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268. 재회, 복귀(1)
변경 요새를 침략해온 마수의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요새를 지켜냈다는 뜻에서 의미가 있는 말이었지,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된 끝에 만들어진 결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과연 이것을 ‘성공적’이라는 단어로 포장을 할 수 있는 말인지, 에린은 의문이 들었다.
“에린! 다음은 이 사람이야!”
“네!”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에린은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요새의 수비전은 끝났음에도 해야 할 일은 산처럼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처리해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의 이송이었다.
그중에서 제일 강렬한존재감을 뿜어내며 사람들을 지휘했던 것은 이 요새의 가장 높은 책임자인 모그라프 변경백도, 지원군을 이끌고 온 알렉스나 마찬가지이자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녀인 유리아도 아니었다.
“위급한 중상자들을 최우선으로 들이세요!”
“예!”
목청을 높이며 소리친 엘레노아의 목소리를 들은 수많은 병사들이 힘차게 대답하며 몸을 움직였다.
“아, 아르미타스 공녀님! 부디 이분을 먼저…!”
황급하게 기사 하나가 엘레노아에게 자신의 등에 업힌 다른 기사를 진찰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기사의 등에 업힌 환자의 상태를 살핀 엘레노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이시나요?”
“하지만 이 분은 왕국의 고위 귀족의…!”
“그 정도로 안 죽으니까 괜찮아요! 중상자들의 케어를 마친 뒤에 봐 드릴 테니 기다리세요!”
상태를 살펴야 할 중상의 환자들이 잔뜩 쌓여있는 상황에서, 신분의 무게를 우선시하면서까지 경상자들을 살필 여력이 없던 엘레노아는 신경질적으로 기사에게 소리쳤다.
“이, 이분이 잘못되시면 공녀께서도…!”
“내가 책임지지.”
“소, 소공작 님….”
엘레노아와 기사의 실랑이 사이에 난입한 알렉스의 목소리를 듣고 기사의 안색이 굳어져 갔다.
과거에는 같은 크라시르 기사단의 소속이었던 전 동료와의 재회는 전혀 반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드라이한 반응으로 알렉스가 대응했다.
“…오라버니.”
“가라. 너는 네 할 일을 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엘레노아는 알렉스의 도움으로 자리를 뜰 수 있었고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상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알렉스는 전 동료였던 기사를 응시하고는 그의 등에 업혀있던 다른 기사의 상태를 눈대중으로 살폈다.
“보아하니, 심한 부상은 아니군.”
“그것은 소공작께서 결정하실….”
“진짜 심한 부상이란 건 저런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
몸을 틀어 옆으로 비켜준 알렉스가 요새 내부로 급하게 이송중이던 중상자들을 가리켰다.
팔다리가 절단되고, 피부가 찢어져 내부에서 부러진 뼈가 돌출된 상태의 끔찍한 광경들.
“팔다리가 멀쩡하고, 겨우 살갗이 찢어진 정도로 인생이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적어도 다리를잃고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팔을 잃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될 사람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젠장!”
기사는 그렇게 욕을 내뱉으며 등에 업은 다른 기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여 요새 내부로 이동했다.
“훌륭해졌네요.”
“왕녀님. 고생하셨습니다.”
유리아는 알렉스의 말에 가로저으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아뇨. 저는 요새 위에서 마법만을 사용했을 뿐인 걸요. 진짜 고생은 직접적으로 마수들과 교전을 벌이신 병사들에게 하셔야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고생’이라는 단어가 팔다리를 잃고 사경을 헤매는 병사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말해줄 수 있는 단어가 그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서, 엘레노아는 다르다.
“엘레노아는 한 단계 더 성장했군요.”
“오빠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알렉스는 유리아의 감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1년 만에 보는 여동생인 엘레노아는 사제로서의 더 큰 성장을 이뤄낸 듯 보였고,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 위에 서서 그들을 이끄는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은현과의 신혼여행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저 아이도…성장했더라고요.”
유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합심하여 중상자들의 이송을 돕고 있는 에린의 모습을 응시했다.
