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7화 〉267. 마녀와 악마(3) (267/730)



〈 267화 〉267. 마녀와 악마(3)


“…후아! 오랜만에 몸 좀 움직이네!”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강신(降神)을 푼 아니에스는 신성력으로 구현된 황금의 건틀렛만을 유지한 채로 계속해서 마수들을 처리해나갔다.
아무리 대륙에서 유일하게 신의 일부를 하계에 현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싸움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유지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신의 지속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신의 일부를 담고 있는 영혼과 육체는 계속해서 그 힘의 부하를 견뎌야만 했다.
아니에스가 강신을 지속할  있는 시간은  10분뿐.
하지만 그 10분 동안 아니에스가 마수들을 압도하면서 보여주었던 무력의 차이는 데르킨의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맨손으로 마수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는, 사정없이 잡아 뜯고, 찢어버리고, 터뜨려버리는 일방적인 전개.
매서운 검격으로 적을 제거해나가는 리오드와 함께, 아니에스가 날뛰고 있는 전위는 수적인 열세의 차이를 뒤집고도 단 한 번도 뚫리지 않았다.
 광경을 보며 데르킨은 생각했다.

“굳이 나나 당신이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도 당신의 사격이나 저의 보조가 없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밀고 들어올 수도 없었어요.”

“그건 그렇지만….”

이  안에서 중위의 포지션을 맡은 데르킨의 역할은 원거리 사격을 통한 전위의 보조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원소를 정령의 도움으로 끌어다 힘을 발휘하는 앨리스의 경우에는 던전 내부에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존재했다.
때문에 앨리스는 바람의 원소를 끌어모아 데르킨의 정령 화살의 공급과 위력의 보조를 맡고 있었다.
화살 한 발이 마수들의 몸통과 머리를 직선상으로 꿰뚫고 치명상을 입히면서 극한의 관통력을 자랑했다.

“앨리스, 아까 그것이…강신(降神)이라면….”

무심코 아니에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황금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체구의 어린 소녀와도 같은 외모를 가진 여성을 수호하고 있었던 신성(神聖)의 집합체는 그것을 처음 본 데르킨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아니, 그분은…신이었던 건가?”

“아뇨…그건…신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다면…?”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아니에스님의 강신으로 나타난 아까의 황금사자는….”

앨리스는 과거에 자신의 남편이 품었던 의문과 똑같은 의문이 들어 아니에스에서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우리 여신님의 모습이 아니야. 그냥 나의 기도에 가장 알맞은 축복의 기적을 내려주신 거지.

아니에스의 강신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베스타 여신의 진짜 모습을 ‘황금사자’로 오해했다면, 베스타 여신은 아마 신계에서 잔뜩 분개했을지도 모른다.

-뭐 모티브로 삼았던 놈이 있기는 하지. 내가 알고 있는 인상 중에서 제일 센 놈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구현시킨 거니까.

아니에스는 리오드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었다.

“가장 강한 사람으로 함께 전위에서 싸우고 계신 검사분을 모티브로 삼아서 그 황금사자의 모습을 구현시킨 거라고? 그러면…저분은 은현님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야?”

앨리스의 설명을 듣고 데르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은현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족들에 대해서 경험을 해본 것이 은현밖에 없었기에, 은현의 전력이 인간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졌는지 비교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차기 엘프의 여왕이었던 공주 시절의 레지나와 엘븐가드의 엘프들을 가르친 은현이 인간들 사이에서 약한 축에 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데르킨의 의문에 답한 것은 앨리스가 아닌, 둘을 지키기 위해 후위에서 접근해오는 자잘한 수의 마수들을 처리하고 있던 제라드였다.

“확실히 저희 중에서 가장 강하신 건 현이 형님이 맞지만, 겉보기에는 또 다르지 않습니까. 보세요. 저 묵직하고 사나운 인상을. 딱 봐도 야생의 포식자인 사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비주얼이지 않습니까.”

