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3화 〉293. 살충 청소 작업(1) (293/730)



〈 293화 〉293. 살충 청소 작업(1)


“아, 됐습니다. 그런 대우를 받을 거였으면, 알렉스와 이렇게 말을 트고 지내지도 않았어요.”

이제  뒤늦게 치고 들어오는 노인공경이라니, 은현 쪽에서 사양이다.
사실상 리오드와 일리아나와 친구와 부부의 관계를 맺으면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서 서열이나 족보를 꼬이게 만드는 중심인물에 서 있는 은현이었지만, 이런 부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마치 은현이 등장하지 않았을 때처럼, 자신들끼리 알아서 예우를 갖추며 맞춰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 말 안 해줬어요? 지금까지?”

은현은 유리아의 비밀을 모두 듣고도, 지금까지 그녀가 멋대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부분을 구태여 말해주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시에 대한 이야기와 이 세상이 소설 속이 아닌, 현실의 세상이라는 것을 직즉에 말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안 물어보셔서요.”

“…이 사기꾼.”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는 은현의 태도에서 얄미움을 느낀 유리아는 주먹을 꽉 쥐며 떨었다.
사실 은현이 유리아에게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은 상황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언젠가 전생의 기억을 깨운 여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접촉을 해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리아는 사도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건가?’

아니면 아직도 그녀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시험을 받는 와중인 걸까.
엘레노아를 자신의 사도로 점찍은 베스타를 제외하면, 여섯 여신 중 한 명이 유리아를 사도로 삼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왕녀님이 알렉스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셨는데,  쪽에서도 가만히 있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비밀도 함께 밝힌 건데. 왕녀님께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됐어요.”

고개를 홱 돌린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착각 속에 빠져있었던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니,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
너무 놀리지 말라는 알렉스의 쓴웃음이 섞인 시선을 받아들이고, 은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제에서 조금 돌리기 위해, 알렉스는 살짝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본래라면 주인공일 예정이었던 차한성이라는 자는, 현재 아르티아에 입단했다는 건가?”

“그렇더라.”

“직접 이야기를 섞어본 네 입장에서는 어땠지?”

“으음….”

사실 은현은 차한성과 지구의 문명에 대한 시덥잖은 농담이 섞인 대화를 나누었을 뿐,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는 못했다.
리오드에게 들었던 내용으로는, 작년에도 입단시험을 봤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작년과 올해의 그의 인상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1년 사이에 인상이 바뀌었다라…. 왕녀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알렉스는 흘끗 유리아를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저 말인가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보면, 왕녀님께서는 미래시 속에서 그 차한성이라는 남자의 정보를 대강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성장을 거치는지, 같은 대략적인 줄거리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 그 정보들은 모두 쓸모가 없어져 버렸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본 이야기 속의 차한성이라는 남자는 이야기의 초반, 모험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점차 자신의 실력과 경력을 쌓고 페르닌에 거주를 해요. 그곳에서 모험가로서 활동을 하다가….”

잠시 은현의 눈치를 보더니, 유리아는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페르닌에서 날뛰기 시작한 신수가 불바다로 만드는 사건에 엮이게 돼요.”

“그건….”

이전에 유리아가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던, 본래 예정되어 있었던 에린의 미래다.

“즉 본래 예정되어 있었던 미래와 현재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유리아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한성의 건은 제가 리오드에게 직접 이야기를 전달하고 관찰을   있도록 이야기를 전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왕녀님에 대한 이야기도 간접적으로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올리비온 후작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며 고민에 빠졌다.
리오드는 개판인 왕국 내부의 귀족파벌 싸움에서도 꿋꿋하게 중립을 지켜나가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던 단단한 기둥 같은 귀족 중의 하나다.
심지어 은현의 동료였던 남자이기도 해서, 믿지 않을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허무맹랑한 비밀을 리오드가 믿어 줄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잘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죠. 아, 논공행상과 변경령 지원에 대한 궁정 회의가 끝나고 1주일이 지났는데, 그때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싫은 기억을 떠올렸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린 유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엔 당신의 생각대로 됐어요.”

 ◆ 

쿠웅!

“말도  되오!”

아르티아의 심문실에서 진행되는심문을 받고 있던 귀족이 분개하며, 쥐고 있던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내가…이 내가 크라시르에 내 아들을 입단시키기 위해 인사청탁을 넣었다니…! 네 놈은 지금 나와 내 자식, 나의 집안을 모욕하는 건가!?”

평생 받을 모욕을 모두 받았다는 듯, 분개하는 귀족의 얼굴.
분노의 시선을 받은 카인의 얼굴은 지극히 담담했다.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만.”

“뭐라고?”

카인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테이블 위, 자신 쪽에 올려두었던 수십 장의 서류들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읽어보시죠.”

인상을 찡그리면서 무엇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귀족의 표정에도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귀족에게 직접 서류의 내용을 읽을 것을 권유했다.

“이, 이것은…!”

서류의 내용을 읽은 귀족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윽고 이 서류를 자신에게 내밀었던 카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걸 해오셨더군요.”

“이 정보들을 도대체 어디서 얻은 거냐!”

“‘익명’으로 본부에 제보된 정보입니다만.”

