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290. 주인공(3)
“먼저 훈련장으로 가라.”
“알았어.”
단장실로 들어간 리오드를 뒤로 하고, 은현은 느닷없이 복도에서 달려와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에린과 대화를 나누었다.
은현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곧바로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겨든 에린은 고개를 올려다보며 은현의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됐어?”
“잘 끝났어.”
“…정말로? 나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아?”
“벌 안 받아.”
쓰게 미소를 지으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무작정 주먹부터 휘두르면 안돼. 이번처럼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
“반성할게…. 고마워.”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은현의 몸을 끌어안던 팔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킁킁 냄새를 맡았던 에린은 그의 몸에 추가된 또 다른 향기를 느끼고 순간, 몸을 경직시켰다.
‘릴리 언니의 냄새….’
어째서 릴리의 체취가 은현의 몸에 뒤섞여 있는지, 이유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실에 대해서 서운함과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것을 표정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했던 에린은 애써 미소지으며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곧….’
애써 비밀로 해두었던 릴리 결심과 행동은 에린에게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릴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전할 때는, 자신이 스스로 떳떳하게 성장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자신의 힘을 성장시켜나가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
‘미호야. 나 더 열심히 할게.’
[…흥.]
자신의 연심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하찮고 사소한 계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구미호는 에린의 마음을 비웃지 않았다.
계기가 어떨지라도, 그것을 통해 빚어진 소녀의 결심은 훌륭하다.
신수의 힘을 제대로성장시키고 다루기 위한 수행을 통해서 제대로 자신의 후계를 잇겠다는 것을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레반테인을 뽑을 수 있게 됐을 때를 목표로 잡자.’
에린은 그렇게 속으로 결심하며 은현의 품에서 떨어졌다.
이윽고 야외 훈련장 쪽에서 한 기사가 에린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어쩔 거야!? 계속할 거야?”
“아…. 죄송해요! 전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쉽네! 지금 딱 10연승인데!”
“아, 아하하….”
낄낄거리면서, 손을 내저으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기사의 반응에 에린은 난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10연승?”
“응. 한창 기사님들하고 모의 대련을 하던중이었거든. 지금 막 10연승을 채워서….”
“흐음…대단하네. 벌써 그렇게까지 성장했나?”
“사, 상대해주신 기사님들도 연차가 얼마안 되는 하위 계급의 기사님들뿐이셨어.”
이번 에린의 사건도 그렇고, 모그라프 변경에서 보여주었던 활약으로 에린의 인지도가 단번에 상승했던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1년 전에 비해 크게 성장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장하네.”
“어, 진짜로? 나 잘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은현의 칭찬이 들리자, 에린이 놀란 얼굴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슬슬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온 것 같네.”
“약속? 아!”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싶었던 차, 약 1년 전 신혼여행을 떠나기전, 자신에게 레반테인을 선물해주면서 덧붙였던 말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에린이 10승을 채운 상태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떠올린 과거의 기억에 에린의 두 눈이 빛났다.
“흐음, 무기는 이미 줬으니까…. 전투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아티팩트나 방어구를 제작해주면 되려나?”
“…뭐?”
“왜 그래?”
“아니….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레반테인과 비슷한 수준의 장비를 원하던 거 아니었어?”
“아닌데?”
“엥?”
은현은 에린이 자신에게서 레반테인을 받았을 때, 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기뻐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수준의 장비를 제작해줄 생각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지레짐작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따로 바라는 게 있는 거야?”
“그, 그렇긴 한데….”
얼굴을 붉히며 뭔가 부끄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에린의 태도가 몹시 수상했다.
“지금은 말 안 해줄 거야. 나중에…나중에 꼭 들어줘야 해? 내 소원.”
“뭐…알았어.”
느낌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에린이 자신에게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 정도로 몰상식한 소녀도 아니었기에,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현아. 나 현이랑 비슷한 사람 봤어.”
“비슷한 사람?”
“응. 아니, 현이처럼 잘생겼다는 얘기가 아니라, 뭐라 해야 하나…. 분위기? 그게 굉장히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이름의 울림도 뭔가 비슷했고.”
“칭찬 고마워.”
은현은 피식 미소지으며 에린의 앞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이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를 대강 짐작한 은현이 계속해서 에린에게 물었다.
“혹시 그 사람 이름이 ‘차한성’이라고 그랬어?”
“어?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어떻게 알았어?”
은현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발음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자, 에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엇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였어?”
“응. 아이참, 어떻게 알았냐니깐?”
“그런 외양이 이 나라 안에서 흔한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흘끗 시선을옮겨 에린의 뒤쪽을 응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는 한남자의 발걸음을 인지하고, 에린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저분 맞지?”
“아! 맞아. 저분이야.”
“…응?”
소녀의 말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단장실 쪽으로 걸어오던 두 사람 중, 한사람.
차한성이 의아한 얼굴로 단장실 앞에 서 있는 은현과 에린을 쳐다보았다.
“오셨군요.”
그와 함께 단장실로 향하고 있던 에이라가 은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은현이 누구인지 몰랐던 차한성 또한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대강 들었어. 신입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면서?”
“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서….”
에이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를 하고는 차한성에게 은현의 소개를 시작했다.
“이분의 성함은 은현이라고 하셔.”
