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280. 사역마의 마음(1)
“후우….”
오늘도 청소로 하루 일과를 마친 릴리는 곧장 자신의 노곤한 몸을 욕탕에 푹 담갔다.
따뜻한 물로 가득한 대욕탕 속에 전신이 잠기자, 노곤한 몸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을 맛보며 작은 숨을 토해낸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안의 구성원들과 자신이 먹을 식사를 차리고, 간단한 정리와 함께 점심부터는 던전 주택을 나와 공작령에 위치한 보육원으로 향한다.
은현의 주택에서 메이드로서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식사 준비와 설거지, 빨래 정도를 제외하면 주택 안에서는 해야 할 일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자신이 오기 전부터, 식사 준비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안일은 모두 은현이 도맡아 하고 있기도 했었고, 애초부터 정리를 안하고 사는 일리아나를 제외하면 집안 사람들은 모두 깔끔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편이었다.
“배려해주고 계신 거겠지.”
메이드의 일을 병행하면서, 보육원의 일을 도맡아 하는 등,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굉장히 살인적인 하드한 스케쥴이다.
이 집의 관리보다도, 보육원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신경을 쓰라는 배려의 의도는 고스란히 릴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릴리가 반인반마(半人半魔)로서 악마의 힘을 일부 이어받아 신체적인 피로가 경감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인 행운이었다.
“후으….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
한 번은 포기했던 자신의 인생이다.
감옥 속에서 함께 갇힌 아이들과 굶어 죽는 것을 각오하며 두 눈을 감으려 했던 순간.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과 아이들을 구원한 남자에게는 평생을 다 바쳐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은혜를 느끼고 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주인이 된 남자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릴리는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이 집에서 내가 제일 평범한 것 같은데.”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정상이 없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매우 특출난 의미로.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명성으로 자자한 고위자릿수의 마법사.
왕국의 고위 귀족 가문의 여식이자, 차기 성녀 후보로 내정되어 있는 귀족 사제.
신수라는 의미를 모를 힘을 품었으면서 모험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소녀.
마법이나, 신성력을 사용할 수도 없고, 물리적인 싸움도 못한다.
“게다가 신이라는 분도 계셨고.”
은현의 존재를 지금까지 떠받치고 있었던 여신의 존재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절반이 변이되어 악마로 전락하면서 손에 넣은 몽마의 힘뿐이다.
심지어 이것조차도 현재로서는 제대로 된 활용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용하려면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 조건은 지금까지 강제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악마의 특성을 릴리 스스로가 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은현이 종속을 통해 억누르고 있는 봉인이 풀려버린다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릴리의 모습은 예전처럼 서큐버스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악마로서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싶다고 은현에게 말을 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은현이 신혼 여행을 가면서 근 1년 동안 릴리가 혼자서 고민했던 문제다.
드르륵
그렇게 릴리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은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상태로 모습을 들어냈다.
“아.”
그대로 욕실로 들어오려던 은현이 대욕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릴리를 발견하고 작게 탄식한다.
“미안. 지금 좀 피곤해서, 있는 줄 몰랐네.”
“괘, 괜찮아요.”
“응?”
“괜찮아요. 씻으셔도.”
생각지도 못한 허락이 떨어지자, 은현은 침묵했다.
곰곰이 따져보면은 이 집의 주인인 은현이 종이나 다름없는 릴리에게 예의를 차리며 사양하려는 것이 모순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릴리는 살짝 녹초가 된 듯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현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 식사 이후 곧바로 들어가면서 끼니도 거르고 장시간 동안 이루어졌던 작업이, 지금에서야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리는 대욕탕 속에 푹 담근 자신의 몸을 일으키고 은현에게 다가갔다.
“목욕 시중, 들어드릴게요.”
“…….”
은현은 순간 아무리 자신의 사역마이자 메이드라지만, 릴리에게 이것을 부탁해도 괜찮은 걸까 고민했다.
차라리 아내인 일리아나나 엘레노아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맛보는 노곤한 피로감은 은현의 이성을 조금씩 무뎌지게 만들었다.
“…부탁할게.”
더 이상의 생각을 포기한 은현은 그대로 목욕 의자에 주저앉았다.
수건으로 여성의 중요 부위를 감출 생각도 없이, 릴리가 자신의 전라를 보이며 당당하게 걸어왔다.
릴리는 샤워타월을 물로 적시고, 특별히 제작된 바디워시를 듬뿍 짜내고 비비면서 거품을 만들어냈다.
샤워기를 작동시켜, 땀으로 젖어있던 은현의 전신을 따뜻한 물로 씻겼다.
[어떠하냐?]
‘제대로 동화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 자신의 영혼으로 제작된 열쇠가 흡수되면서, 열쇠의 존재가 본래 자신의 영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확인한 베르단디는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후우…. 다행이구나. 어쩔 수 없이 아이의 무모를 허락하기는 했다지만, 나는 아이가 다시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베르단디님.’