‘익명’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이것은 현재 은현의 아래로 들어가게 된 흑랑단에서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이다.
현재 심문을 받고 있는 카인의 눈앞의 귀족뿐 만이 아닌, 이외에도 다수의 귀족들의 비리와 행적들이 빠짐없이 모조리 기록되어 있는 정보들.
그것들은 루난이 페르닌의 슬럼가에 자리를 잡으면서, 정보 길드를 설립하면서 오랜 시간을 걸쳐 모아온 페르니아스 왕국 귀족들의 어두운 면이 낱낱이 적힌 정보들이다.
정보 수집과 살인 청부 등의 더러운 일들을 수행해오면서 언젠가 배신을 당할 때를 대비해 수집해두었던 정보들은, 연루된 귀족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는 위험이 가득했다.

“출처도 불확실한 이런 정보들로 감히 나를….”

“그런 것치고는 내용이 너무 상세합니다만. 날짜, 연루된 귀족들의 이름, 인원수, 원인과 과정, 결과들까지. 모순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깔끔한 내용이지 않습니까? 아, 모순 자체가 없는 깔끔한 정리라는 뜻입니다. 내용 자체가 썩어들어가고, 더럽다는  마찬가지지만요.”

출처도 불확실하다며 신용할 수 없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카인을 비롯한 아르티아는  제보에 대해서 익명이라고 신빙성이 없다는 명목으로 증거를 채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름 아닌 은현 쪽의 정보 제공이다.
이제는 그의 가치를 알고 있는 아르티아의 단원들은 리오드와의 모의 대련을 통해서 그 기량의 일부를 보여준 은현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있다.

“특히나 자선사업을 빌미로 보육원을 만들고, 이 보육원의 어린아이들을 타국이나 거리가 먼 소영지에 노예로 만들어서 반출을 할 생각을 하다니,  가관이네요.”

노예로 만든 아이들의 몸값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것은 물론, 복지사업으로 지급된 왕국의 예산은 모조리 떼어먹으며 따로 이익을 챙기기까지.

“이건…모함이다. 모함이야!”

일그러진 얼굴로 분개하는 주장에도 카인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거야. 자작님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죠. 하지만….”

테이블 위의 더러운 내용이 낱낱이 적혀있는 서류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서류에 적혀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시켜서 조사할 예정입니다.”

“이건…크라시르 입단시험에 대한 부정청탁과는 전혀 다른….”

“더 질이 나쁜  이쪽이죠. 나라를 좀먹는 부정부패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는데, 이것에 대한 심문도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으!”

반박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분개하고 있는 귀족의 심문이 마침내 끝났다.
귀족의 죄질은 확실하다.
이제 그와 연루된 다른 이들을 체포하여 추가적인 수사를 병행할 차례다.
연루된 모든 이들을 잡아들이고, 인과 관계를 명확히  보고서를 작성한다.
단장인 리오드가 디아네 왕비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면 아르티아 기사단이 해야  일은 끝이다.
심문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의 경례를 하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심문을 마친 귀족이외에도, 심문이 예정된  다른 귀족들의 숫자만 열 명이 넘는다.
게다가 고아원 아이들의 노예 밀반출 뿐만이 아니라.
세금의 감면을 위해서 다수의 귀족들에게 금전과 성적인 상납을 일삼았던 대규모의 상회들에 대한 수사까지.
이외에도 털어버려야 할 내용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할 일 더럽게 많네.”

그만큼 심문해야 할 사람들이 많고, 수사해야 할 건이 많다는 의미였다.
이번 심문의 목적은 크라시르의 입단에 대한 부정청탁뿐만이 아니다.
은현이 궁정 회의장에서 유리아를 미리 섭외하여, 크라시르의 신입 단원들의 인성과 실력을 문제 삼고, 입단시험에 대한 부정부패의 의혹이 제기되도록 흐름을 만든 것은 이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시작점에 불과했다.
나라의 예산을 빼돌리고, 자신들의 자리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견제하고, 권력과 기득권을 독점하는 견고한 체제를 만든다.
그러는 과정에서 저질렀던 부정부패들을 모조리 수사를 받도록 만들기 위해서.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의 입단시험의 부정청탁 의혹으로, 최근 입단한 신입 단원들의 귀족 가문  다수의 사람들이 수사를 받게 되는 상황은 만들어졌다.
이제는 그들이 저질렀던  다른 비리에 대한 수사를 병행하면서, 그들과 연루되었던 다른 비리 귀족들까지 줄줄이 엮어 모조리 뽑아내는 것.
그것이 은현이 이번에 깔아둔 판이었다.

-작전명은 ‘에프킬라’라고 하자. ‘살충제’ 뿌려서 모조리 없애버리자고.

실실 웃으며 그런 농담을 하는 남자의 계획치고는, 굉장히 치밀하고 잘 짜여 있는 구성이다.

‘…진짜로 무서운 양반이네. 단장님의 친구분이라고 하셔서 다행이었지, 적이었을 걸 생각하면, 진짜로 환장했겠어.’

이미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국가라는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부패한 귀족들을 벌레를 취급하면서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상황을 주도하여 만들었다.
개인의 무력도 굉장히 뛰어난데, 은현을 돕고 있는 사람들, 인맥 또한 만만치 않으며 하는 사고방식 또한 가차없다.
상황을 유도하고, 구석으로 몰아넣고, 처단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복잡하네. 그냥  일이나 하자.’

그렇게 카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단장님은 아직이신가?”

“예. 아직도 직접 월터 후작의 심문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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