“아, 설마….”
에이라에게서 어느 정도 들었던 정보가 있었기 때문일까, 차한성은 얼굴을 굳히고 은현을 바라보았다.
“맞아. 아버…. 아니, 단장님의 친구분이시자, 너와 같은 고대인의 핏줄이셔.”
“…저렇게 젊으신데, 말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와 친구라는 것이 믿겨 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보로는 대륙에 10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위자릿수의 마법사인 ‘검은 마녀’와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여식인 ‘차기 성녀’를아내로 둔 남자.
그런 존재가 자신과 같은 ‘고대인의 후손’이라는 것에 한 번즈음은 만나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한성이라고 합니다.”
“은현이라고 합니다.”
서로 악수를 하며 두 손을 맞잡은 두 고대인의 표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미소지으며 흥미로운 표정을 띄우고 있던 은현과는 달리, 차한성의 경우에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린 듯 복잡한 표정이었다.
“많이 당황하신 것 같네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상상이 잘 가지 않았던 은현과의 만남은 굉장히 갑작스러우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는 치킨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거야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엉?”
느닷없는 은현의 음식 취향 고백에 차한성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피자도 좋아했죠.”
지긋한 미소를 지으며 오픈해오는 취향에, 은현의 의도를 읽은 차한성이 쓴웃음을 짓고 은현의 말에 답했다.
“전햄버거가 취향이었습니다.”
“족발.”
“돈까스.”
“짜장면, 탕수육.”
“초밥.”
“회.”
이윽고 서로의 음식 취향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주제로 와전되기 시작한다.
“게임.”
“만화책.”
“용볼의 손오공.”
“저는 프리저가 제일 좋았는데요.”
“공감합니다. 요즘 들어서 드는 생각인데, 그런 CEO. 어디 가서 보기 힘들죠.”
“실제로 지구를 침략했으면, 제가 앞장서서 존경하는 프사장님께 팔아넘겼을 텐데 말입니다.”
농담이 섞인, 알 수 없는 의미의 대화가 끝나고 미소를 지은 은현이 아무런 말 없이 차한성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에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차한성도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은현이 내민 손을 맞잡고 입을 열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분이 생겨서 정말 기쁩니다.”
“…….”
의미를 모를 두 남자의 대화를 옆에서 멀뚱히 지켜본 두 여성은 기가 찰 노릇이다.
알 수 없는 단어들만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형성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언니, 지금 두 사람이 한 얘기 알아들으셨어요?”
“에린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니…?”
은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들뜬 마음을 감추지못했다.
이것은 이전, 유리아와 대화를 나눴을 때처럼, 지구의 문물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할 때, 형성되는 공감대와도 같았다.
[…아이야.]
아주 가끔, 취미와 일의 일환으로 ‘옵티머스’를 제작하는데에 열을 올렸던 것처럼, 지금 은현이 짓고 있는 표정은 정말로 과거의 20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르단디가 정말로 철없는, 한심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표정으로 은현을 응시했다.
에린의 경우에는 그런 은현의 밝은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놀란 표정이었다.
‘도대체 뭐야?’
어째서 대화 한번 섞어보지 않았던, 초면인 두 사람이 짧은 대화 몇 마디만으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의미를 모를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한테는 그런 표정 지어주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에게도, 심지어 일리아나나 엘레노아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런 표정을, 차한성에게는 곧바로 보여주었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에린은 자신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서운함과 외로움, 질투심을 느꼈다.
심지어 자신과 같은 성별이 아닌, 이성에게 제대로 정의할 수도 없는 복잡한 패배감을 자각한 에린은 괜히 주먹을 꽉 쥐었다.
“떠, 떨어져!”
“응?”
“엉?”
두 남자가 한창 열 띈 대화를 나누던 도중, 에린은 악수로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놓고는 난입하여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에린? 왜 그래?”
“…….”
은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적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에린의 눈과 마주친 차한성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이건 마치….’
자신의 주인을 지키려는 앙칼진 강아지를 연상시킨다.
현재 페르닌의 귀족사회나 기사들 사이에서 떠들썩한 은현은 아내만 둘이라는 사실은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기에 진즉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내만 둘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정보.
비공식적으로는 몇 명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에린의 지금의 반응으로 차한성은 확신했다.
‘이 사람 완전 인싸 리얼충이네?’
게다가 소문으로 듣자 하니, 눈앞의 소녀를 지금까지 성장시킨 것은 그만큼 은현의 가르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아르티아의 기사들에게 들은 바가 있다.
‘저 사람에게서 검을 배울 수만 있다면….’
더 빠르게 자신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판단을 마친 차한성은 하하호호 웃고 지내던 방금까지는 다른 진지한 기색을 띄우며 은현에게 입을 열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차한성의 부탁은 은현으로써도 매우 뜻밖의 말이었기에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안 돼요!”
은현과 차한성이 가까워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에린이 황급히 은현의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하지만 차한성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글쎄 안 된다고요! 현이의 제자는 저뿐이에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둘만의 이상한 공감대로 세계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직접 봤기 때문일까.
에린의 마음속에서 차한성에 대한 경계 수치가 단숨에 최대치로 상승했다.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품게 된 에린의 경쟁, 질투, 경계의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에린은 마침내 차한성을 적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