[왜 그러느냐?]
‘무모한 선택을 내리지 않고도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해야죠.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은현은 알고 있었다.
무리나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은현의 경우에는 필요한 일이며,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했을 뿐이다.
‘그래도 이번 도박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얻었어요. 적어도…제가 만들어낸 가설에 반즈음은 확신이 붙었으니까요.’
[…그 문제는, 우리 자매들끼리 의논을 해봐야 할 문제구나.]
‘부탁드릴게요.’
[알았다.]
베르단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큰 건 하나를 끝냈다 싶어서.”
“그러시군요.”
대화가 단절되자, 은현과 릴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건 것은 릴리였다.
“저는…주인님이 거절하실 줄 알았어요.”
“거절하기에는 지금 내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노곤한 피로감이 가득 쌓인 몸 상태도 몸 상태지만, 그 상태에서도 은현은 이번에 제작한 ‘열쇠’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나는 릴리쪽에서 그런 말을 해올 줄은 몰랐어.”
“주인님이 많이 피곤해 보이셨으니까요.”
“고마워. 신경 써줘서.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확실히 사양을 하며 선을 긋는 은현의 태도에, 등을 닦아주던 릴리가 잠시 멈칫했다.
“…제가 해드리고 싶었어요.”
“…….”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챈 은현이 침묵을 지켰다.
알몸인 자신의 앞에, 부끄러운 것을 필사적으로 감추면서 알몸으로 다가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려는 릴리의 태도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제가 싫으신가요?”
“그런 게 아니야. 어째서 네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이미 아내가 둘이나, 아니, 사실상 셋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상관없다.]
‘…베르단디님.’
[아이에게 저 악마 아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것은 다름 아닌 나다. 그런데 내가 어찌 반대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게다가 마녀 아이도 이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않느냐. 한 명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
일리아나는 이전에 엘레노아를 받아들이면서 한 명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평소에는 무심한 태도를 보이면서 아주 가끔 날카로운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 일리아나가 했던 날카로운 예언은 지금 이 순간도 은현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두 분은 알고 계세요.”
“실화냐….”
“저라면 괜찮다고 하셨어요. 애초에 제가 주인님께 해가 되는 여자였다면 이 저택에 들여보내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서 치워버렸을 거라고 말씀하셨는걸요.”
“하하….”
귀찮은 것은 그대로 밀어버리는 마녀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직설적인 표현이다.
“주인님, 제가 어떻게 노예로 팔려가, 그 흑마법사의 지하감옥에 있게 되었는지, 아세요?”
“아니,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은현은 릴리를 이곳으로 데려오면서,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어. 너를 죽이는 걸 망설였고, 거두어들였던 이유는 어린아이들이 너를 지키려 했고 잘 따를 정도로 선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어.”
“전 악마였는데요?”
“때로는 악마보다 더한 인간들을 죽였던 적이 있어. 네가 악마였다는 점으로 위험성을 고려하긴 했지만, 악마였다는 것 만으로 널 죽일 이유가 성립하지는 않아.”
은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생각보다 담담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놀랐다.
아마 400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구를 침략해오면서,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존재들을 용서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결정이 아니다.
4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서 악마보다 더한 인간들을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많은 아이들이 믿고 따랐던 선한 악마라고 하더라도, 릴리를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거두어준 선택을 해준 은현의 결정이, 릴리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커다란 구원이었다.
릴리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샤워타월의 거품을 등에 칠하고, 닦아내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자신의 수치를 입에 담았다.
“제 아버지는요. 저와 어머니를 노예시장에 팔았어요.”
“릴리. 그건….”
“아뇨. 주인님께서 들어주셨으면 해요.”
릴리는 손을 멈추고, 거품으로 칠해진 은현의 등에 살며시 이마를 가져다 대어 기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들으신 다음에는….”
우우웅
이 순간, 릴리가 은현의 종속에 의해 억압되어있던 악마의 특성을 개방시켰다.
그의 등에 기대었던 이마를 떼고, 몸을 일으킨 릴리는 목욕 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들어 올리고 천천히 은현의 앞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그녀의 본모습.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모습으로, 머리 위에 달린 산양의 뿔은 명백한 악마의 모습이다.
하지만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주위에 악영향을 끼치는 오염된 마나가 아닌, 성스러운 신력이 내포된 정갈하고 깨끗한 기운이다.
다름 아닌 악마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기운을 보유하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
이것은 더 이상 악마(惡魔)가 아닌, 성마(聖魔)라고 불러야 할 새로운 종족이 아닐까.
신의 사도를 주인으로 모시며 신력을 품게 된, 세상에서 유일한 악마는 마침내 고민을 끝냈다.
결심이 선 눈빛으로 담담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한 마음에 답을 내주셨으면 해요.”
1년 동안 고민하고 간직하며 정리를 마친 마음들을, 이제는 남김없이 모두 자신의 주인에게 전하기 위해, 악마는 행동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