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화 〉262. 마수 전선(5)
“누가 더 많은 마수를 처리하는지, 나랑 내기하는 거야! 내가 이기면 현이의 첫 번째 기사의 자리는 내 거니까 손대지 마!”
“…그딴 거에 어째서 목을 매는지 모르겠는데. 원한다면 가져라. 이런 유치한 싸움을 왜 내가 어울려줘야 하는 거지?”
“뭐야, 그 거만한 말투!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새치기나 해대고!”
“도저히 못 들어주겠군.”
엘빈은 1년 만에 재회한 여동생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어처구니 짝이 없는 이유로 자신에게 질투심을 불태우고 있는 에린의 모습에 기가 찼다.
그림자를 조작하여 무기를 형성하고, 마수의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이것 봐! 치사하게 말도 없이 먼저 시작해버리잖아!”
내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도 아닌데, 남매간의 내기는 이미 성립이 된 것으로 결정이 나 있었다.
먼저 마수의 무리로 뛰어든 엘빈을 뒤쫓아 에린 또한 달리기 시작한다.
“뭘 하는 거야. 저 두 사람은….”
느닷없이 영문을 모를 경쟁이 시작되자, 에이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1년 만의 재회라서 그런 걸까?”
질투가섞인 시선으로 성을 내는 에린의 표정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았다.
“고생했어.”
천천히 걸어오는 엘레노아가 에이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엘레노아님.”
오랜만에 보는 엘레노아의 얼굴을 보고, 에이라는 반가운 기색을 띄우던 차에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기를 망설였다.
“혹시 그분께서는….”
에이라가 언급한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들은 엘레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중심부로 향하셨어.”
“그렇군요….”
“후작님이 걱정이 되니?”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아무리 아버지가 강하시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괜찮아. 그 사람이 갔으니까.”
“그럴까요?”
이제는 남편이 된 사람에게 보내고 있는 엘레노아의 굳건한 신뢰에 에이라는 약간의 숨을 내쉬며 근심거리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엘레노아님은이제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요?”
“나는 곧장 요새 안으로 들어가서 중상자들의 치료를 하려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엘레노아의 사제로서의 역량은 고위 사제의 반열에 올라 베스타 신전 안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인물이다.
절단된 팔다리를 포함한 결손 부위를 복구시키고,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몸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엘레노아는 말 그대로, 성녀 후보에 걸맞는 수준.
“내가 왔다고 해도, 함부로 몸을 쓰면 안 된다?”
“명심할게요.”
에이라는 미소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크윽!”
마수와 교전을 벌이고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의 모험가가 발을 헛디디면서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에이라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카락의 모험가의 몸통을 물어뜯기 위해, 라이칸스로프 마수가 입을 쩍 벌린 순간.
크르륵!
에이라가 있는 힘껏 투척한 검이 마수의 눈에 정확히 박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데미지를 입은 라이칸스로프가 전신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난동을 부렸다.
“하앗!”
검은 머리카락의 모험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에 짧은 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빈틈이 생긴 마수의 복부를 자신의 검으로 찔러넣는다.
크르아악!
복부를 관통해 등 뒤로 튀어나오는 검신을 타고 마수의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검날을 비틀어 관통한 상처를 더욱 헤집어 놓자, 라이칸스로프의 비명과 저항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눈과 복부에 꽂혀있는 검은 상처를 더더욱 헤집어 놓으며 마수의 목숨을 갉아먹었다.
마침내 힘을 다해, 죽어버린 마수가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검은 머리카락이 모험가는 쓰러졌던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마수의 복부에 꽂혀있는 자신의 검을 뽑았다.
이내 에이라가 투척하여 마수의 눈에 적중했던 검까지 뽑아내고는 검이 투척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에이라를 발견하고 그녀에게로 달려가 에이라의 검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 복장은…아르티아의 기사이십니까?”
검은 머리카락의 모험가는 에이라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을 보고, 그녀의 소속을 알아맞혔다.
