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화 〉277. 반신의 무구 제작(1)
아침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아서 에린의 말을 들은 은현이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런 은현의 모습을 보고, 에린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화났어?”
이유가 어찌 되었건, 에린이 크라시르의 기사들을 때려눕힌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혹시나 자신의 충동적인 돌발행동으로 은현과 공작 가문에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모그라프령에서는 마수들과의 싸움으로 정신이 없던 한창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었지만.
뒤늦게 이제 와 생각을 해보니, 혹시라도 트집이 잡히지 않을까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음?”
“내가 멋대로 걔들을 때려서….”
“그걸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후회하고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에린은 자신의 행동이 불합리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럼 당당하게 있어.”
“하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뭐, 확실히 나라면 주먹을 쓰기 전에, 뒤탈이 나지 않도록 그놈들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구실과 방법을 모두 준비해두고 주먹을 썼겠지만.”
“으….”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끝을 맺는 것을 하지 못했다.
은현의 지적에 에린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래도 너한테 그렇게까지 무리한 요구를 바라는 건 아니야. 이번 일은 잘했어.”
“응?”
툭, 이마에 손을 얹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은현의 손을 느끼며 에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 현이가 겨우 그런 걸로 아가를 혼낼 리가 없잖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나도 알아.”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아래로 숙이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은현의 손길을 즐겼다.
“확실히…기사단장인 월터의 성격상,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죠.”
“그렇겠지.”
앞으로의 일을 약간 이나마 예측해본 엘레노아가 그것을 입에 담자, 은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신입 기사들이라고는 하지만, 서너 명이 동시에 덤빈 것도 모자라 19살의 소녀에게 깨져버렸다.
그것도 왕실을수호하고 있다는 명예와 책임을 지고 있는 기사단원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지않을 리가 없었다.
“미, 미안해…. 나 진짜로끝까지 참았는데…. 마지막에 너무 화가 나서….”
“괜찮아. 잘했어.”
그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다행히도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 엘레노아.”
“네."
"알렉스와 연락을 취해서 모그라프령에서 복귀한 타이밍에 맞춰 저택으로 방문하자. 하는 김에 에린의 문제도 같이 상담해보고 싶어.”
애초에 에린이 스스로 자신의 해프닝을 고백하기 이전에, 은현은 그 사실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모그라프령에서 복귀하기 이전에알렉스에게서 귀띔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모그라프령에서 왕국 병사들이 복귀를 하려면 대략 1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논공행상이나 포상의 수여식 등이 시작되는 건 한 2주 뒤가 되겠네.”
대략적인 시간의 계산을 마친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흑랑단에 연락해서 정보의 수집을 좀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우리도 조금 쉬자. 어젯밤에…고생했어.”
“후후, 네. 저도 너무 즐거웠어요.”
“…….”
기쁜 듯 홍조를 띄운 엘레노아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던 에린이 얼굴을 붉혔다.
“자, 그럼….”
“쉰다며? 어딜 가려고?”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현과 일리아나를 보고, 일리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방에 가려고. 여유가 있을 때, 만들어두고 싶은 게 있거든.”
“흐응. 알았어. 마침 나도 새로운 마법의 개발 쪽에 집중하고 싶거든.”
일리아나가 특정의 무언가에 흥미를 가지고,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스쿨드의 중개를 통해 직접은현과 권속의 계약을 맺으면서, 은현의 영혼과 이어진 일리아나는 마법사로서 한 단계 높은 경지를 향해 발을 들였다.
그 경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일리아나는 보기 드물게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릴리, 정리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베르단디님. 가요.”
“알았다.”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의 몸을 구현한 실체화를 풀어버리자, 베르단디의 몸이 연기처럼 흐트러지며 모습을 감췄다.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두 눈에는 다시 평소의 영체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에린과 릴리의 눈에는 느닷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에린의 경우에는 아직 무리인가.’
과거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신력들.
구미호에게는 그 여신의 가호의 존재를 깨닫고 베르단디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깨달았던 전적이 있었으나, 에린은 아직까진 그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도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대견하다는 듯 미소지은 은현은 이내 발걸음을 옮겨 지하로 향했다.
