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6화 〉286. 자식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1) (286/730)



〈 286화 〉286. 자식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1)

“으응…. 어?”

잠시 몸을 뒤척이던 릴리는 자신이 깨어난 장소가 침대 위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던전 주택의 관리역을 맡고 있는 자신이  방을 모를 리가 없다.
매일 자신이 청소와 관리를 하고 있는, 은현과 아내들의 침실이다.

“일어났니?”

“…아! 마, 마님!?”

나긋하게 자신을 부르는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릴리는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몸을 움직였다.
곧장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은 릴리는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난…욕실에서 주인님과…아!’

서서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욕실에서 있었던 기억들에 안색을 창백히 굳힌다.

“욕실에서 실신한 너를 현이가 업고 왔어.”

“주, 주인님께서….”

“현이랑 했다며?”

“아…네, 네.”

직설적인 일리아나의 질문에 릴리는 당황했다.
자신의 남편과 관계를 맺은 여자를 대하는 일리아나의 시선은 매우 담담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상태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위엄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리아나나,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기품을 흘리는 엘레노아의 시선을 받은 릴리는 몸을 굳혔다.
자신들의 남편에게 손을 대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남의 남편을 유혹하여 관계를 가진 것이 좋은 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마님들. 제가 설명을….”

“괜찮아. 현이한테 다 설명 들었어.”

“아….”

릴리는 작게 탄식했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말로 아내들을 설득시켰을까, 그것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설득해야 할 부분까지, 모조리 은현에게 맡겨버린 것에 릴리는 큰 책임을 느꼈다.

“어땠니?”

“네?”

“좋았어?”

“네. 엄청 좋았…네?”

느닷없는 일리아나의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해, 릴리는 당황했다.
질문과 함께 마녀의 몸에서 방출되는 어마어마한 아우라는 자연스레 릴리의 숨을 옥죄어온다.

“읏….”

마치 ‘내 남자랑 해서 좋았어?’라고 묻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속 한구석이 굉장히 찝찝하기 짝이 없는 기분.

“일리아나님…. 너무 짓궂어요.”

“후후, 그런가?”

이미 한번 당해본 경험이 있었던 엘레노아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일리아나에게 말하자, 일리아나는 킥킥대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내 다시 릴리를 바라보며 말한다.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마. 내 나름대로농담이었으니까.”

“저, 정말로  방금 숨이 막혔는데요….”

“당해본 사람의 입장으로썬 웃을 수 없어요….”

두 사람 중, 엘레노아만이 릴리의 마음에 깊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기운을 접하게 되면, 그것은 정말로 공포다.
지금의 릴리처럼, 엘레노아가 은현과 관계를 가지고 일리아나와 대면했을 때, 가장 먼저 친 장난이 바로 이것.
가뜩이나 잘못한 쪽인 입장이기 때문에 더욱 위축되기가 쉬울뿐더러, 살벌하기가 짝이 없다.

“그치만, 이거 꽤 재미있는데? 내가 살면서 다른 여자를 도둑고양이 취급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걸로 엘레노아에 이어서 굉장히 오랜만이라.”

킥킥대며 장난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마녀를 보고 있자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릴리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은현이었다면, 이것을 보고 솔직히 나이 마흔을 넘게 먹으면서 그런 장난을 치는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짝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저, 저어…마님들.”

“왜 부르니?”

“저,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제가 주인님과 그…몸을 섞어도….”

“괜찮아. 왠지 모르게 네가 현이를 보는 게 예사롭지가 않아서 그럴 예감이 들기도 했고, 솔직히 걔랑 맺어지면서 이런 상황은 애초부터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어.”

솔직히 은현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더 이상 여자가 꼬일 것이라 전혀 생각하고 있지 못한 듯 했지만, 일리아나는 처음 은현과 맺어지면서 이 상황을 대강이나마 예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쁜 여성과 엮이지 않도록 잘 관리만 해두고 받아들일 준비만 해두자고 마음먹었다.
릴리의 경우에는 ‘악마’라는 종족의 특성이 절반 섞여 있는 기이한 돌연변이 같은 존재.
세상에 밝혀진다면 배척받고 끝에는 비참한 최후를맞이하게 되겠지만.
그녀의 본성이 선하고 은현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으며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가짐을 품는다면, 일리아나는 릴리를 이끌어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아, 저 그리고 마님….”

“응?”

“혹시 저와 주인님의 관계…에린한테 들키지는 않았나요?”

