과 입씨름을 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질색이었으며,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러한 판단과 권한들을 망설임 없이 모두 엘레노아에게 맡긴 이유는 그만큼 엘레노아를 신용하기 때문이다.
“올 때, 선물이나 사 올까?”
능청스러운 은현의 질문에, 일리아나는 픽 웃어 보였다.
“선물은 무슨, 무사히만 돌아와. 나랑 한 약속이나 잘 지키라고.”
감정이 폭발하면서, 자신과 둘이서만 있을 때 보여주었던 연약한 아내의 모습과 약속을 떠올리고, 은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절대로 깨서는 안 되는 약속을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일리아나와 진한 키스를 나눴다.
곧이어 엘레노아와도 키스를 나눈 뒤, 은현과 릴리, 에린은 레토나에 탑승하여 여행을 시작했다.
“와아…. 굉장히 푹신해.”
“그러게…. 주인님은 어떻게 이런 차를….”
주행하는 자동차 안에 처음 탑승해보는 릴리와 에린은 감탄이 섞인 표정으로 앞자리에 앉아있는 은현과 에밀리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에밀리아의 통제하에 무선으로 운전하고 있는 이 차의 내부는 거친 도로 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일반 마차와는 달리 편안한 주행을 유지했다.
“현아.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여행의 일정은 들었지만, 자세한 행선지까지는 듣지 못한 에린이 문득 궁금해져 은현에게 물었다.
“그런….”
흘끗 백미러를 통해 릴리의 얼굴을 한번 응시하고, 은현은 말을 이었다.
“렌디르 왕국으로 갈 거야.”
“렌디르 왕국? 대륙 남쪽에 위치한 곳?”
“알아?”
“아니, 자세히는…. 하지만 엘레노아님에게 가끔 공부를 배울 때가 기억이 나서.”
최근의 에린은 주에 2회씩 엘레노아에게 기초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아 아이테르에서도 학교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그런 상태의 자신이 앞으로도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기초적인 교양을 쌓기 위해 엘레노아에게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렌디르 왕국에 속해 있는 중소규모의 지방 영지에…”
“주인님.”
“릴리 언니?”
갑작스레 은현의 말을 끊는 릴리의 발언에 에린은 릴리를 바라보았다.
“제가…. 제가 말하게 해주세요. 저의 이야기니까요.”
“…그래. 알았어.”
은현이 씁쓸하게 웃으며, 릴리에게 말을 양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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