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265. 마녀와 악마(1)
“웃기지 마. 아니, 웃기지도 않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일리아나,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데, 이번에는 그때 제국에서 있었던 상황과는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야! 그때랑 똑같잖아! 네가 혼자서 저것들을 막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이는 일리아나의 표정을 확인하고,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화가 가득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의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한없이 기쁘다.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다르지.”
“뭐가 다른데?”
“마냥 무작정 혼자서 이 문을 막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이 던전 내부에서 일어나는 스탬피드를 막기 위해서는, 7명이 함께 행동하여 던전의 내부를 장악해 나가는 것보다, 가장 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일리아나를 최심부로 데려오는 것이 더 빠른 해결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다.
그렇기에 은현은감지를 통해 던전의 내부를 맵핑하면서, 최심부로 이어지는 최단 거리의 경로로 일리아나를 안내했다.
“곧 있으면 리오드 녀석들이 이곳으로 오겠지. 흔적은 남겨두었으니까.”
“그때까지 네가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잖아.”
“버틸 수 있어. 예전과는 다르잖아. 힘도, 마음가짐도.”
“…….”
[한 번만 믿어보지 않겠느냐?]
“베르단디님….”
일리아나는 떨떠름 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의 위에 떠 있는 여신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아이는 마녀 아이가 걱정하고 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보증하마.]
“하지만….”
“그때는 아무런 미련도 가지지 않았어. 그래서 마지막까지 내 운명에 순응했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너를 떠올리긴 했지만…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어.”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는 일리아나를 뒤로하고, 은현은 자신들에게 접근해오고 있는 마수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의 솔직함을 담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은현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그때와는 모든 게 달라.”
자신의 영혼에 걸려있던 신의 제약은 사라졌다.
운명을 평생 함께 해주기로 약속해준 여신과 아내들이 있다.
스승이 평생을 바쳤음에도 이루지 못하고, 제자에게 남긴 숙원이 있다.
두 자루의 검을 소환하여 꽉 쥐고, 마수들과의 임전 태세로 들어간 은현은 일리아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난 여기서 죽을 순 없어.”
그리고 싶은 미래가 있기에, 추구하고 싶은 행복이 있기에, 이곳에서 자신이 부여받은 두 번째 인생을 포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네가 빨리 정리하고 나오던가.”
“…이거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대가?”
“딱 한 번, 침대 위에서 내가 하는 명령 들어주면 용서해줄게.”
“…….”
느닷없는 일리아나의 요구에 은현은 순간, 말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싫어?”
“아니, 그게….”
또 자신을 가지고 무슨 이상한 플레이를 하려는 것인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 불길한 기분이 머릿속을 엄습한다.
[아이야. 들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니, 베르단디님…. 지금 남 일이라고 함부로….”
[남 일이라니? 아이의 일은 나의 일이기도 한데. 서운하게 말을 하는구나. 그리고 마녀 아이를 저렇게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아이의 그 무심한 성격이 원인이다. 저 정도로 넘어가 주는 것은 값싼 일이지 않느냐?]
“아니, 제가 나중에 침대 위에서 당할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값싸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요.”
[마녀 아이의 성향을 저렇게 일깨운 것도 아이의 업보이다.]
“……”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베르단디의 말에는 더 이상 반박할 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면서 수많은 저울질을 끝에 결정을 내린 은현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좋…아.”
단 한마디를 내뱉는 것임에도, 어마어마한 감정이 실린 대답.
그 감정에 무게를 측정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천근이 넘을 것이 틀림없다고 은현은 확신했다.
절대로 하기 싫으면서도, 그 하기 싫은 약속을 맺은 은현의 얼굴을 보고, 일리아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콜.”
일리아나는 몸을 돌려 전방의 거대한 돌문을 응시했다.
[세 자릿수 하위마법]
[록 스피어]
단단하기 짝이 없는 질량을 가진 거대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창이 맹렬히 회전하며 돌문과 충돌했다.
콰아앙!
암석의 창과 충돌하면서 최심부로 향하는 돌문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며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돌문의 잔해들은 결계로 보호하고 있는 일리아나의 몸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했다.
최심부로 향하는 문을 깨부수고 곧장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일리아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은현을 바라보았다.
“다치지 마.”
“그럴 수준도 아니야. 믿어봐.”
“응. 진짜로 믿는다?”
일리아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은현이 최심부로 향하는 일리아나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그의 현 목표는 이곳에서 단 한 마리의 마수도 최심부로 향하게 두지 않는 것.
[마녀 아이가 저렇게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긴 하죠.”
이 비슷한 상황 속에서 허망하게 죽어버린 은현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20년 전의 기억은 일리아나에게 강한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그 원흉이 자신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은현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쓸데없는 생각은 자제하고 아이들에게 잘해야 한다.]
“…엄마세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잔소리가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을 들게 되자, 은현이 무심코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 아이가 너무 무신경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묘하게 상처를 받은 표정을 지은 베르단디가 팔을 내뻗어, 은현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직설적인 표현에 상처 받은 여신이 보이는 최대한의 항의였다.
[그리고 잘해야 하는 대상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네. 명심할게요.”