제라드가 전위에서 검을 휘두르며 활약하고 있는 리오드의 모습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그래도 좀 나았는데 나이를 드시고 중년이 되시더니 힘이 빠지기는커녕 더 매서워지고 근엄하신 게 딱 나오잖아요. 사람들이 리오드 형님을 보면 첫인상에 대한 생각으로 다들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요. ‘아,  인간 더럽게 강하겠네.’라는 아우라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런 양반이라고.”

“…확실히.”

은현의 소개를 통해 첫인상으로 대면했을 때, 좀처럼 놀라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근엄함을 유지하는 리오드에게 데르킨은 제라드의 말처럼 범상치 않은 남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게다가 가뜩이나 현이 형님은 항상 저희를 보조하는 역할을 자칭하시면서 정체를 숨기고 다녔으니까요. 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악한 놈들 등쳐먹고 다니곤 하셨는데, 누가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바깥세상에서의 은현님은 그런 생활을 해오셨습니까?”

“예. 뭐…그렇죠.”

“…….”

생각해보면 근 3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 재회하게 된 은현의 모습은 처음 달의 마을에 들어왔을 때와는 꽤나 다른 인상이었다.
이전에는  더 밝고 활동적인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은현은 잔잔하면서 여유를 보여주는 인상이다.
다시 달의 마을을 찾아왔을 때, 순간 데르킨이 노화가 전혀 진행되지 않아 변함없는 외모를 유지했던 은현의 모습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과거의 은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으음, 어쨌거나 어떤 경위로 저분의 강신이 구현되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도착한  같군.”

전방의 심부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전위에서 모든 마수들을 정리해낸 리오드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남긴 흔적이  앞으로 이어져 있다.”

“후우, 이곳의 마수들도  정리된 것 같은데. 한 타임 쉬고 가려고?”

“가능하면 곧바로 도우러 가는  낫다고 보는데.”

“난 찬성.  사람은?”

아니에스의 질문에 후열에 서있던  사람은 더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던전 내부에 진입하면서 가장 격렬하게 움직였던 전위의 두 사람이 아직도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체력의 소모가 덜했던  사람이 리오드와 아니에스의 의견에 거부의 의사를 내보일 리가 없었다.

“좋아! 그럼 들어가자고!”

팀원들의 의사를 확인한 아니에스는 은현과 일리아나가 먼저 들어갔을 던전의 심부로 들어갔다.

“후으읍….”

 속을 가득 채울 정도로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신성력으로 감싼 바닥을 있는 힘껏 내려찍었다.

콰아앙!

던전의 내부를 뒤흔드는 거센 진동으로 먼지 바람이 흩날리고 모든 마수들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난입한 아니에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이 몸 등자아아앙!”

호기롭게 선두로 나서서 모든 마수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아니에스의 뒤로 리오드가 따라 들어와 내부를 살피고, 최심부로 향하는 입구 앞에 서있는 은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무사한가?”

마수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은현의 모습으로는 상처의 유무조차 판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검을  쥐며 거칠게 숨을 내쉬고 서 있는 모습은 그럭저럭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고야!  마수의 시체들은 다 뭡니까. 형님!”

“괜찮으신가요!?”

“은현 님!”

제라드와 앨리스, 데르킨 부부도 뒤따라 심부로 진입하면서, 주위의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는 마수들의 시체들과 그 중심에 서 있는 은현의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은현 쪽에서 리오드 일행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빨리도 왔네.”

“형님!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  뒤의 최심부에 일리아나가 들어가 있어. 일리아나가 던전 마스터를 제거할 때까지, 여기서 마수들이 최심부로 진입하는  막아야 해.”

“심플해서 좋네.”

쿵!

아니에스는 다시 한번, 있는 힘껏 바닥을 차면서 부서진 거대한 암석을 들어 올렸다.

“응?”

“어…?”

“……?”

연약하고 아담해 보이는 자신의 체구의 대여섯배나 되는 크기의 커다란 암석을 들어 올리는 아니에스의 기행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동료들.
그 암석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 어깨에 떠받치고  발자국씩, 은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는 광경은 기이한 것을 넘어서, 기괴하기까지 하다.

