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263. 황금 사자(1)
“레이넌이 없는데, 전위는 리오드 형님 한 분이 맡습니까?”
아까까지 공포의 손깍지로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낸 제라드는 후유증이 남은 듯 얼얼한 손가락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나이가 어린 연약한 미소녀가 걸어온 손깍지의 위력은 그만큼 위력적이고 사람 하나를 골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눈물겨운 제라드의 사죄를 받아낸 아니에스는 제라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걔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냐? 어디 짱박혀 있는지 소식조차 모른다며?”
“그러게 말입니다. 현이 형님은 소식 들으신 거 없으십니까?”
현재 데르킨과 앨리스를 포함해, 모여있는 7명 중에서 가장 좋은 정보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은현이었다.
은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애석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직은.”
“흐음.”
“아니. 전위는 리오드와….”
이내 고개를 돌려, 이 중에서 가장 신장이 작은 어린 소녀의 외관 ‘현 성녀’에게로 시선이 멈췄다.
“엥? 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아니에스의 물음에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헹! 좋지!”
재미있겠다는 듯 호쾌하게 웃음을 짓는 아니에스를 바라보며,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데르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나이를 높게 봐도 아직 14~15살에 불과한 연약한 소녀인데, 팀에서 모든 마수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전위를 맡기겠다니?
도저히 데르킨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더였다.
“여보. 걱정할 거 없어요.”
“…앨리스?”
“저분은 저래 보여도, 현 인류 중에서 최강이신 걸요.”
“저렇게 어린 소녀가 인간들 중 최강이라고?”
실례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의문을 품으며 아내인 앨리스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뭐, 그런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음에도, 두 부부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아니에스는 데르킨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
“아니에스입니다. 편하실 대로 불러주세요.”
“데르킨입니다.”
자기소개를 마친 아니에스는 이내 고개를 돌려 검은 안대로 양쪽 눈을 가리고 데르킨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동료의 상태를 살폈다.
“앨리스, 눈은….”
“괜찮아요. 아니에스님. 지금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어요.”
앨리스의 두 눈을 치료하려 했었지만,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니에스는 앨리스의 두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
가장 많은 신성의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치료해내지 못한 앨리스는 아니에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아픈 손가락 중 하나다.
오염으로 인한 신체의 손상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뽑아내야만 했던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안쓰러움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앨리스는 그렇게 신경 쓰지 말라고 오히려 아니에스를 다독였다.
“그리고 제가 다시 숲을나와 은현님을따라 나온 건, 제 두 눈을 고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예요.”
“그래?”
“가능성은 은현님이 제시해주셨어요.”
“…그렇구나. 후우.”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앨리스의 두 눈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듣자마자, 아니에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그 누군가가 은현이라는 것이 더욱 안심이 든다.
이내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야,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어?”
“도와주면 좋지. 때가 되면, 너한테도 도와달라고 얘기할게.”
“꼭 불러라?”
아니에스와 앨리스의 짧은 해후를 마쳤을 때, 은현이 이어서 말을 이었다.
“전위는 리오드와 아니에스, 중위는 데르킨과 앨리스, 후위는 제라드가 맡아.”
“엥? 형님하고 일리아나 누님은요?”
“나와 일리아나는 곧장 최심부로 진입해서 이 상황을 만들어낸 원인을 제거할 거야.”
“원인이요?”
“이런 대규모의 마수를 단기간 안에 계속 만들어내서 침공을 시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마수의 출현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니까.”
마수가 대륙에 출현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하계의 생명체가 체내에 품고 있는마나가 오염되고, 변질된 끝에 마수로 전락해버린 경우.
두 번째는 바로 던전 내부에 생성된 마수들이 던전의 수용한계를 넘어서 던전을 박차고 외부로 뛰쳐나온 경우다.
대륙에 떠돌아다니는 특정의 종족 명이 붙어있는 마수들은 모두 이 두 번째의 경우를 통해서 던전에서 소환되어, 범람 현상을 통해 던전 바깥으로 나온 경우이다.
이번 사건의 전조였던 ‘스탬피드’는 대륙의 던전들이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대규모의 마수들을 소환하여 바깥으로 배출시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즉, 이 녀석의 말뜻은 어떤 특정의 한 던전에서 지속적으로 마수 군단의 소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 이 사태가 끝난다는 뜻이다.”
