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8화 〉288. 주인공(1) (288/730)



〈 288화 〉288. 주인공(1)

“고생했어.”

정말로 궁정 회의를 마치고, 역으로 공격을 당해 씩씩거리며 나가는 몇몇 귀족들을 뒤로하고, 은현은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로 무슨.”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 알렉스의 표정은 담담했다.

“애슈턴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 그 아이에게 은혜를 갚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에린에게도 전해둘게.”

“그래 주면 고맙겠군.”

“자,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갈….”

모든 일의 뒤처리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변경 요새의 지원 여부와 크라시르의 신입단원들의 문제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지금, 은현은 회식의 기분으로 리오드에게 식사를 제안하려던 차였다.

“알렉스.”

“왕녀님.”

대화에 난입해 온 유리아를 보고, 알렉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나는 선약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런가 보네.”

알렉스를 두고, 은현은 리오드와 함께 회의장을 나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넌, 일 하나가 끝나자마자 일이냐?”

“할 일은  쌓였으니까.”

크라시르의 신입 단원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겨진 리오드에게는 변경 요새에서의 전투가 종료된 이후였음에도 휴식은 없었다.
애초에 에린과의 충돌로 생겨난 이번 사건을 당사자들인 크라시르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닌, 아르티아에 맡겼다는 것은 크라시르에게 있어 수치나 다름이 없다.
왕비의 신용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하지만 이번 일에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나설 생각은없다. 쪽에도 지금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지.”

“급한 일?”

“집안일이다. 생각해보니 너에게도 부탁을 하고 싶군.”

“……?”

은현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안일이라며? 우리 지금 네 기사단 사무실 쪽으로 가고 있는  아니야?”

“에이라를 데리고 곧장 저택으로 향할 생각이다. 따로 일정이 없다면 너도 따라와 줬으면 좋겠군. 아니, 꼭 따라와라.”

말하는 투가 정중한 요청이면서도 묘하게 강압적이다.
평소의 진중하고 근엄한 태도가 살짝 흔들리면서, 리오드는 묘하게 침착하지 못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설명하자면, 그는 지금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테레지아가 임신했다.”

굳은 얼굴로 간략하기 짝이 없는 간단한 정보의 전달에 은현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뭐?”

“내 아내가 셋째를….”

“아니. 아니, 아니, 그 얘기는 알아들었어. 내가 묻고 싶은 건….”

리오드의 분위기에 휩쓸려 전혀 생각지 못한 경사의 소식을 들은 은현이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하고 고르며 입 밖으로 꺼냈다.

“언제부터?”

“의사의 말로는 약 4주가 조금 지났다고 하더군.”

“아니, 그러면 지원 원정을 출정하기 이전이잖아. 알면서도 출정을 한 거였어?”

혹시  녀석, 심각한 일 중독인 걸까?
싶은 의문이 정도다.
중요한 시기에 아내의 곁에 있어 주지 않고,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원정으로스스로 발을 들이 밀어온 무신경함에, 은현이 살짝 질린 시선을 보냈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들은 리오드도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해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만, 나도 몰랐다. 나도 원정에서 돌아오면서 알게  사실이었어. 만약 알았다면…. 적어도 에이라를 원정에 데려가지는 않았을 거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테레지아를 돌보도록 에이라의 출정을 만류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에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리오드의 결정에 승낙을 하지 않았을까.

“아직 초기이고, 중요한 원정을 앞둔시기였기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당연히 아내의 상태를 봐줬으면 한다.”

“아니, 정기적으로 의사도 검진을 오고 있을 거 아니야. 나도 임산부를 진찰해본  솔직히 경험이그렇게 많지 않은데….”

굳이 자신에게까지 검진을 요청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우리 사이에 갑자기 셋째가 생긴 것의 원인은 너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

“나에게 지어준 보약.”

“아.”

은현은 작년에 제라드와 리오드와 함께 술을 마실 때, 느닷없이 셋째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테레지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리오드에게 자양강장을 비롯한다양한 효과를 가진 다량의 보약을 지어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1년을 가까이 꾸준히 먹어온 리오드의 정력은 신체 나이에 비해 20대 못지않은 건장한 상태.

“검진을 왔던 의사의 말로는 아내의 몸 상태도 고려해서 매우신경을 써야 할 때라고 하더군.”

이제 막 마흔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가지게 된 늦둥이는 확실히 경사스러운 일.
그것을 이루어낸두 부부에게도 대단하다는 말밖에 들지 않았다.
그와는 별개로, 아이를 배고 있는 산모의 건강은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다.

“쓰읍….”

간접적으로나마 테레지나의 임신에 기여를 하게 된 셈인 은현은 전후 사정을 대강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드의 요청은 테레지아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둘째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보약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뭐…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고맙다.”

어쩔 수 없다는  고개를 주억이자, 리오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은현은  가지 불안한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이 사실…일리아나도 알아?”

“그것까지는 나도모른다. 알면 안 되는 건가?”

“아니, 요즘에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나한테 말했던 게 떠올라서.”

“…그 녀석이?”

이번에는 은현이 아닌, 리오드 쪽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무뚝뚝했던 얼굴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원인은 앨리스의 아이를 본 다음부터인데….”

“그렇군.”

리오드는 20년 만에 만났던 이전 팀 동료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승이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엘프를 반려로 맞이하여 딸을 데리고 등장한 팀의 막내는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변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눈은, 고칠 수 있는 건가?”

“의안(義眼)을 만들어볼 생각이야.”

“의안?”

