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269. 재회, 복귀(2)
“그럼 엘레노아와 함께 먼저 장…인 어른을뵈러 저택으로 찾아갈게.”
엘레노아의 아버지인 아브로스의 새로운 호칭을 입에 담은 은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 알았다.”
피식 미소지으며 은현의 말을 들은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말을 받았다.
“어색하다면 굳이 애써서 호칭을 바꿀 필요는 없다. 아버지도 너에게 그런 걸 강요할 생각은 없으시니.”
“맞아요.”
엘레노아도 미소지으며 똑같은 생각을 전하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불러야 할 호칭이야.”
은현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짓던 엘레노아는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그의 말에 답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는 기뻐요.”
“아버지에게는 나와 공작령 병사들의 소식의 전달을 부탁하지. 휴식을 마치고 사흘 뒤에 바로 복귀하겠다는 말도 함께.”
“알았어.”
알렉스와 앞으로의 일정을 대강 상의한 은현은 일리아나의 텔레포트를 통해서 먼저 모그라프 변경을 떠났다.
자신이 이끌고 온 사병들과 모험가들을 책임져야 하는 알렉스는 오랜만에재회하는 여동생과 함께 복귀하지 못했다.
요새의 수비전이 끝난 뒤로 사흘이 지나고, 텔레포트를 통해서 공작령으로 들어온 은현은 데르킨과 앨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곧바로 에리스를 맡겼던 보육원으로 갈게.두 사람이 당분간 머무르게 될 여관도 수소문해봐야 하니까.”
“아, 그건 제 쪽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형님. 제가 머무르고 있는 여관이 있거든요. 그쪽에 방을 미리 잡아두도록 할게요.”
“보육원의 안내는 내가 하도록 하면 될 것 같군.”
“엘빈? 네가?”
직접 데르킨과 앨리스를 안내하겠다고 나서는 엘빈의 행동에 은현이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에리스가 데리러 올 때, 꼭 내가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더군.”
자신을 데리러 올 때는 꼭 엘빈이 자신을 데리러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어린 하프 엘프의 생떼를 이겨내지 못한 엘빈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크흑…. 에리스는 어째서 내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엘빈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에리스의 말이 크나큰 상처였던 데르킨이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중얼거린다.
“에린하고는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아도 괜찮겠어?”
은현이 자신의 등에 업혀서 곤히 잠들어 있는 에린을 지목하며 엘빈에게묻자, 엘빈이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렸다는 듯 인상을 팍 썼다.
“…이미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나한테 쓸데없는 경쟁심을품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네가 해결해라. 어째서 나한테 그 불똥이 튀어야 하는 거지?”
은현의 기사를 자처하며 주종의 서약을 맺은 충실한 정령이 되었다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상한 경쟁심을 불태우며 자신을 질투하고 있는 여동생의 불똥은 불합리함 그 자체였다.
“……?”
“후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은현과, 알고 있는 엘레노아의 반응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다.
“아무튼 지금 에린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으니, 너에게 맡기지.”
엘빈은 여동생이 자신을 만났을 때와 은현을 만났을 때의 차이가 확연히 다른 것을 가지고 일말의 서운함도 느끼지 않았다.
“그럼 은현님. 일리아나님. 저희도 나중에 따로 찾아뵐게요.”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푹 쉬십쇼!”
그렇게 엘빈과 제라드, 엘프 부부가 자리를 떠나자, 영지 내의 길거리 위에는 잠들어 있는 에린과 에린을 업고 있는 은현, 그리고 두 아내들이 남았다.
“그럼 바로 이동한다?”
“응.”
“네.”
또다시 한번 텔레포트를 발동시켜 던전주택으로 들어온 은현과 일행은 1년 만에 집으로 귀환한 집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하아~오랜만의 집 공기.”
도저히 던전 내부에서 맡을 수 없는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미소지은 일리아나가 이제야 1년이라는 장기간의 신혼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깔끔한 메이드복을 입은 인형들이 양 옆으로 나란히 서며 줄을 만들었고, 그 가장 끝에서 릴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세 사람의 귀환을 반겼다.
“릴리도 요 1년 사이에 완전히 메이드 같아졌네?”
“그동안, 공작 저택의 메이드장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 걸요.”
우아하며 다소곳한 태도로 일관하며 답변하고 있는 지금의 릴리의 태도는 굉장히 프로의식이 투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정열적으로 구혼을 해왔던 제라드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짜증을 냈던 장면과의 괴리감에 에린이 쓴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밀리아는?”
“아…에밀리아는 지금 그…지하 공방에서 아직도 작업을….”
“한창 옵티머스를 시험 조작해보고 있는 중인가.”
“네.”
“특별한 일은 없었고?”
“딱히 특별한 일은….”
“이 주택에 관한 걸 물어보는 게 아니라, 공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본 거야. 가령 네가 데리고 있던 아이들이 있는 보육원의 상황 같은 거.”
“아….”
릴리는 의외의 말을 들었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육원만을 지어주고, 어느 정도의 지원만을 약속해준 이후로 딱히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은현이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웬만한 정보는 이미 흑랑단을 통해서 보고를 받고는 있었지만,보육원의 일을 릴리에게서 직접 듣는 것도 중요한 의견 중 하나다.
“덕분에 아이들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네.”
“최근에는 에린이 모험가길드에서 얻은 수입으로 빵을 사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적도 있었고요.”
“에린이?”
