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6화 〉276. 여신의 반려(2) (276/730)



〈 276화 〉276. 여신의 반려(2)


“에린, 미안하지만 옷장에서 내 속옷 좀 꺼내다 주지 않을래?”

“네, 네….”

같은 여자가 보아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체를 드러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엘레노아의 부탁에 에린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옷장은 가운데 쪽이야.”

문을 열고 안에 있는 속옷 한 세트를 꺼내어 엘레노아에게 건냈다.
속옷을 받아들인 엘레노아는 입고 있던 고간 사이가 찢어진 스타킹을 벗고 속옷을 착용했다.
이후 네글리제를 입고는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하~암. 아가는  잤니?”

“그, 그럼요….”

솔직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젯밤의 기억은 그만큼 강렬하기 짝이 없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새벽에 일리아나에게 몸을 잔뜩 만져지고,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지하를 빠져나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욱신거리고 뜨거운 신체의 내부는 진정을 시키려고 노력해봐도, 시간이 지날수록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 애써 잠을 청하려고 해봐도 잠은 오지 않았다.
결국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일리아나가 만졌었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기억해내고는 그 움직임을 따라 하면서 자신의 몸을 만져 위로했다.
그러다가 아침을 맞이한 에린은 한숨도 자지 못해 밖으로 나왔으며달아오르는 신체를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지하 훈련장에서 몸을 풀다가, 내려온 은현과 대련을 했던 것이다.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에린의 반응을 보고, 일리아나는 소녀가 단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음을 확신했다.

“후후, 아가는  귀여운 거짓말을 하는구나?”

“힛…!?”

뒤에서 에린의 몸을끌어안고는 요염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에린의몸을 쓰다듬었다.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움찔 떠는 에린의 반응은 너무나도 솔직했다.

“오들오들 떠는 게 귀엽네.”

에린의 반응을 즐긴 일리아나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야한 백허그를 풀어주었다.

“흐아아….”

일리아나에게서 해방이 되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머, 에린. 괜찮니?”

“괘, 괜찮아요.”

느닷없이 에린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자, 환복을 마친 엘레노아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에린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자, 가자. 아침 먹으러.”

“네에….”

에린은 앞서 걷기 시작하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뒤따라 안방을 나왔다.
이윽고 지하에서 걸어 올라오는 은현과 그의 손을 잡고 안내를 받아 천천히 올라오는  여성을 발견했다.

“어…? 누구…?”

분명히 지하실에는 자신과 은현밖에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모르는 에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아름다운 금발 여성의 등장에 놀란 것은 에린 뿐만이 아니었다.

“누, 누구시죠?”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 던전 주택을 관리해왔던 메이드인릴리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부외자의 모습에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이 집에 누군가가 침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호의적인 은현의 태도와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적대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큰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려고 했지만.

“어…일단 소개할게. 내가 모시고 계신 여신님이야.”

“…여신?”

“신?”

엄청난 큰일이었다.

“혀, 현아. 진짜로 신님처럼 엄청 아름다운 분이시긴 한데, 여신님이시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미숙한 것! 무릎을 꿇어라!]

‘…응?’

다급하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구미호의 말에, 에린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분은 진짜다! 진짜 여신이시란 말이다!]

한차례 은현의 복부를 손으로 관통시켜 치명상을 입히면서, 에너지 드레인을 통해 은현의 기억을 읽어 들였던 적이 있었던 구미호는 은현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여신의 모습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에린은 다급한 구미호의 어조 속에서 진심을 읽어내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아, 안녕하세요!”

“…음?”

느닷없이 튀어나온 인사에 베르단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는 어째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냐?”

“아~아무래도 에린의 몸속에 있는 신수님이 베르단디님을 알아보신 것 같은데요?”

대강의 경위를 눈치챈 은현이 설명하자, 베르단디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지, 진짜로 신…님이신가요?”

다급히 에린을 따라 릴리까지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하려고 하자, 베르단디가 급하게 그것을 제지하며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그,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지금의 나는 신으로써의 기적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이며, 아이들에게 그것을 바라고 하계에 현신한 것이 아니다.”

“그, 그럼…?”

‘신’이라는 애매모호  개념의 존재가 느닷없이 앞에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할지 제대로 방침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에린과 릴리는  상황이 너무나도 당혹스럽기만 했다.

“으, 으음…지금은 그냥….”

베르단디는 뭐라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맞잡고 있던 은현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아….”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에린과 릴리가 바보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미호는 에린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신이 인간과 맺어지다니….]

그런 사례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광경이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것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으음, 뭔가 나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을 만한 수단이 없는 게 곤란하구나.”

이윽고 베르단디의 몸이 스르륵 사라지며 모습을 감추더니.

“이러면 믿을 수 있겠느냐?”

“읏!?”

갑작스레 에린과 릴리의 뒤에서 말을 걸어오는 여신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정말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겨우 이것뿐이라, 애석하구나.”

애초에 신으로써의 위엄을 보이고 그에 대한 대우를 받을 생각이 없었던 베르단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베르단디님. 결국 결심을 하셨군요?”

“아이가나를 설득해서 말이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심지어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에린이 두 아내들에게 물었다.

“두 분은…알고 계셨었어요?”

“응.”

