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1화 〉291. 시간의 무게(1) (291/730)



〈 291화 〉291. 시간의 무게(1)

“에린.”

“응?”

“그러면  되지. 사람한테 무슨 무례한 짓이야.”

차한성과 은현의 사이를 가로막고 그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에린의 태도는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뭘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결정하는 건 나인데.”

“으, 응….”

에린의 어깨에 손을 올려 살짝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고,은현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차한성님을 가르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은….”

“헤헤.”

어깨에 올려둔 손바닥을 소녀의 머리 위로 이동시켜 상냥하게 쓰다듬는 손동작에, 경계가 서려 있던 에린의 얼굴에 미소가 맺히며 기분 좋음을 표현했다.

“이 녀석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좀 벅차서요.”

정중하게 거절을 해오는 은현의 말에,차한성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어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젠가 차한성님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조만간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조금 일정이 있어서요.”

“좋습니다. 저도 기대가 되네요.”

아까의 대화만으로 두 사람은 서로가 평범한 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백히지구에서 살았던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전생자’와도 비슷한 경우다.
같은문명을 공유하고 있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차한성으로써는 은현과의 만남이 굉장히 기쁜 순간이었다.

“슬슬 대화는 정리가 되었을까요?”

에린의 난입으로 혼잡해질 뻔했던 대화의 마무리를 쓴웃음을 짓고 있던 에이라가 나서서 수습했다.

“응. 그렇네.”

“은현님. 아버지와 함께 본부를 오신 건, 혹시….”

“맞아. 테레지아님의 상태를 봐 달라고 부탁을 받았거든.”

“아….”

작게 탄식을 내뱉은 에이라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의사 못지않은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는 은현의 진찰이라면, 어머니의 몸 상태가 보다 더 건강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리오드에게서 부탁받은 것도 있었고.”

“부탁인가요?”

“응.”

작게 은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단장실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앞으로의 업무와 일정들을 모두 기록하고 정리를 마치고 함께 나온 카인과 리오드.
리오드는 은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곧장 발걸음을 향하는 두 사람의 방향이 본부를 나가는 것이 아닌, 훈련장을 향하자, 이내 의문을 느낀 에린이 은현에게 물었다.

“현아, 후작 저택에 방문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도 일정 중 하나인데, 이 일을 먼저 마치고.”

“그게 뭔데?”

 ◆ 

“야야야! 비켜봐!”

“아! 좁다고! 좀 멀찍이서 떨어져서 보라고!”

“단장님의 진심 대련이라니! 이게 얼마 만이냐!”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하고, 순식간에 떠들썩해진 훈련장의 내부는 단원들의 치열한 자리싸움의 경쟁으로 벌어졌다.

“당장 자리 두 곳을 비워라.”

“아! 부단장님! 진짜 너무하십니다!”

“여기에서까지  직위와 서열을 들이미셔야겠습니까!?”

급기야 지위를 이용하여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치졸한 수를 보이려  카인의 언행에 많은 단원들의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내가 앉으려는 자리가 아니야.”

“예? 그러면….”

카인의 뒤에 서 있는 두 여성을 발견한 단원들은 사정을 이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진즉에 말씀 좀 해주시지. 이봐! 맨 앞에 두 자리 당장 만들어!”

리오드의 딸과 은현의 제자인 에이라와 에린에게, 아르티아의 단원들은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어정쩡한 기분으로 단원들이 열어준  위를 걸으면서 맨 앞자리에 다소곳이 앉은 에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짜고짜 은현과 리오드의 대련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많은 주목을 모으고 있는 이 상황은 아직 에린에게는 너무 무거운 관심이었다.
조금이라도 가깝고, 좋은곳에서 대련을 관전하려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훈훈한 양보의 마음이 피어난 그 가운데,에린과 에이라는 서로를 마주고 보고 있는 은현과 리오드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응?”