“네.”
“으응…현아아….”
등에 업혀서 양팔로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에린을 보고 있자니, 은현은 헛웃음이 나왔다.
“많이 피곤했나 봐요.”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뛰어다녔으니.”
은현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들어 있는 에린의 모습을 바라본 두 아내들이 미소를 지었다.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며 쓸어 내려주는 일리아나의 손길에는 소녀의 성장에 대한 대견함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마수들과의 교전은 물론, 수비전이 끝난 이후에도 쉴 틈 없이 바쁘게 뛰어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껏 쌓여있던 피로가 한 번에 물밀 듯이 몰려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바로 에린부터 방에 옮기도록 할게.”
◆ ◆ ◆
“으응….”
푹신한 침대 속에 파묻혀서 몸을 뒤척이고 있던 에린은 이내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이네? 언제 왔지?”
익숙한 침대 위에서 잠이 깬 것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잠이 들었던 것은 위급한 부상자들의 케어를 마치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긴장이 탁 풀어졌던 것까지는 기억이 존재했다.
[지쳐서 체력이 다한 끝에 쓰러졌지.]
“아…그랬어?”
[스스로의 체력 분배도 하지 못하는 미숙한 것이…쯧. 아직도 멀었군.]
“꼭 걱정을 해줘도 그렇게 가시가 돋친 말로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내가 걱정을 했다고?]
“응? 아니야?”
[하! 누가 누구를? 내가 너를 말이냐? 언제, 어떻게, 어디서, 왜 걱정을 해야 한다는 거지?]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또 화를 내….”
에린은 느닷없이 말의 템포가 빨라지면서 필사적으로 부정을 하려는 구미호의 태도에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그냥 걱정을 했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쓰러지지 않도록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충고를 해주면 영혼의 반쪽이라도 떨어져 나가기라도 하는 듯 시끄럽게 군다.
“아, 목말라….”
요새에서도 제대로 된 수분의 섭취를 할 여유나 정신도 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인지, 잠에서 깨자마자 심각한 갈증을 느꼈다.
시계를 보아하니,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 모두가 잠이 들어있어야 할 시간이다.
에린은 모두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주방에서 컵을 하나 꺼내와 물을 따르고는, 그대로 벌컥 들이키며 몸속에 퍼져있는 극심한 갈증을 해소시켰다.
“후우…. 응?”
작게 숨을 내쉬고는 물 한잔을 따른 다음, 그대로 방안으로 가지고 가려는 찰나.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열려있네?”
이 새벽에 평소에는 열려있지 않아야 할 문이 열려있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누가 아직 깨어있는 건가?”
생각해보면 은현과 두 아내들이 복귀했음에도, 변경 요새에서는 각자의 맡은 바의 일을 처리하느라 1년 만에 쌓인 대화를 제대로 나누어볼 여유조차 없었다.
“현이인가?”
지하에 설치된 공방을 이용하는 사람은 웬만하면 은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리아나는 은현의 작업을 도우면서 자주 드나들긴 했지만, 은현이 부탁을 하지 않으면 구태여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수동적이다.
엘레노아와 릴리의 경우에는 아티팩트의 제작이나 공방에 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에린과 마찬가지로 지하에는 잘 접근하지 않는다.
에밀리아와 인형들의 경우에는 지하 공방이 자신들의 집이나 마찬가지이며, 사람이 아닌 인형들이기 때문에 논외.
“한번 내려가 보자.”
누가 지하 시설을 이용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에린은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헤헤, 현이면 깜짝 놀래켜줘야지.”
아직 1년 만에 재회하면서 가득 들뜬 마음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에린은 헤실헤실 웃으며 은현과 대화하는 것을 기대했다.
이내 지하 공방으로 들어온 에린은 굉장히 조용한 내부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잖아?”
그냥 은현이 지하 공방을 들렀다가문단속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현이도 참…드물게 이런 실수를….”
깜빡하고 문단속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럴 수 있겠다 싶은 흔한 실수 중에 하나지만, 그것을 평소에 잘 실수를 하지 않는 은현이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아아앗!”
“…응?”
익숙한 여성의 비명 소리에 에린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건…엘레노아님의 목소리?”
조심스레 오감을집중시켜,엘레노아의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공방의 가장 안쪽 깊숙한 곳, 반쯤 열려있는 비밀의 방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흐, 흐으읏….”
“좋아?”
“좋아…좋아요…. 흐아앗!”
발걸음을 옮길수록 엘레노아의 비명은 점차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
그 비명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아닌, 황홀함이 가미된 교성이라는 것을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설마…?”
도대체 자정이 넘는 시간에 지하 공방에 마련된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엘레노아가 저런 기분 좋은 교성을 토해내는 것일까.
상황을 눈치챈 에린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을 삼키고 방안을 훔쳐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구미호 또한 에린과 비슷한 타이밍에 눈치챈다.
[미숙한 것. 그냥 돌아가라.]
“…….”
에린은 구미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차 이루어진 설득에도 불구하고, 방 안의 상황에 정신이 팔린 에린은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에린은 반쯤 열려있는 비밀스러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가져다 대며,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흐아앗!”
“…흡!?”
내부의 상황을 훔쳐보고만 에린은 큰 충격에 빠졌다.
깜짝 놀라 숨을 토해내려는 자신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는다.
‘두, 두두두둘이서 도대체 뭐를…!?’
[이 멍청한 것….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