“우리는 베르단디님이 예전부터 보였거든. 이번 신혼여행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

계속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뭐했던 은현은 요리가 준비된 식탁을 바라보며 일단은 식사를 시작할 것을 권했다.

“일단은 아침부터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릴리, 식기를 한 세트  준비해줄 수 있겠어?”

“아,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손님용으로 준비해두었던 의자를 하나 더 꺼내어, 배치하고 가장 베르단디에게 권했다.

“고맙구나.”

미소지으며 베르단디가 자리에 앉고는, 곧장 수저를 들어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맛있구나.”

“화, 황송합니다….”

하계에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아주 간단한 칭찬이었지만, 그 칭찬은 사람도 아닌 신의 칭찬.
직접 요리를 했던 릴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복잡한 얼굴로 베르단디에게 답했다.

“후후, 그렇게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신으로써 추앙받기 위해 하계에 내려온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냥…아이의 반려로서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서 온 것이지. 그리고….”

베르단디는 에린과 릴리를 응시하며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잘 자라주었구나. 아이를 되살리고, 설득했던 보람이 있었어.”

“엇…?”

“네…?”

에린과 릴리가 당황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두 사람에게 설명을 돕기 위해서 은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두 사람을 구하도록 나를 그 방향으로 유도하신 분이 바로 베르단디님이셔.”

은현이 에린을 거두어들인 시기는, 사망 이후 부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릴리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악마를 종속시키는 선택지와 방법을 제시하면서 설득하는 것으로.
은현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얼굴을 굳혔다.

“현이가…한번 죽었었다고요?”

“응. 한번 죽었었어.”

에린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일리아나였다.

“내 앞에서 싸늘한 시체가 돼서 내 마음도 듣지 않고 그렇게 가버렸지.”

“미안하대도.”

곱게 눈을 흘기며 은현을 노려보는 일리아나의 시선에는 더 이상의 원망이나 분노, 짜증 같은 시선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해야 해. 알아들어? 이건 평생 용서해줄 수 없는 죄야.”

“알았어.”

절대로 용서해주지 않겠다는 선언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일리아나는 에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현이가 부활한 건 아가의 덕이 있기도 하네.”

“제, 제가요?”

느닷없이자신이 지목되자, 스프를 떠먹고 있던 에린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현이가 부활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가를 구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니까. 그렇지 않나요. 베르단디님?”

“그렇지. 나는 신수 아이에게 벌어지는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아마 내 아이가 신수 아이를 거두어들이지 못했다면, 지금만큼이나 상황이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유리아의 미래시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가 있었다.
만약 에린이 은현을 만나 거두어지지 않았다면.
서큐버스와 조우하여 부추겨진 끝에, 각성한 신수의 힘을 폭주시켜 페르닌을 불바다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이의 부활과 누리지 못했던 행복’이었지만, 부차적으로는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는 미래를 바꾸기 위함’이라는 의도도 존재했다.”

그리하여 부활한 은현이 에린을 거두어들이고, 서큐버스의 부추김에 넘어가지 않았다.
폭주하여 분노의 불길을 페르닌와 페르니아스 왕국을 향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유리아가 알고 있던 ‘확정된 미래’에서 크게 벗어나게  첫 번째 분기점이다.

“제가 페르닌을 불바다로…. 도저히 믿기 지가 않아요.”

하지만 ‘만약 자신이 은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을 해본다면.
 누구도 자신을 편들어주고, 보호해주지 않는 상황.
아이테르에서 이어지는 학대를 계속 받은끝에 무너진 자신의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증오가 정말로 페르니아스 왕국에 향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대화의 흐름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요….”

릴리는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이라는 존재도, 한번 죽었다가 되살아났다는 기적을 실현시키고 있는 존재도, 믿기 힘든 것이었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악마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몸과 영혼을 종속시켜 조건부로나마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려준 은현에 대한 정체는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인 점을 제외하면 일반인에 불과했던 릴리에게는 거기까지 생각하는  한계였다.
신의 존재라는 것이 화제에 오르면서 단번에 커져버린 스케일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일단 릴리는 이야기 속에서 은현에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 존재가 베르단디라는 사실만을 직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감사드립니다. 여신님. 여신님과 주인님 덕분에…저는 물론이고, 저와 함께 실험체로전락했던 그 아이들은 지금 나름대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방법만을 제시했을 뿐이지, 결론을 내린 것은 아이이다. 게다가 지금의 행복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은몽마 아이의 노력의 결실이니, 과도한 감사는 필요없다. 그리고…가능하면 나는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구나….”

“제가 어떻게 신님의 이름을….”

“나의 정체는 비밀로 해야 한다. 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여신이라고칭하여아이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현명하다.”

“알겠습니다.”

“뭐어, 대강의 이야기는 이렇게 일단락이 되었고. 현아, 앞으로는 어쩔 거야?”

“아마 2주 뒤즈음에 논공행상의 자리가 열릴 거야.”

스탬피드를 성공적으로 막는데 공헌한 이들 중 포상의 수여여부나, 모그라프령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지원정책 등 마수와의 전쟁 이후의 뒤처리를 의논하기 위한 궁정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저어…현아. 사실  하나, 고백할 게 있는데….”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에린이 이윽고 모그라프령 지원 원정 도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1655756173317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