“아저씨! 힘내세요! 죽으면 안 돼요!”
점차 호흡이 희미해져 가면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중상자의 의식을 붙들어 놓기 위해, 에린은 필사적으로 중상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으….”
“그 녀석이 공들여 키운 아이니까요.”
유리아는 알렉스의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 마수들을 휩쓸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저 소녀를 어떻게 위험 요소로 간주할 수 있을까.
사실 그 생각은 버리게 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에린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기사단의 입단 권유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에린은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도와주기 전부터, 이미 소녀는 성장하고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는 자신보다 더한 유능한 길잡이를 만나 활기차게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자신이 에린의 배역이 ‘소설 속의 빌런’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면, 조금 더 빨리 에린의 존재를 눈치채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자신은 저렇게 남을 돕기위해 헌신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소녀로 성장시킬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은현은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는 자신보다 더욱 뛰어나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질투심과 경쟁심을 추악하다고 여기며 애써 속이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자신의 속내를 자각한 순간이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이곳은 소설 속이 아니다.
틀림없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현실 속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이 현실 속에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의 답을 내리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렉스.”
“네. 왕녀님.”
“왕궁에 복귀하게 되면…할 이야기가 있어요.”
“이야기인가요?”
굳은 표정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있는 유리아의 표정을 헤아린 알렉스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감추고 있었던, 아니, 그 남자 이외에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나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것은 자신의 전생, 지구에서 살았던 시절의 기억의 존재와 어떤 형태로 이 세계의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
갑작스러운 유리아의 결심에 알렉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표정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애써 서운한 감정을 숨기며 참고, 말해주길 기다려왔던 순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유리아의 결심은 알렉스의 기분을 당황에서 기쁨으로 변화시켰다.
우우웅
그렇게 알렉스가 유리아와 대화를 마친 순간.
강렬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평야에 거대한 마법진이 출현했다.
“이 마력은….”
익숙한 감각임을 떠올린 알렉스와 유리아는 누구의 마법인지를 깨닫고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공했다.’라는 것을 서로의 눈으로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곧장 마법진이 출현한 장소로 이동했다.
이윽고 마법진 내부에서 출현한 7명의 사람을 확인한 알렉스가 근 1년 만에 보게 되는 은현에게 말을 걸었다.
“1년 만이군.”
“그러게. 잘 지냈어?”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만 같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스탬피드 던전은….”
“제압했어.”
“…고맙다.”
“뭘, 이거에 대한 보상은 받을 거야. 그게 너한테 받을 보상은 아니니까 너무 고마워하지는 마.”
“으….”
바로 옆에 서 있는 이를 두고 한 말임을 깨달은 유리아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내 은현의 옆에 붙어 있는 일리아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1년 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응. 그동안 꽤 늘었구나?”
“1년 동안 스승님의 가르침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행했으니까요.”
유리아가 일리아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알렉스는 은현 이외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데…두 분은…?”
알렉스는 못 보던 얼굴인 앨리스와 데르킨을 한차례 훑어보고는 은현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예전에 함께 팀을 맺었던 동료. 앨리스라고 해. 그리고 이쪽은 그녀의 남편이야.”
“…영웅이시라는 말씀이군. 알았다.”
“영웅이라니, 부끄럽네요.”
앨리스는 자신이 없는 20년 사이에 대륙에서 자신에게 멋대로 그런 칭호가 붙었다는 사실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곧장 아르티아 단원을 찾아 기사단의 피해 현황을 보고를 받아야 하니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응. 고생했어. 나중에 페르닌에서 보자고.”
“그러지.”
가장 먼저 팀에서 이탈한 것은 리오드였다.
한 집단의 수장인 만큼, 이번 일에서 보고를 받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에 그 누구도 그의 이탈을 붙잡을 생각이 없었다.
은현은 리오드와 마찬가지로 베스타 신전을 대표해서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이끌고 요새로 왔던 아니에스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야 뭐. 그런 쪽의 보고는 영. 내 대리를 세워뒀으니, 걔가 알아서 하겠지. 난 부상자들의 치료나 할랜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아니에스의 얼굴을 보고, 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의 안내를 받아 변경 요새 내부로 이동했다.