우오오오!
여신의 설교를 들은 은현은 마침내 자신의 앞에 당도한 마수들과 교전을 시작했다.
◆ ◆ ◆
부숴버린 돌문을 지나나, 기다란 복도를 걸은 일리아나는 마침내 그 끝에 도달했다.
광활한 내부에서 시야를 밝혀주고 있는 것은 일정한 간격으로 원을 두르며 배치된 촛불들이다.
어디선가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쌀쌀한 바람과 함께 어우러져 내부의 모습은 한없이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일리아나는 가장 끝자락에 거만한 태도로 다리를 꼬고 왕좌 위에 앉아 있는 한 존재를 응시했다.
촛불로 밝혀진 시야로는 그의 왕좌의 일부와 몸통밖에 확인되지 않았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제대로 된확인은 불가능했다.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자, 왕처럼 거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그 존재가 몸 내부에 품고 있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은 그가 절대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악마는 오랜만에 보네.”
“호오? 나의 종족을 본 적이 있는가? 미천한 인간이여?”
성대가 울리면서 흘러나오는 것은 가느다랗고 아름다운 남자의 미성이다.
이성과 마음을 침입하고 끈적하게 녹여오며 농락을 해오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몸과 마음 전부를 바치고 싶게 만드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눈앞에 있는 것이 일리아나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면 첫마디를 듣는 순간부터 무릎을 꿇고 자신의 옷을 벗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리아나는 그 악마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꾸했다.
“있기야 있지. 20년 전에. 그리고 작년에도.”
“호오?”
기본적으로 매혹의 효과가 가미되어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일리아나의 모습에 악마가 흥미를 보였다.
“흐음. 하계로 넘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잘 모르겠군. 따로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악마는 일리아나의 몸을 유심히 관찰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이내 그녀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에 인상을 찡그린다.
“네년…설마 신의 종자냐?”
“아니.”
일리아나는 굳이 말하자면 은현과 맺어진 동반자의 관계지, 신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몸 안에 신력을 품고 있는 이유는 신의 사도인 은현과 몸을 섞으면서, 그에게서 신의 기운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악마는 모른다.
일리아나도 굳이 자세히 설명해줄 이유도 없었다.
“신의 종자도 아니면서, 고작 인간이 신의 힘을 품고 있다라….”
마치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신기한 생물을 발견하고 탐구를 하는듯한 표정.
이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 악마는 일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나의 이름은 비프론스. 나는 지금 네년의 몸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네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친다면, 네 목숨을 살려주도록 하겠다.”
비프론스는 일리아나에게 제안을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을 담아, 자신의 마성(魔性)을 발현시켰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대상의 감정을 조작하고전신을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비프론스가 발현시킨, 인간 여성의 몸과 마음을 농락하는 특성은 악마의 종족인 인큐버스의 특성.
일리아나의 몸에 흥미를 느낀 악마는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녀의 몸을 농락하며, 몸속에 품고 있는 신의 힘을 자세히 조사해보고 싶은 욕구를 해소를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프론스가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존재했다.
“싫은데.”
“음?”
이미 자신의마성(魔性)에 포로가 되어, 숨을 헐떡이며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해야 할 일리아나가 시큰둥한 표정을 보이며 매몰찬 거절의 의사를 내보였다.
“…….”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태에 비프론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것은 여자의 몸속에 존재하는 신력의 힘이 악마의 특성에 저항하고 있는 결과인가?
아니면 다른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눈앞의 여자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력을 품고 있는 인간 여성을 발견해낸 지금의 케이스가 비프론스에게 있어서 처음 발견한 것인 만큼, 일리아나는 반드시 손에 넣고 싶은 실험체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악마의 특성에 저항할 수 있는 여성을 눈앞에 둔 비프론스는 일리아나의 몸을 가지고 싶은 욕구가 더욱 강해져 갔다.
악마가 그런 생각을 가지며 탐욕에 어린 눈으로 일리아나를 바라보자, 일리아나는 그 시선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너 같은 거한테 나를 바치라고? 재미있는 농담이네.”
“…뭐라고?”
“하여간 아름다운 건 알아 가지고, 그런데 나 남편이 있는 몸이거든? 그만 좀 집적거려줄래?”
“…….”
적나라한 일리아나의 도발에 악마가 주먹을 꽉 쥐며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소리는 또 더럽게 느끼해서 토가 나올 것 같아. 지금 겨우 그런 목소리로 날 꼬시겠다는 거야?”
“감히 인간 주제에!”
분개한 비프론스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악마의 얼굴이 촛불에 비치면서 드러났다.
화려한 금발과 잡티 없는 아름다운 피부는 분노로 일그러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악마의 형상’ 그 자체로 변모했다.
“감히 나의 아름다운 외모 목소리를 모욕하다니!”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악마의 마력이 방출되면서 던전 최심부를 가득 채워나갔다.
“그 건방진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 위에서 앙앙거리다 못해,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네년 몸을 농락해주겠다!”
“표현 한번 저급하긴.”
악마의 선전포고를들은 일리아나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여섯 자릿수 상위마법]
[프로미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