“아, 후후.”

우려하는 바의 의미를 깨달은 엘레노아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린은 요즘 또 하나의 목표를 발견해서. 지금 그쪽에 정신이팔려있거든. 그 사람이 릴리를 데리고 나오는 것도 들키지 않았어.”

“아…후우. 다행…이에요….”

괜히 새치기를  것 같아, 릴리는 그리 마음이 좋지 못했다.

“뭐 아가의 경우에는, 지금 자기 나름대로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지켜보자. 일단 지금 당장은….”

유심히 그녀의 머리 위에 나 있는 서큐버스의 산양 뿔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몸 상태는 어떠니? 현이의 말로는 흡정을 통해서  몸으로 많은 양의 힘이 흘러 들어갔다고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릴리는 전신의 피로가  가시고, 상쾌한 기분이 드는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자신의 몸 안에 가득 차 있는 신비한 기분을 느끼고 은현에게서 받은 정기가 한데 모여 있는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어머…?”

자신의 아래 복부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붉은색의 빛을 밝히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건….”

“흐응. 거기가  힘이 응집되어 있는 근원이구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일리아나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와릴리의 음문을 유심히 관찰했다.

‘…보통 악마랑은 다르네. 이것도 현이에게 종속되면서 나온 효과인가?’

릴리가 품고 있는 마력은 일반적인 악마들이 사용하는 오염된 기운이 아니다.
신력으로 정화되면서 깨끗하고 정갈해진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악마라니, 20년 전에도 이런 악마는 듣도 보도 못했다.
신의 힘의 일부를 뱃속에 품고, 용케도 살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반인반마(半人半魔)이기에 살아남을  있었던 걸까?’

아무튼 릴리의 악마로서의 성장은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릴리. 일과에 2시간 정도 비워둬.”

“네? 네.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현이와 함께 연구해보자. 네 힘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

“아….”

릴리는 작게 탄식했다.
이내 의욕적으로 변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지금껏 입었던 은혜와 자신의 마음을 보답할  있는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열심히 할게요!”

◆ ◆ 

   만에 다시 열린 궁정 회의장.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회의의 주제는 1주 전에 끝난 ‘모그라프 변경에서 일어난 스탬피드의 후속조치’였다.
이전과 비교해서 궁정 회의장의 구성이 달라진점은, 이번 회의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모그라프 백작의 참여다.
대규모 마수들의 침략은 막아낼  있었지만.
이후 파손된 철벽의 보수작업과 함께, 싸움으로 인해 급격히 감소한 물자들, 인력난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변경 요새의 책임자인 모그라프 백작의 회의 참여는 필수였다.
당연히 마수들의 침략을 막아낸 공적을 치하하고, 소모된 변경 요새의 보수작업은 왕국의 입장에서도 반드시 지원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보리스 후작.”

“예. 왕비마마.”

“현재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이 얼마나 되나요?”

“운용할  있는 예산은 약 백금화 1,500닢입니다.”

일의 중요도를 파악하고, 미리 조사를 해둔 부분이었기에 재무장관은 디아네 왕비의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있었다.

“…일단 800닢으로 변경 요새의 재건에 힘을 쏟도록 하세요. 3개월 뒤, 변경의 상태를 보고 다시 논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왕비마마.”

생각보다 부드럽게 왕실의 지원을 얻을  있게 된 것에 모그라프 백작은 예를 갖추어 왕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후부터는 수도에서모그라프령으로 지원을 나갔던 인물들의 포상의 수위를 결정하는 안건이 이어졌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거론된 인물은 당연, 유리아 왕녀와 리오드다.

“유리아 왕녀.”

“예. 왕비마마.”

왕가의 일원이지만, 공식적으로 후비의 딸인 유리아는 불편한 내색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디아네 왕비의 부름에 응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하도록 하세요.”

평소였다면 궁정 회의장에 참석할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 유리아는 이번 지원 원정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적으로 변경 요새의 수비를 지휘하면서 요새를 지켜내는데 일조한 공신 중 하나.
그녀의 공적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귀족들이 수두룩하다 하더라도, 없던 것으로 가릴 수는 없었다.

“……?”

하지만, 말만 한다면 웬만한 것은  들어주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디아네의 말에 유리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어딘가 굉장히 지쳐있거나, 세상을 다 산  같은 표정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독기가 서린 왕비의 모습은 진즉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
유리아는 독기가 다 빠져 지쳐있는 왕비의모습을 응시하며 고민했다.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도 될지를 한참이나 고민하고, 이윽고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후비마마와 2왕자를 데리고, 잠시 왕궁을 나가 있고 싶습니다.”