자신의 들은 설명을 정리하는 리오드의 질문에 은현은 정답임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 던전의 수준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수준이 되지 못해. 던전이나 마수들의 질보다, 대량의 물량을 소환하는데 맞춰진 컨셉 같으니까.”
공작령 주변에서 마수의 범람을 일으킨 던전들의 대부분은 공작 가문의 주도하에 제압이 완료되어 당분간은 잠잠해졌다.
비슷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사전에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모그라프 변경백은 그러지 못했다.
변경 요새를 보름 동안 위협했던 마수들의 군단을 계속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
게다가 이 사태의 원인인 던전은 변경 요새의 앞에 존재하는 광활한 숲 너머에 존재하는 멸망한 제국 영토다.
수비에 특화된 전략과 전력을 구성하고 있는 변경 요새의 특성상, 그곳으로 파견시킬 병력을 준비시키는 것도 쉽지 않으며, 원인인 던전까지 도달하기 위해 뚫어야 하는 마수 군단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변경백은 왕가에 구원요청을 한 거지. 마수 군단을 뚫을 수 있고, 던전을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을 가진 리오드, 너를 보내달라고.”
“그런데 기사단 전체가 아닌, 나만을 데리고 와도 충분한 건가?”
“급한 것도 이쪽이지만, 적어도 요새 수비 쪽의 병력을 강화해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까.”
보름이 넘도록 지속된 전투로 모그라프 령의 병사들은 이미 지칠대로 치쳐 초췌해진 상태.
함께 지원을 온 왕국군에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미덥지 못하다.
알렉스가 데리고 온 병력들에 조금이라도 지원이 되도록 도움이 될 만한 전력을 보내주고 싶었던 것이 의도였다.
리오드의 아르티아 기사단과 아니에스가 이끌고 온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과 성기사는 요새 수비전에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엘레노아와 엘빈을 보내두었으니, 요새의 수비 쪽은 괜찮겠지. 게다가 아르티아의 기사들을 저쪽에 돌린 만큼 이쪽에도 강한 전력을 데려왔으니까.”
여덟 자릿수의 고위마법사에, 대륙에서 인간들에게는 희소한 힘인 정령술을 기반으로 높은 전력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부.
“…저는 뒤에서 형님과 누님들을 조종해 대규모의 병력을 조종하고 계신 현이 형님이 제일 무섭습니다.”
심지어 현재 두 집단의 톱이나 다름없는 리오드와 아니에스가 은현의 명령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며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이 두렵기 짝이 없다.
“난 원래 이런 거 생각하는 거 성미에 안 맞아. 귀찮아죽겠는데 이렇게 머리 쓰는 건 누가 대신해주면 편하잖아. 얘가 뭐, 날 앞세워서 신자들 등쳐먹으려 하거나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 녀석의 판단이 대체로 맞으니까.”
“…….”
담담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고는 ‘뭐 문제있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각자가 각자의 나라에 소속되어 왕가와 교황을 모시고 있는 신분임에도, 마치 그들보다도 은현의 말을 더 따르고 있는 것만 같은 상황.
“뭐…확실히 그렇죠.”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에 제라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아, 나 이런 상황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말하지 마.”
보나 마나 좋은 소리가 아닐 거라는 확신에 은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사전에 일리아나의 말을 차단했지만, 그것을 들을 일리아나가 아니다.
“‘비선실세’라는 말, 알아?”
“아, 말하지 말라고.”
킥킥대며 남편을 놀리는 재미에 빠진 일리아나를 제쳐두고, 은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 7명의 목적지인 던전 근처에 도착하고, 이제는 진입만을 앞둔 상황 속에서 마지막 작전 브리핑이었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작전은 이래. 두 팀으로 나눠서 움직일 거야. 나와 일리아나는 마수들을 뚫고 곧바로 심층부로 내려가서 던전을 제압할 거야. 너희 다섯 명은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마수들을 모조리 정리해.”
“흠.”
“던전 속에 있는 마수를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후발 마수들의 숫자를 감당해야 하는 변경 요새 수비 쪽의 부담은 줄어들어. 게다가 던전을 제압한 뒤, 나와 일리아나가 던전을 나올 때수월할 테니까.”