“아, 맞다!”
은현의 뒷모습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에린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해 이전에 은현이 선물했던 레이피어를 꺼내어 쥐고는 급하게 지하를 향해 내려가 은현의 뒤를 따라갔다.
“현아!”
“에린?”
“그, 그게….”
지하 공방에 내려오자마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얼굴을 붉혔다.
‘아, 안돼. 정신 차리자.’
자꾸 의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다지며, 어젯밤 자신이 두 눈과 귀로 들은 것을 애써 잊으려 노력했다.
이윽고 급하게 은현을 따라온 이유를 입에 담았다.
“이거! 이 검! 도대체 뭐야!?”
“무슨 문제 있었어?”
“너, 너무 좋아서 문제야!”
식은땀을 흘리며 양손에 꼭 쥔 레이피어의 정체를 캐물었다.
“그리고 이 검 갑자기 싸움 도중에 뽑을 수 있게 되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제는 뽑을 수 있게 되었지만, 검의 성능부터 시작해서 뽑을 수 없었던 이유나 갑자기 뽑을 수 있게 된 이유 등, 묻고 싶었던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새삼 이 검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때문인지, 구미호에게 굉장히 많은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레반테인은 네가 신수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효과를 부여해서 제작한 검이야. 그러고 보니 이번 변경 요새에서 그 검을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사용해보니 어땠어?”
“레반테인?”
“그 검의 이름.”
“아…. 대, 대단했어! 아, 그러고 보니.”
그때의 전장에서 아홉 명의 백귀들을 모조리 소환시킬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에린이 이 검을 뽑게 된 순간부터였다.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구미호의 힘을 증폭시켜주는 무기라니.
오직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무기나 다름이없다.
“역시…현이는 대단해!”
에린은 눈을 빛내며 존경을 비롯해,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은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째서 뽑을 수 없게 만들어둔 거야? 갑자기 뽑을 수 있게 된 이유도 모르겠어.”
“검에 신수의 힘을 불어넣지 않으면 잠금장치가 풀리지 않는 식으로 봉인을 해두었으니까.”
“…응? 하지만 난 미호의 힘을 제대로 사용해본 적도 없었는데?”
순간 발걸음을 멈춘 은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린을 쳐다보았다.
“그분을 그냥 이름만으로 불러?”
“응? 그러면 뭐라 불러야 하는데?”
“…아니야.”
1,000년의 시간을 목표로 수행에 마쳐 어마어마한 힘을 축적시킨 영험한 동물.
하계에서 가장 하위신의 발끝에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신수를 ‘님’자도 붙이지 않고 친구 부르듯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지적을 해줘야 할까, 은현은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지적을 하여 고치려고 했다면 진작에 고칠 수 있었을 문제다.
자신을 대하는 에린의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다면, 구미호는 에린에게 그것을 고치라고 했을 터였다.
에린이 몇 번을 말해도 들어먹지를 않는 답답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은현은 모르고 있었다.
적어도 은현의 시점에서는 에린은 자신이 내린 숙제를 꾸준히 노력해서 성실하게 해결하는모범생과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이쁨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소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은현에게는 현재 구미호와 에린의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이내 은현은 에린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네가 방출하는 신수의 힘의 밀도가 더 높아져서, 자연스레 쥐고 있던 검으로 마력이 흘러 들어간 거겠지. 지금까지 뽑지 못했다가 갑자기 뽑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네가 전개한 마력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다는 뜻이고.”
“그럼 갑자기 내 힘이 상승했던 원인은….”
“아마 신수님께서 도와주셨던 게 아닐까?”
“아.”
에린은 머릿속으로 그때 구미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이번 일은 좀 기특하니, 특별히 칭찬해주도록 하지.
그와 동시에 자신의 힘이 갑작스레 증폭되기 시작했었다.
일련의 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원인을 파악한 에린이 감탄한다.
“미호는 정말 대단한 거였구나!”
[…시끄럽다.]