“언니는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사람이 부딪히는 걸  적이 없었던 에린과 에이라에게는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리오드나 은현이나, 에이라나 에린이 보는 앞에서 각자의 진심을 내보인 적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단련을 받아왔다고는 하지만, 누가 더 강한 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만큼, 두 여성의 실력은 그렇게 훌륭한 수준이 아니다.

“저는…언니한테는 죄송하지만, 현이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은현은 에린의 영웅이다.
가능하다면 그가 지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상상하는 것도 싫다.
그렇기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리오드의 패배를 의미한다.
리오드의 딸이자, 자신이 믿고 따르는 친한 언니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에린은 작게 에이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후후, 그렇게 말하자면, 나도 아버지가 이겼으면 하는 걸?”

그것은 에이라 또한 마찬가지.
아이테르의 학생이었던 에이라를 아르티아의 기사가 될 수 있도록 그녀를 단련시켜준 것은 은현이다.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갚아야할 은혜.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버지의 패배를 바랄 정도로 깊은 은혜는 아니었다고, 에이라는 생각했다.
에린이 은현을 자신의 마음속에영웅이라고 품고 있듯이, 에이라 또한 리오드를 자신의 마음속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사로서 동경을 품고 있다.
 마음은 결코 에린이 품고 있는 마음에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약속 하나만 할까?”

“약속이요?”

“누가 이기더라도, 우리 서로 서운해하지 않기로. 어때?”

미소지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에이라의 행동에, 에린이 기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얼굴로 에이라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건 에린이 곧장 화답했다.

“좋아요!”

훈련장의 주위를  채운관객들의 중심, 목검을 쥔 은현은 자신들에게 집중된시선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굳이 단원들 앞에서 대련을 하겠다는 네 의도는 대강 알겠는데.”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서, 은현은 시에테에게서 전수받은 검술을 얼마나 적용시켰는 가를 알아보기 위해, 대련을 해줄 상대로 리오드를 지목하여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본래에는 그의 저택에 있는 연무장이나, 자신의 던전 주택 안에 설치된 연무장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아르티아 본부 안에서 많은 단원들의 관전 하에 성립된 대련은 예상외였다.
심지어 리오드의 그 의도도 뻔히 보인다.

“단원들의 의욕을 고취 시키고 싶어서 직접 나서다니, 참 너답네.”

우직한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어, 솔선수범 모범을 보이려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한 집단을 이끄는 단장과 어울린다.
게다가  다른 이유로 자신의 의욕을 고취 시키려는 의도도 섞여 있다.

“미리 말하겠지만,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부하들의 앞이니까.”

“어련하시겠어.”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목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무게감을 확인한 은현은 리오드와 동시에 자세를 잡았다.
검을 겨누며 서로를 노려보면서 시선을 교환하는 싸늘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웅성거리던 단원들의 목소리가 점차 조용해졌다.

“…….”

 단위로 무거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단원이 꿀꺽 침을 삼킴과 동시에.

타악!

선공을 취한 것은 은현 쪽이었다.
여신의 권능을 일체 배제한 순수한 움직임이었음에도, 순간 기사단원들은 은현의 움직임을 놓쳤다.

“……!”

눈 깜짝할 사이에 품으로 파고드는 은현의 움직임에 단원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안개처럼 흐릿하게 잔상을 남기며사라지는 그의 몸이, 순식간에 리오드의 앞에 도달하여 목검을 휘두르는 광경은 마치 한 장소에 은현이  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그의 ‘이형환위’를 이미 몇 번인가 겪어봤던 에린이나, 에이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다.
에린과 에이라는 감탄보다는 은현과 리오드의 움직임을 쫓으면서, 빠짐없이  눈에 담기에 바빴다.
그것은 현재 은현의 목검을 막아낸 리오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는 목검을 아주 적은 동작으로 튕겨내면서, 신체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리오드는 은현의 기습에 전혀 동요하거나 태세를 잃지 않았다.
깔끔하게 방어를 해내면서 곧바로 공수의 전환이 되면서, 매섭게 횡으로 베고 들어오는 리오드의 목검을 역수로 쥐어 아래로 찍은 은현의 검날이 방어를 해냈다.

