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295. 살충 청소 작업(3)
“그때 에린에게 시비를 건 것도 모자라, 지원 원정에서 검을 버리고 도망친 기사들은 모두 심문 끝에 사실로 밝혀졌고, 왕국과 왕가의 명예를 더럽힌 죄로 파면을 당했어요. 크라시르의 기사단장인 월터 후작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사단장 직에서 해임됐고요. 기사들의 부모들이었던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작위를 몰수당하고 보직에서 해임됐어요.”
리오드는 문제의 중심이 되었던 크라시르 기사단의 입단시험에 대해 비리와 청탁의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혀내면서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전혀 없는 근위기사단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렸다고 한다.
“꽤나 큰 파란이 불었군요.”
알렉스는 앞으로 있을 왕국 내부의 귀족 서열이 어떻게 뒤바뀔지를 고민하며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덕분에…현재 크라시르 기사단은 부단장이 사건을 수습하면서 대대적인 기사단의 재편성에 들어갔어요. 아마 현재 단원으로 있는 기사단의 능력도 역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퍼지면서 당분간은…왕국 궁정 내부에 많은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이윽고 유리아가 굳은 표정으로 은현에게 물었다.
“그리고…입단시험 청탁 이외에 다른 비리들에 대한 ‘익명의 제보’…. 그거 당신 짓이죠?”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는 척, 태도를 고수하는 은현의 얼굴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어떻게 보아도 그런 비리와 정보들을 타이밍 좋게 이 순간 제보할 수 있는 사람은 은현밖에 없다.
“별로 탐탁지 않은 목소리 같습니다만.”
“현재 궁정 내부에서 높은 직위를 담당하고 있던 고위 귀족들과 지방 귀족들이 그 ‘익명의 제보’에 의해서 대거 쓸려나갔어요. 모조리 작위를 수거하고, 가지고 있던 재산들을 국고로 환수시키는 특단의 결정이 내려졌죠.”
“왕비로서는 대단한 강경의 대응이군요. 그런데 뭐가 불만인 건가요?”
“…이게 올바르게 흘러가는 상황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
작년의 레니온 헤르샤의 배임횡령에 동참했던 부패한 귀족들을 강력히 처벌한 것에 이어서, 명예와 권력만을 추구하며, 자신들의 배만을 불릴 생각만을 하고 있던, 무능한 귀족들을 쳐내었던 이번 사건은 전체적인 국면으로 보았을 때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왕국은…일손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요.”
썩어가는 상처를 도려내고 고름을 짜내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 위에 새 살이 돋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지금껏 힘들게 왕국을 지탱해왔던 청렴한 귀족들이다.
궁정 업무로 왕국의 국책 사업을 운영할 새로운 이들을 선발하여 임명시키고, 몰수된 영지에 새로운 귀족을 보내는 등, 비리 귀족들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키는 것이 모조리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상황.
업무량은 많고, 인원의 충당에는 시간이 걸리고, 인재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만큼 왕국 내부를 좀 먹고 있던 세력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흐음.”
진짜로 아직까지 안 망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강대국으로 소문이 나 있던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부는 너무나도 어두웠으며,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현 상황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유리아의 하소연이었다.
“어째서 우리가, 그 사람들이 저질러 놓은 피해의 수습을 하면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야하는 건지….”
그리 중얼거리며 하소연을 하고 있던 유리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은현에게 말했다.
“이번 사건으로 내부의 귀족들의 부패의 일부를 뽑아낸 올리비온 후작은 차기 군무장관으로도 거론이 되고 있어요.”
“흐음. 리오드는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아마 본인은 그 군무장관의 자리에 크게 흥미가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오히려 이런 대우가 정당한 대우다.
20년 전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웅으로 등극한 리오드의 존재는 그 명성과 실력으로 왕국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고, 위로 치고 올라오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길까, 경계한 많은 귀족들의 견제 속에서도 리오드는 꿋꿋하게 그것을버텨왔다.
어느 한쪽의 파벌에 속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중립을 지켜왔던 리오드는 부패 귀족들이 척결되면서, 드디어 많은 귀족들에게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빛을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좋네요.”
은현은 귀족 사회 안에서 드디어 리오드가 정당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친구의 출세 소식은 언제 들어도 환영인 경사다.
하지만 유리아는 은현의 얼굴을 보고 수상쩍다는 시선으로 눈을 흘겨보았다.
“그나저나 당신, 도대체 왕비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시치미 떼지 말아요. 그때 회의장에서, 왕비는 에린의 처벌에 관한 문제를 입에 담기 전에, 틀림없이 당신을 한번 쳐다보았어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은현을 한차례 쳐다보았던 디아네 왕비의 시선을, 유리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살짝 경고를 해줬을 뿐입니다.”
“경고? 설마, 살해 협박 같은…!”
“…왕녀님의 머릿속에서의 제 이미지는 그런 이미지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고 수틀리면 그냥 죽여버리는?”
“…….”
솔직히 필요하다면 그런 짓도 서슴없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에 담지 않더라도, 노골적으로 그런 수도 쓸 것 같다는 의심이 섞인 유리아의 표정에 은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합니까? 머리를 없애 봤자, 더 큰 혼란을 초래할 뿐입니다. 왕비님을 죽여봤자, 그 이후에 왕관을 씌울 대상은 아직 15살도 안 먹은 나이 어린 두 왕자일 뿐인데, 결국에는 주위의 귀족들에 의해서 옹립된 허수아비의 역할 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 디아네 왕비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이득 따위는 하나도 없다고 은현은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암살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그런 얘기를 하고 있네, 이 사람?”