“눈의 기능을 대신  수 있는 인공적으로 만든 눈.”

“…그게 가능한가?”

“해봐야지.”

신체의 결손을 복구시키는 기적을 가진 아니에스조차도 앨리스의 두 눈을 고치지 못했다.
일반적인 절단의 상처라면 그저 손상된 안구를 복구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오염된 마나의 공격에 노출된 안구는 그대로 시신경까지 손상을 입혀 신성력으로도 복구시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아니에스가 앨리스를 구하기 위해, 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조치는 그녀의 두 눈을뽑아버리는 것뿐이었다.
드물게 아니에스 쪽에서, 앨리스의 치료에 관해서 은현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먼저 말을 해온 이유는 그녀가 아직도 그때의 일로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쓸 수 있는 수단은 어느 정도 갖춰졌어.”

자신의 곁에는 수준 높은 인챈트를 부여할 수 있는 일리아나가 있다.
손상된 시신경의 끝을 잘라내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앨리스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아니에스도 있다.
머릿속의 구상을 끝내고 제작된 두 눈을 이식시켜, 그녀에게 또다시 빛을 보여줄 수 있는 미래는 조금씩 완성이되어가고 있었다.

“적어도…자기 딸의 얼굴은 자기 눈으로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어.”

그것이 설령 가짜로 만들어진 의안일지라도.
딸과 남편의 얼굴을 만지고, 목소리로 판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녀의 눈으로 자기가족의 얼굴을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다.
과거 함께 팀을 이뤘던 동료에게 은현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군.”

리오드는 은현의 작은 바람을 듣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울 일은 없는 건가?”

“글쎄, 딱히 생각이 나지 않네.”

아쉽게도 이번 일에 한에서 리오드가 도움을  수 있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그에 대해서 유감이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것보다 네 쪽의 상황은 어때.  기사들 쪽도지원 원정을 나갔었잖아. 사상자나 위험한 중상자들은 있었어?”

“중상자가 나오긴 했지만,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모두 내가 직접 뽑고, 단련시킨 녀석들이다. 다른 녀석들처럼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았어.”

“어련하시겠어.”

자신의 기사단에 대해서 강하게 품고 있는 그의 자부심에 피식 웃으며, 은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사단의 창단부터 지금까지 단원들을 직접 면담을 통해서 뽑고, 스스로 단련시켜 지금까지 이끌고 온 아르티아는 지금의 리오드의 자랑이다.
단 하나의 청탁이나 부정의 개입 여지를 일절 용납하지 않고, 그것을 눈엣가시로 여겨지면서 많은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오며 성장해온 지금, 리오드는 말 그대로  나라의 검 그 자체.

우우웅

“흠?”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리오드와 함께 아르티아 본부로 향하던 도중.
품속에서 울린 진동에 은현은 수정구를 꺼내어 마력을 흘려보내 작동시켰다.
이내 수정구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쁜가?

현재 정보통으로 은현의 밑에서 활동하고 있는 흑랑단의 단장인 루난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네가 말한 ‘그 녀석’. 현재 위치를 찾았다.

은현은 루난이 말한 ‘그 녀석’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발걸음을 멈췄다.

“찾았다고?”

-그래. 이전의 스탬피드 사건으로, 아르티아의 신입 단원이 되었다고 하더군.

“…뭐요?”

아니, 걔가 왜 거기 있어요?
순간 은현은 그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 ◆ ◆

“이겼다!  이겼어!”

“아가씨 대단한데!”

“아싸! 역배라고! 금화 3닢이야! 이히히히!”

“넌 그냥 자살해. 새끼야!”

“젠즈아아앙!”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이면서 아르티아 본부의 야외 훈련장은 매우 떠들썩했다.
근 1년 만에 방문하는 기사단 본부에 들어선 에린은 소란스러운 훈련장의 분위기에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지원 원정에서 에린과 오랜만의 재회로 간단한 인사를 나눴던 아르티아의 기사들은 변경 요새에서 정체 모를 힘을 이용하여 많은 마수들을 제압했던 에린의 모습에 인상을 남겼다.
이후 은현을 따라 오랜만에 페르닌을 방문한 에린은 곧장 에이라와 함께 아르티아 본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1년 사이에 놀라운 성장을 보였던 에린에게 많은 기사들이 관심을 보이며모의 대련이 한창이었던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아, 정신 사나워….”

에린과의 대련에서 패배한 기사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외침.
그런 기사를 야유하는 동료 기사들의 목소리.
에린의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환호하며, 축하를 해주는 목소리들.
모의 대련의 결과로 내기가 오가는 중, 승자와 패자가 갈리면서 금화를  자와 잃은 자들의 반응이 극에달할 정도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봐! 신입! 다음은너도 한번 해보라고!”

“아니, 저는 딱히….”

지목당한 기사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에린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으음…?”

지목당한 남자의 얼굴을 응시한 에린은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흑발흑안의 머리카락의 색깔이나 눈동자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그의 이목구비가 어딘가 누구를 연상시키는 외양이다.

‘현이랑 닮았네…?’

근본적으로 얼굴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느껴지는 분위기나 이목구비의 형태가, 은현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에린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못 보신 분인데, 신입 단원이신가요?”

“바로 알아보네? 지난 모그라프령 지원 원정 때, 에이라가 추천해서 특별히 입단 시험을 보고 들어온 녀석이거든. 이름도 특이한 게 차한성이라고, 고대인이야.”

“고대인….”

에린은 어째서 자신이 눈앞의 흑발흑안의신입 단원이 은현과 비슷하다는 위화감을 받았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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