“와, 왕녀전하! 그것은!”

유리아의 말을 들은 회의장의 귀족들이 펄쩍 뛰면서 유리아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했다.

“왕가의 일원이 왕궁에서 지내지 않고 도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안 될 말씀이십니다!”

유리아는자신의 발언을 만류하는 귀족들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디아네 왕비를 응시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예상했던 디아네는 유리아의 발언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다가, 느닷없이 모그라프령의 지원 원정에 참가 의사를 밝힌 것부터가 순수히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라는 목적뿐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훈을 쌓음으로써 이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라는  또한 충분히예측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려는 거죠?”

“스승님에게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후비마마와 2왕자는…제가 돌보면서, 2왕자의 교육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알렉스를 바라본 유리아 왕녀의 시선의 의미를 깨닫고, 많은 귀족들이 아르미타스의 소공작인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보낸다.
현재 왕궁의 내부에는 후비와 2왕자인 에반을 지지하면서 왕세자로 옹립하려는 세력이 거의 없다.
헬레나 후비와 에반 왕자를 지지하고 있던 세력의 중심, 귀족파벌의 수장이 바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아브로스였기 때문.
아브로스가 아들인 애슈턴의 배임횡령 사건의 책임을 지면서, 군무장관의 자리를 사퇴하고 영지의 경영에 중심을 두기 시작한 후로, 귀족파벌의 쇠퇴는 시작되었다.
왕궁 내부에서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   상황에서, 유리아는 알렉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초강수를 둔 셈이다.
‘미래시’를 통해서 엿본 전개와는 전혀 틀린, 앞으로의 전개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유리아의결심이 보였다.

-당신에게 감추고 있었던, 아니,  남자 이외에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나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 시작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렉스는 깨달았다.
사전에 상의조차 내리지 않고 궁정 회의장에서 꺼내진 돌발 발언이었지만, 유리아와 눈빛을 교환한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나타냈다.

“그런…에반 왕자님의 교육이라면 좋은 교사를 선별해, 직접 왕궁으로….”

굳이 공작령에 왕자를 데려가서 교육을 시키겠다는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한 귀족의 발언을 유리아는 매정하게 끊어냈다.
한없이 단호한목소리가 회의장 내부에울려 퍼졌다.

“아니요.”

“좋습니다.”

건국 이래, 역사상 왕가의 일원이 혼인이나 외교적 일도 아닌, 사적인 이유로 궁정을 나가 외부에 몸을 의탁하겠다는 일은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담담하게 허락하는 디아네 왕비의 발언에 귀족들이 화들짝 놀랐다.

“왕비마마!”

“조용히 하세요!”

“크…!”

왕비의 노호성에 많은 귀족들이 몸을 움찔 떨면서 침음을 삼키고, 목구멍을 타고 바깥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

“다음, 올리비온 후작. 원하는 포상이 있나요?”

“아르티아 단원의 확충과 시설의 보수를 건의 드립니다. 단, 이것은 제 개인의 공훈으로 부탁드리며, 단원들의 포상은 별도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후작 이상의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리오드는 오로지 자신의 기사단의 ‘강화’를 건의해왔다.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왕비의 말에 이어,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안건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무난한 회의가 드디어 끝을 보게 되자.

“이번 회의는 여기까지….”

“왕비님. 한 가지 건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죠?”

종료를 선언하려는 디아네 왕비가 말을 마치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몇몇 귀족들이 알렉스를 필두로 참석한 공작 가문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저 멍청이들이….’

무엇을 트집 잡으려는지를 깨달은 유리아가 마침내 인상을 찡그렸다.
순간 알렉스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은백색 머리카락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후우….”

‘결국  것이 왔군.’이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기대어 작게 눈을 감은 알렉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듯 보였다.
반면, 그의 뒤에 서 있던 은현이 ‘그래. 니들이 그냥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라는 생각을 얼굴로 표현하며 미소지었다.

‘저것들은 지금 지들의 미래를 알까.’

모를 것이라고 유리아는 확신했다.
그가 이 상황을 대비하여 무엇을 준비해왔는지를 알고 있다면, 절대로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트집을 잡으려고 나설 리가 없다.
결국 유리아도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상상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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