유리아는 알렉스에게 진짜로 은현에게 엘레노아를 시집 보낸 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내었다.
“아, 안 한다고요. 게다가 저한테는 이제 책임져야 하는 아내들도 있는데, 그런 무대포로 일을 벌일 리가 없잖아요.”
이전의 은현이었다면, 디아네 왕비가 정말로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강경의 수단으로 암살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지금의 시점에서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와 에린을 위험에 처하게 하면서까지 한 나라의 국모를 죽이는 대역 죄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은현에게 왕비의 암살은 매리트가 없어도 너무 없다.
“그냥 제가 디아네 왕비님에게했던 경고는 ‘정신 안 차리면, 아들한테 나라를 물려주기도 전에 나라가 망한다. 물려줘도 그건 이미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직전인 부질없는 왕좌다.’정도랄까요.”
다행히도 정신을 차린 끝에 은현이 깔아둔 판 위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 일을 벌인 귀족들을 척결하는 데에 성공하긴 했지만, 만약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귀족들을 감싸며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때는 정말로 더 강경한 대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회의장 위에서 형성된 판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신, 진짜로 어처구니가 없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왕비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너무도 거침이 없다.
“아, 왕비님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생각해보니, 왕녀님도 실적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또 뭔데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운 은현의 얼굴을 보고, 유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협상의 중개로 왕녀님을 세울 생각인가?”
“그렇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은 알렉스가 눈을 빛내며 묻자, 은현은 정답이라는 양 고개를 주억였다.
“아, 왜! 뭔데요. 또!”
“일단 이동하면서 설명드리죠.”
나란히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두 남자의 뒤를, 유리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뒤따라 걸었다.
저택을 나와서 마차에 탄 뒤, 어디론가 향하는 도중 알렉스는 ‘협상’의 내용을 입에 담았다.
“이번에 왕국에서 모그라프 변경령에 보내기로 한 지원 물자들 말입니다. 그 절반을 저희 쪽에서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요?”
알렉스가 해온 제안은 왕가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도 당연히 땅을 파서 나오는 돈으로 지원 물자들을 보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히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터.
그래서 알렉스는 ‘협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은현과 알렉스는 자신을 중개로 디아네 왕비에게 지원 물자로 협상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라는 것을, 유리아는 알아차렸다.
떨떠름한 유리아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알렉스가 아닌, 은현이었다.
“10년간 공작령에서 왕가로 징수될 세금. 30%만 깎아주시죠.”
“그게, 지금 그 왕비와 협상이 될 거라고….”
공작령의 성문 외곽에 도착한 마차 안에서, 유리아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물체를 발견하고 할 말을 잃었다.
햇빛에 비쳐 밝게 빛나는 은색 계열의 금속에 파란 테두리의 거대한 철제로 제조된 트레일러.
그리고 그 트레일러를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고무바퀴들.
트레일러와 연결되어 있는 트럭은 지구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비주얼이었다.
특히나 전체적으로 파란 바탕의 금속에, 붉은색의 일렁이는 불꽃 모양의 도색은 지구에서도 공상 속으로 존재하는 트럭을 그대로 재현시켜놓았다.
그 트럭과 연결되어 있는 트레일러 내부로 수 많은 물자들을 옮기고 있는 인형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리아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때 보셨던 ‘옵티머스’ 드디어 완성되었거든요.”
“…….”
“트레일러의 수용한계도 있고, 의심도 받기 싫으니, 정기적으로 1개월에 한 번씩 대여섯 번 정도, 왕복하려고 합니다.”
아내들이나 베르단디의 이해할 수 없는 한심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묘하게 열정을 불태운 은현과 에밀리아의 옵티머스 골렘의 제작과정은 말 그대로 창작의욕의 폭주 상태 그 자체였다.
여신의권능인 ‘복제의 권능’을 있는 대로 모조리 끌어다 써서 필요한 자재들을 충당하여 에밀리아와 함께 제작된 광기의 집합체는 유리아의 할 말을 잃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왕녀님의 중개로 왕비님의 허락만 떨어지면, 저 저거 타고 바로 모그라프령으로 갈 건데. 어떠세요? 원하신다면 양보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알렉스와 함께 차 안에서 오붓하게 드라이브라도 시켜드릴까요?”
트럭데이트라니, 지구에서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신의 로망이자, 미지의 경험 그 자체였다.
순간 일리아나나 엘레노아가 절대로 싫다며 손사래를 쳤었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반면 옵티머스가 무엇의 모티브인지를 알고 있는 유리아의 경우에는 반드시 타고 싶다고 말해올 것이 분명하다고 은현은 확신했다.
“…내가 저걸 운전하라고요?”
“에밀리아가 원격 조종으로 할 수 있지만, 원하신다면 직접 운전해보실 수도 있는데. 해보실래요?”
마침내 유리아의 이성이 끊어졌다.
“내가 저걸 어떻게 몰아! 이 미X놈아! 나 면허도 장롱면허인데! 심지어 대형 면허도 아니라고!”
“…어라?”
유리아의 반응은 은현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