쿵! 쿵! 쿵!

 발자국씩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울리고 던전의 내부가 진동하며 뒤흔들렀다.

“야,  설마…!”

그녀의 속셈을 눈치챈 은현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아 비켜어어!”

“이런 미X년이…!”

냅다 그 거대한 암석의 덩어리를 은현이 지키고 있는 입구를 향해 던져버리는 기행에, 은현이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옆으로 피했다.

콰아앙!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지만, 일리아나에 의해 파괴되어버린 돌문의 잔해 위로, 거대한 암석이 던져지며 입구를 콱 막아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아니에스의 기행에 은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이래서는 안에 있는 일리아나가 나오지 못….”

은현은 순간 멈칫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아니에스의  막무가내식의 행동은 생각보다 합리적이다.
마수들이 최심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싶다면 입구를 그냥 막아버리면 그만.
지금 이곳에서 마수들을 끊임없이 소환해내고 있는 포탈은 최심부에 존재하는 던전마스터가 제거된다면 포탈의 유지에 필요한 마력의 공급이 끊기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멸하게 된다.
즉 이 포탈이 사라진다는 것은 최심부에서 일리아나가 던전마스터를 제압했다는 뜻으로 귀결된다.
입구를 막아버린 암석은 그때 파괴해버리고 입구를 다시 개방하면 된다.

“…천재인데?”

자신은 어째서 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아이의 고민을 해결할  누가 알았겠느냐….]

은현의 생각을 읽은 베르단디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자! 해결됐지!?”

“그, 그래….”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주위의 마수들 모조리 정리하고 팀원들이 있는 방향으로 합류했다.
은현의 몸 상태를 살핀 아니에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는 없네.”

“…형님, 어째 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습니까?”

“티나? 나 지금 한창 성장기거든.”

시에테가 남긴 검술을 끝없는 반복과 숙달 끝에 차근차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던 은현은 자신의 검술의 수준이 한층 더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있었다.

“나중에 나와 한 번 겨뤄보는 건 어떻지?”

은현의 성장에 흥미로운 빛을 띄운 리오드가 호기심이 생겨 은현에게 도전을 청했다.

“일 끝나고 여유 좀 찾으면  번 해보자. 일단은….”

모든 어그로가 쏠린 마수들을 응시하며 팀의 진형을 재정비한다.

“저것들부터 처리하고 회식  하자.”

◆ ◆ ◆

던전마스터였던 악마, 비프론스를 처리한 일리아나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제때 도착했나 보네.”

심부에서 느껴지는 다수의 마력의 파동을 느끼며 일행들이 은현과 제때 합류하게 되면서 위험한 고비는 넘겼음을 확인하고 작게 미소지었다.
사도의 권속으로써 은현과 이어지면서,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일리아나는 자신의 몸에 존재하는 신력을 추적하여 은현의 건재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내 입구를 가로막은 거대한 암석을 보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건?”

“으랏차!”

콰앙!

기운찬 어린 여자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입구를 막고 있던 암석이 강하게 흔들리고, ‘쩌저적’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내 분쇄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잔해들을 옆으로 걷어 치워버리고, 가만히 서서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은현을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은현이 제대로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뻤다.

“끝났어?”

“응. 생각보다 싱거웠어. 역시 악마였더라. 그쪽은? 마수들은 모두 정리 끝났어?”

“이쪽도. 너무 싱거웠어.”

“구라치네~.”

“조용히 해라.”

담담하게 대답해주는 은현의 말에 아니에스가 태클을 걸자, 리오드가 아니에스의 옷깃을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돌아가자.”

모든 일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은현의 손을 일리아나는 기쁘게 맞잡았다.

“그래. 가야지. 그리고 현아.”

“응?”

“약속, 잊으면 안 돼?”

-딱 한 번, 침대 위에서 내가 하는 명령 들어주면 용서해줄게.

“알…았어….”

[후후.]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은현만은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자신의 앞날에 급격히 우울해진 순간이었다.
베르단디는 그런 은현과 일리아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