“그냥 안에서 모조리 쓸어버리면 된다는 거야? 심플하네.”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던 아니에스가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몸을 풀기 시작한다.
“그럼…진입하자.”
숲속에서 뛰쳐나온 현재 대륙의 최강 전력으로 구성된 팀이 던전에서 막 배출된 마수들과 정면으로 조우했다.
크륵!?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놀란 마수들이 경계의 태세를 띄우며 팀에 달려들었다.
스르릉
공격 한번을 못해 보고 두 동강이 난 마수를 시작으로, 눈 깜짝할 새에 처리된 마수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팀은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수정구슬을 통해 연락해.”
“알았다.”
은현의 부재로 자동적으로 팀의 리더를 맡게 된 리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다른 공간의 세계, 던전 내부로 전이 되자마자, 은현은 곧장 자신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가속]
“일리아나, 가자.”
“응.”
[네자릿수 하위 마법]
[플라이]
허공에 떠올라 부유하고 있는 스태프에 걸터앉은 일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행동에 호응했다.
화살처럼 튀어나가는 은현의 뒤를, 일리아나가 비행마법을 통해 스태프를 조작하여 이동을 개시했다.
먼저 선행하여 마수들과의 교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앞질러간 두 부부의 모습을 보며, 리오드는 입을 열었다.
“우리도 시작하지.”
“좋아!”
리오드와 아니에스를 선봉으로 5명으로 구성된 리오드의 팀은 일제히 진격을 시작했다.
[중급 정령술]
[중위 정령 소환]
[엘븐가드 정령술]
[바람 요정의 화살]
두 부부가 함께 소환한 바람의 정령, 실프가 만들어낸 바람의 화살이 데르킨의 활에서 쏘아지면서 돌풍을 일으키며 리오드와 아니에스의 사이를 지나갔다.
정령의 힘으로 구현된 마력의 화살은 마수의 몸에 닿는 순간, 그 신체를 찢어발겼다.
그러면서 속도와 관통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뻗어 나가는 위력은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의 명성에 걸 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크르릉!
사족보행으로 몸을 낮추고 달려옴으로써, 화살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늑대형 마수들이 사나운 울음소리를 울부짖으며 달려오고 있다.
[나의 신앙을 대가로, 나의 마음을 대가로, 나의 믿음을 대가로, 당신께 간절히 청하옵니다.]
한치의 더러움도 없는 깨끗한 맑은 신성이 담겨 있는 청아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 담아내는 기도는 평소의 성의 없는 기도와는 다른, 신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담겨 있는 신실한 사제의 기도다.
[나의, 당신의, 우리의 적을 물리치고,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축복을.]
아니에스의 전신이 몸에서 방출된 신성력으로 감싸며 새하얀 빛을 뿜어낸다.
[나의 여신께 간청합니다.]
[베스타의 축복]
[강신(降神)]
기도를 마치자마자, 소녀의 양손에 착용 되어있는 황금빛의 건틀렛.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기다랗던 머리카락은 신성의 힘이 작용해 하늘을 부유하고 떠다닌다.
그리고 소녀의 등 뒤로, 황금의 갑옷을 두르고 사자의 형상을 한 신성(神聖)의 집합체.
그것은 정령도 아니며, 신수도 아니다.
그야말로 신의 일부, 그 자체.
대륙에 존재하는 사제들 중에서, 가장 많은 신성력의 축복을 부여받은 존재이기에 발휘할 수 있는 위업이다.
유일하게 강신(降神)의 기적을 펼칠 수 있는 아니에스는 ‘신의 사도’인 은현을 제외하면, 대륙 안에서 ‘신의 사도’에 가장 근접한 인간.
“저것은….”
데르킨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강력한 신성의 기운이 증폭되어, 던전의 내부를 가득 채워나가는 것을 느끼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저분은 저래 보여도, 현 인류 중에서 최강이신 걸요.
신성력의 색깔인 백은이 아닌, 황금빛으로 휩싸여 있는 소녀의 기다란 금발이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위에서, 자신의 신자를 감싸고 있는 황금의 사자.
“자! 가즈아!”
아니에스는 호기롭게 마수의 무리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