‘응? 왜 그래?’
[…….]
구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칭찬을 힘을 증폭시켜주면서 검을 뽑도록 도와줬을 때 해주었더라면 모를까.
은현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던 당시, 자신에 대한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에 대한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배은망덕한 것. 어찌 나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도하지 않고.]
심지어어째서 지금 자신이 화가 난 것인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에린은 그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검에 봉인을 걸어두었던 이유는 그건 네가 그 검의 성능에 너무 의존하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이야.”
“아….”
“에린이 검을 뽑을 수 있는경우는 내 예상으로는 두 가지였어. 첫 번째는 신수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조절 할 수 있을 만큼, 에린의 실력이 눈에 띄게 상승한 경우. 두번째는…신수님의 도움으로 마력의 출력량을 일시적으로 증가시킨 경우. 뭐, 두 번째 방법은 좀 편법이기도 했지만, 네가 신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방법이니까.”
은현은 흘끗 에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뽑히지 않았던, 갑자기 뽑힌 이유를 묻는 건, 지금은 뽑을 수 없기 때문이지?”
“으….”
정곡을 찔린 에린이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이 말한, 레이피어를 뽑을 수 있는 조건을 들은 에린은 어째서 다시 검을 뽑을 수 없게 되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아직도 내 수준이 너무 낮다는 뜻이구나….”
“그렇지. 적어도 지금의 네 수준으로는 신수님의 도움 없인 그 검을 뽑을 수 없다는 뜻이야.”
“하아….”
에린은 맥이 빠진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많은 노력 끝에 자신은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은현이 상정하고 있던 성장에는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에게 쏟아주는 관심과 정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상냥하지만, 그만큼 많은 부담을 지우게 한다.
“현이의 기준은 너무 높아….”
“너무 풀 죽지 마. 편법이었다고는 하지만, 네가 신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 또한 하나의 성과이고 성장이니까. 게다가 나는 네가 스스로 검을 뽑게 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을 3년 정도로 생각해두었어.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네가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니야.”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해주었지만, 그 위로에도 불구하고 에린은 입술을 삐죽였다.
“3년 뒤에나 쓸 수 있는 무기를 도대체 왜 먼저 준 거야….”
“그거야말로 이번의 경우와 같은 편법을 기대했기 때문이지.”
은현의 또 다른 목적은 바로 구미호가 에린을 돕도록 유도하는 것.
구미호는 은현의 그 의도를 꿰뚫어 보고, 감히 자신의 행동을 조종하려고 했다는 것에 괘씸하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도 은현의 의도에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그 결과 에린을 나름의 방식으로 돕고 있는 구미호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한 번 그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신수님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성장해봐.”
“…항상 나한테힘든 숙제만 내줘.”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신수님의 힘에 대한 건 나도 뭐라고 조언을 해줄 순 없지만, 네 곁에는 나 말고도 좋은 선생님이 있잖아.”
“미호는 항상 나한테 화만 내는 걸….”
“신수님이? 어째서?”
“몰라. 맨날 날 무시하고 가시 돋친 말로 내 마음을 자꾸 긁어대. 진짜 속이 좁아.”
[이 괘씸한 것이…? 자기가 하는 행동은 생각도 안 하고, 어디서 되도 않는 정치질을….]
울상을 지으며 은현에게 하소연을 에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다.
구미호의 입장에서는 은현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조차 없기 때문에, 대놓고 벌이는 에린의 앞담에 변명조차 할 수가 없어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처음 신수의 힘을 각성했을 때처럼 에린의 몸을 빼앗아, 은현의 앞에서만 내숭을 떠는 에린의 본모습을 까발리고 싶었지만, 나약하고 소심했던 과거와 달리 성장한 에린의 몸을 빼앗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신수님께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서 너 하나뿐일 거야.”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중립을 지켰다.
“그래도 신수님도 너를 인정하고 계실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리도 없었을 테니까.”
“어? 생각해보니 그렇네. 아! 그래! 미호는 아닌 척하면서 사실 나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전혀 틀렸다! 이 멍청한 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