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292. 시간의 무게(2)
훈련장의 내부는 강렬하고 살벌했다.
강제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오직 바람을 가르는 목검의 소리, 두 목검이 충돌하면서 내는 소음,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는 은현과 리오드의 숨소리만이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대련을 관전하고 있는 단원들과 에린, 에이라는 그저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었다.
강하면서도 유려하게, 빠르면서도 강렬하게, 검을 부딪치고 서로의 ‘무(武)’를 선보이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는 각자의 극명한 특징이 드러났다.
균형 잡힌 공수전환과 정석적인 움직임이면서도 한방 한방이 강렬한 일격을 구사하여 밀어붙이는 리오드의 검은 강력하고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 강렬한 일격 한방 한방을 신들린 기교로 흘려내고, 회피하며 억지로 만들어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은현의 검은 매섭고 빠르다.
특징이 도드라지고, 극명히 차이가 갈리는 두 검술이 살벌하게 부딪치면서도 서로의 우열이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호각’이라는 단어는 이런 경우 일 때 쓰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5분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은현과 리오드가 주고받은 치열한 공방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차한성은 생각했다.
‘…대단해.’
많은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차한성 또한 두 사람의 검술에 눈을 떼지 못했다.
차한성은 아까 전, 은현에게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저 검은 나에겐 무리겠네.’
차한성은 어째서인지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한번 본 상대방의 검술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그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의 무게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에린과 대련을 하면서, 그녀의 검술을 파악하고 그녀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재현하며 따라붙는 성과를 보일 수 있었다.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검을 보아왔고, 관찰을 통해서 분석을 하여 자신에게 맞는 검술을 조금씩 구성해나갔다.
즉 차한성은 눈앞의 상대가 검에 대해 재능이 넘치고 그 성장의 폭이 가파를수록, 자신의 성장폭 또한 크게 가팔라진다.
그 검의 일부를 분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분석한 다양한 검술들의 장점들을 조합함으로써, 자신도 큰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차한성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그 노력의 재현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소녀인 에린을 자신보다 강하게 성장시킨 스승이라는 점을 떠올리고, 은현의 검술이라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은현에게 거절을 당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상성이 맞지 않아.’
은현의 검술에서는 들어간 노력과 시간의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도저히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해낼 수 있는 무게가 아님을 차한성은 꿰뚫어 본 것이다.
지금의 경지를 이룩하기 위해서, 눈앞의 은백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것일까.
은현의 움직임은 하나하나가 낭비가 없고, 정교하면서도 효율적이다.
저 깨끗하면서도 정갈한 움직임을 그저 본다고 해서, 자신이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은현의 수백 년의 시간이 쌓인 끝에 만들어진 검술과 노력을, 같잖은 자신의 편법으로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사람의 제자로 들어간다고 해서, 자신은 저 사람처럼 강해질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시간을 쌓을 수가 있는 거지?’
검에 매진한 시간의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은현의 비밀을 모르는 차한성에게는, 은현이 먹고, 자는 시간은 물론 휴식시간조차 아껴가면서까지 검에 매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들게 만들었다.
그만큼 은현의 검술에서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한 시간과 노력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 노력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경애심이 차한성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차한성은 이곳에 입단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로 천운과도 같은 행운이 작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저 대련을 관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 높은 경지로 발을 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더 강해질 수 있어.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를 머릿속으로 상기시키며, 은현과 리오드의 검을 빠짐없이 두 눈에 새겼다.
타아악!
언제까지고 지속 될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공방은 어느새인가, 끝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수십 합의 격렬한 결투를 벌였던 두 사람의 목검이, 두 사람의 체력보다 먼저 한계에 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목검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이윽고 충돌하면서 완전히 꺾여나간 두 자루의 목검의 일부가 튕겨 나가 허공을 날았다.
“그만!”
양쪽 다 무기를 잃은 시점에서 승부의 결착을 낼 수 없게 되자, 재빨리 부단장인 카인이 나서서 두 사람의 대련을 중지시켰다.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 은현과 리오드는, 둘 사이의 중앙에 부러진 목검을 던져놓고 싸움을 포기했다.
“오, 오오오오!”
공식적으로 싸움이 끝났음을 깨달은 단원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대단합니다! 단장님!”
“저분도 굉장하시네!”
엄청난 기량을 보여준 두 사람에게 보내는 단원들의 박수갈채로 단숨에 훈련장이 떠들썩해지는 와중에, 에린이 곧장 은현에게 달려들었다.
“현아! 대단해!”
“고마워.”
“멋있었어!”
이전 미궁 원정에서 은현에 대한 실력의 단편을 보았던 적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 검술을 몸에 익힌, 무인(武人)으로써의 시선에서 보게 된 은현의 기술은 굉장히 유려하면서도 깨끗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현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고, 우러러볼 수록, 그의 제자로서 알려져 있는 에린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자신의 스승이 타인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이 괜히 뿌듯했다.
“후우….”
“목표를 잡았군.”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은현에게 리오드가 말을 걸었다.
“역시 그렇게 보여?”
“적어도 그저 살의밖에 담겨있지 않던 이전보다는 훨씬 낫지.”
은현에게 검술은 단지 적의 목숨을 빼앗은 수단에 불과했다.
좀 더 효율적으로, 빠르고 강하게 죽이는 것에 대해 만들어진 해답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 은현의 검술.
상대를 이기고 싶다거나, 자신의 경지를 한 단계 위로 높이 끌어올리고 싶다는 열망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시에테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염원이었기에, 베르단디와 아내들이 지금의 은현에게 헌신적인 여유와 치유로 보듬어주었기 때문에 품을 수 있었던 열망을, 리오드는 알아보았다.