“엘레노아와 엘빈은 어때?”
“엘레노아는 지금 사람들을 지휘하며 부상자들의 케어에 집중하고 있고, 엘빈은…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더군.”
암흑 기사로 변모하여 마수들을 압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엘빈의 활약은 기사들은 물론이고, 많은 모험가들에게도 화제의 대상이었다.
“그리고…너에게 상담해야 할 문제도 한 가지 있다.”
“상담?”
“에린에 관한 문제다.”
“으….”
에린의 이름이 언급되자, 옆에서 일리아나와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던 유리아의 어깨가 들썩였다.
“…자세히 얘기해봐.”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던 은현은 눈썹을 가늘게 뜨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알렉스에게서 크라시르 신입기사단원인 빌라드 오르바 일행과 에린의 사이에 있었던 해프닝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리아나는 아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진 입을 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우리 아가가? 1년 사이에 많이 변했나 보네.”
한심하고 나약함의 끝을 보여주면서, 극도로 소심한 성격 때문에 괴롭힘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했던 아이테르의 학생 시절, 심하게 시달렸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도 모자라 기사들 서너 명을 맨손으로 때려눕혔다는 에린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일단은 나와 왕녀님이 손을 써두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나중이야. 수도에서 폭행을 당한 기사들이나 크라시르 쪽에서 에린의 해프닝을 걸고 넘어진다면, 그건 우리 쪽에서 준비를 해둬야 하는 문제다.”
“아~그렇겠네.”
피식 웃음을 흘린 은현은 이 상황에서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에 놓여져 있는 유리아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왕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페르닌에 복귀하면 에린의 사건에 대해서 정당방위를 주장하고, 기사들의 실력과 인격을 비롯한 기본적인 성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생각이었어요. 기사단의 입단 시험에 대한 절차와 엮여있는 비리에 관한 부정부패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탈탈 털어볼 생각이긴 하지만, 아마 비리로 기사단에 입단한 귀족들 쪽의 반발이 심하겠죠.”
이번 지원 원정을 통해서 공훈을 쌓은 유리아이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변호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지만, 그녀의 영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정확한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부디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랄게요.”
실실 웃으며 선뜻 덕담을 하는 은현의 표정을, 유리아가 꺼림직하게 바라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죠?”
“대비를 해둘 뿐입니다. 대비를.”
“나의 힘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제재를 하는 것도 웃기고 자격도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너무 큰 파란은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뭐, 그거야 저쪽 나름이죠.”
의미심장한 대답을 늘어놓는 은현의 표정이 한없이 불안했다.
‘이 인간, 또 뭔가 저지를 것 같은데….’
그렇게 요새 내부를 걷고 있던 순간.
“아!”
전방에서 마주친 에린이 1년 만에 보는 은현과 일리아나의 얼굴을 보고 몸을 딱딱히 굳혔다.
“아, 아….”
마치 동상처럼 굳어 있던 몸의 경직이 이내 스르륵 풀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이내 발걸음의 템포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빠른 발걸음은 질주로 바뀌었다.
“현아아아아!”
가까워진 순간, 도약하여 은현의 몸에 뛰어들었다.
“뛰면 안 되지.”
“흐, 흐윽….”
가벼운 은현의 주의는 에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1년간 참아오면서 쌓여있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소녀의 눈가에서 투명한 액체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어….”
“그래.”
“나 진짜로 열심히 했어….”
“알아. 다 들었어.”
은현은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에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소녀의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후후, 아가는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가구나?”
“일리아나니임!”
이내 은현의 품에서 벗어나서는 일리아나의 품에 안겨서 잔뜩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모습은 도저히 막 성인이 된 19살의 숙녀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아가, 남은 뒤처리 어서 끝내고, 집에 갈 준비해야지?”
“네! 저 힘낼게요!”
일리아나의 품에서 떨어진 에린은 그동안 떨어져 있던 에너지를 재충전이라도 한 듯이, 기운찬 미소를 보이며 힘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