“…쯧.”

검에 실려있는 어마어마한 무게감에작게 혀를 찬 은현은 방어한 자신의 목검째로 그대로 밀고 들어오는 리오드의 공격에몸을 뒤로 빼면서 회전시켜, 그의 공격을 흘려낸다.
왼발을 축으로 회전한 그의 몸에 힘을 실어 날렵한 민첩성을 이용하여 목검에 실리는 힘을 증폭시켰다.
회전력이 실리면서 빠른 속도로 쇄도해오는 목검을 은현과 마찬가지로 몸을 뒤로 빼면서 공격을 피해내자, 은현과 리오드 사이의 거리가 다시 한번 벌어졌다.

“와, 와아….”

아주 짧은 순간 이루어진 공방전을 보면서, 에린은 작은 감탄의 소리를 내뱉는다.
다른 단원들은 침을 삼키며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두 사람의 검을 관찰하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긴장감 속에서 숨을 쉬는 소리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고요함.
검을 겨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서로의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저런 현이의 모습…처음 봐.’

마치 며칠 전, ‘열쇠’를 만들어냈을  10시간을 넘도록 망치만을 두들겼던 그때의 표정이다.
고요함 속에서 은현은 생각했다.

‘리오드와의 힘 싸움은 불리해.’

정면대결은 불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한 그의 공격을 흘려내면서, 그가 보이는 빈틈을 찔러야 한다.
리오드의 검술은 공격과 방어의 균형은 물론이고, 신체의 밸런스도 탄탄한 정석적인 검술이다.
그것을 부수고 깨져버린 밸런스의 빈틈을 찌르는 것은 은현으로써도 쉽지 않았다.
 번이고 반복적인 움직임 끝에, 정교하면서도 검과 몸이일체 된 ‘신검합일’의 경지.
자신의 스승, 시에테가 보여주었던 검사로서의 정점을 은현은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수련하고 노력을 쏟아부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그 구간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이것은 서로의 목숨을 깎아내리고, ‘살인’으로 승패가 갈리는 전제가 되어 있는 싸움이 아니다.
서로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여 쌓아 올린 ‘검술’, 서로의 ‘무(武)’를 겨루는 것.
누구의 기술이 더 높은 완성을 이루었는지로 승패가 갈리는 ‘무인(武人)’들간의 싸움.
이 싸움에 자신이 가진 여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자신이 시에테의 검술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를 시험해보는,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나의 노력이, 스승님의 바람을 이뤄드릴  있을까?’

지금까지의 자신이 해왔던 노력이 과연 성취를 이룰  있었을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반면, 나이가 마흔이 넘었음에도, 노쇠하기는커녕 점점 위를 바라보고 있는 왕국 최고의 기사는 젊었을 적, 자신의 한계를 깨부숴준 친구를 응시했다.
어떤상황에서도 항상 해답을 내놓으며 자신들을 이끌었던 친구는 자신의 은인이자, 숨겨진 영웅, 리오드의 목표이기도 하다.
은현이 시에테를 생각하며 자신의 성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리오드 또한 은현에게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자신의힘이 은현에게 어디까지 통할지에 대한 순수한 의문.

‘나의 노력으로….’

‘나의 검으로….’

은현과 리오드는 서로를 응시하고는, 서로의 생각을 읽은 듯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품고 있는 것은 검사로서 호적수를 만나면서 품게 된 불타오르는 호승심.
여신의 힘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기술만으로, 리오드를 이기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다.
지구에서 검성이라고 불렸던 시에테의 검술을, 자신이 어디까지 받아들였는지를 확인해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다.
검술의 재능으로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를 짊어진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의 재능을 이기고 싶다.’

‘나의우상을 이기고 싶다.’

같은 생각을 품은 두 검사는 서로에게 달려들어 검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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