“다음에는 진짜 전력을 다한 대련을 해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티났어?”
“내 생각이지만, 검의 완성에서도 너는 이미 나를 뛰어넘었다.”
대련을 관전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직접 검을 섞어본 리오드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은현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곳, 아르티아에 있는 단원들이 모두 리오드를 이 나라 안에서 최강이자 우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검으로도 너에게 뒤처지게 되었군.”
“추월당했다는 말을 하는 것 치곤 꽤나 담담한데?”
“너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쏟아부은 그 시간과 정성의 무게가 검을 섞으면서 리오드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갈 길이 멀군.’
20년 만에 만나면서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자신의 목표이자 친구는 어느새 또다시 먼 격차를 벌리며 앞을 달리고 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달리,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다행이군.”
아주 가끔, 마음의 공허함과 함께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은현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매사에 충실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인생을 마감했던 친구가 다시 부활해서 충실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에, 리오드는 작게 안도했다.
또다시 격차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분노하고 한탄하고, 질투하기보다, 20년 전보다 안정된 친구의 모습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리오드는 고개를 돌아보며 환호로 분위기를 물들이고 있는 자신의 단원들을 물렸다.
“카인. 그만 해산시켜.”
“알겠습니다. 단장님.”
부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들의 해산을 직접 지시하여 훈련장을 비웠다.
“두 분, 수분 좀 섭취하시고, 숨을 고르세요.”
카인의 명령에 따라 단원들이 하나둘씩 훈련장에서 모습을 감추면서, 뒤늦게 생수통을 가져온 에이라가 은현과 리오드에게 각각 하나씩을 권했다.
생수통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자신의 목으로 흘려 넣어 벌컥벌컥 들이킨 은현은 수분을 모두 보충한 다음, 리오드에게 물었다.
“바로 갈까?”
“그러지.”
◆ ◆ ◆
“…그래서, 차한성, 그 사람하고 만나봤단 말인가요?”
“예. 제일 좋아하는 CEO가 프리저라는 얘기까지 들었죠. 아마 왕녀님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정보까지는 궁금하지 않았어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는 유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흘겨보았다.
“후작 부인께서는…축하드려야 할 일이군.”
반면, 은현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 있던 알렉스는 올리비온 후작가에서 셋째를 가졌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에 주목했다.
“진찰도 하고, 산모에게 도움이 되는 보약을 지어드리긴 했지만, 알렉스, 너도 리오드 쪽에 선물을 보내고 싶다면, 질 좋은 약재들을 보내. 내가 몇 가지 추천해 줄게.”
“부탁하지.”
“뭐, 리오드 쪽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왕녀님의 용무를 들어보죠. 이제는 감추고 있던 패를 모두 깔 마음이 생기셨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은현의 경우에는 그녀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
공작 저택의 내빈실에서, 세 사람만의 자리를 마련하여 유리아가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 상대는 은현이 아니라, 알렉스다.
은현의 경우에는 그녀의 상황을 보다 쉽게 털어놓기 위해 섭외된 도우미에 지나지 않았다.
겨우 결심이 선 유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알렉스. 지금부터…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알겠습니다.”
유리아는 은현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을 마침내 털어놓았다.
자신이 전생자라는 사실부터, ‘지구’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언급했던 ‘미래시’의 정체가 전생하기 전 지구에서 읽었던 소설 속의 내용 들이라는 것들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알렉스는 심각한 낯빛으로 고개를 주억이며, 유리아가 언급한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
“그렇군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 책 속에 펼쳐진 이야기 속이라고….”
“제 이야기를…믿어주시는 건가요?”
곰곰이 자신의 말을 곱씹으며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던 알렉스의 얼굴은 유리아에게 있어서 전혀 상정 외였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왕녀님의 말씀을 믿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
-괜찮습니다. 저는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왕녀님의 말씀을 비웃거나, 거짓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왕녀님께서 가지고 계신 비밀을.
그때 밝혀왔던 알렉스의 당당한 의사를 떠올리고, 유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계속해서 자신을 믿어주면서, 올곧은 의지를 관철하고 있는 알렉스를 보고 있자니, 이럴 거면 진즉에 밝힐 것 그랬다고 생각하는 후회의 감정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유리하는 괜히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는 그 의사를 표현해준 알렉스에 대한 감동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왕녀님. 왕녀님의 그 이야기는 사실 조금 틀립니다.”
“…뭐요?”
살짝 감동의 물결로 눈물을 흘리려던 순간, 분위기를 깨는 은현의 한마디가 유리아의 감동을 빼앗고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이곳은 책 속의 세상이 아니에요. 엄연한 현실이죠. 심지어 저는 전생자도 아닙니다. 지구의 기억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고대인’ 그 자체입니다.”
“…….”
“왕녀님이 읽었던 ‘운명의 메르헨’이라는 소설은 정말로 실존했던 미래의 일들을 책으로 엮어 퍼뜨린 거죠.”
순간 할 말을 잃은 유리아는 은현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천천히 머릿속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오만가지의 생각이 다 들며, 이내 말도 안 된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그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기에, 제대로 정리도 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아요?”
“네. 맞습니다. 지구는 멸망했어요. 이곳, 아르케나 대륙은 멸망한 지구의 위에, 다른 차원과 통합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문명이죠.”
“…세상에.”
“지구는 악마들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왕녀님의 경우에는 그 시점 이전에 이미 사망하셔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셨던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제대로 믿기지 않는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남자가 전생자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고대인 그 자체라는 뜻은.
“…당신 몇 살이에요?”
“글쎄요. 400살 이후로는 나이를 세는 것도 잊어버려서.”
“…….”
자신의 비밀 따위는 우습게 덮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자, 유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부터라도 할아버지라고 불러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