“네…? 저희 기사단을…아시나요?”
“입단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거든요.”
“아….”
쓰게 웃으며 자신의 과거의 이력을 밝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모험가의 말에 에이라다 당황했다.
“서, 성함을…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아르티아 기사단의 단원인 에이라라고 합니다.”
에이라는 자기 소개를 할 때면 가능하면, 자신의 성을 거론하지 않는다.
부모의 지원과 부정으로 자신이 입단했다는 쓸데없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요소를사전에 차단하기 위함.
검은 머리카락의 모험가는 에이라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한성.”
“네?”
“차한성이라고 합니다.”
“…….”
왠지 모를익숙함과 기시감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면서 에이라는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름의 울림을 듣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생각해보니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깔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는 머릿속에 떠올린 그 누군가와 비슷하다.
“…고대인?”
◆ ◆ ◆
“절대 안 질 거야아아!”
“…….”
여동생의 집착에 한심함을 느낀 엘빈은 에린의 말을 깔끔하게무시하고 전방에 존재하는 마수들을 응시하며 전장을 달렸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누구는 1년을 가까이 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는데, 오빠는 1년 동안 같이 생활한 거잖아! 나도 현이랑 같이 여행 가고 싶었는데! 꾹 참고 기다렸었는데!”
‘…누구와 대화를 하는 거지?’
내면에서 잔뜩 흥분한 에린의 기분을 어르고 달래고 있는 구미호의 노력을 엘빈이 알아챌 수는 없었다.
엘빈의 눈에는 자신의 여동생이 허공에 대고 잔뜩 짜증을 내는 광경이 미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중에 그 녀석에게 제대로 한번 상담을 해봐야겠군.”
엘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하고 마수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엘빈의 그림자가 점차 크기를 부풀려 나가며 전방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일대를 잠식한다.
‘지난번의 광역 공격은 마력의 소비가 너무 컸지.’
이전의 싸움 속에서 문제가 되는 자신의 능력의 단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계속 강구했다.
경험을 토대로 학습하고,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최적화시켜나간다.
[엘빈 고유 정령술]
[그림자의 늪]
크륵?
많은 모험가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던 마수들이 갑작스러운 지형의 변화에 의문과 당황에 찬 시선으로 행동을 멈칫하며 바닥을 내려본다.
마치 끈적거리는 늪지대처럼 마수들의 발을 집어삼키고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는 상황.
교전을 벌이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오로지 마수들만을 특정하여 바닥에 생성시킨 그림자의 늪 속으로 끌어당겨 집어삼켰다.
‘굳이 내가 다 처리할 필요도 없겠지.’
그저 마수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빈틈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단단한 지반이 아닌 흐물거리는 그림자의 늪에 빠지면서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는 마수들의 몸이 휘청였다.
일제히 보이기 시작한 마수들의 빈틈을 모험가들이 놓칠 리가 없다.
“으하아!”
호기롭게 무기를 내려찍어 마수의 머리를 깨부순 한 모험가의 행동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이 일제히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던 마수들에게 치명타를 남기며 처리해나간다.
그것은 엘빈 또한 마찬가지.
질주하는 자신의 팔에 힘을 실어, 손에 쥐고 있던 메이스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퍼억!
메이스로 머리를 얻어맞은 오크의 머리가 한순간에 살점을 짓눌러버리고, 내부의 두개골을 깨부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형씨, 대단한데!”
“뭐냐고! 저 멋쟁이 기사는!”
“이 그림자들은 자네의 작품인가?”
“…….”
휘파람을 불며 감탄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엘빈은 딱히 대꾸도 없이 묵묵히 남아 있는 마수들을 처리해나갔다.
“오…!”
“조용히 하라고 했을 텐데. 멍청이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네 그 못생긴 외모와 학습능력은 전혀 발전이 없는 거냐?”
“너, 너무해!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진 없잖아!”
다시 한번 에린이 ‘오빠’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려고 하자, 엘빈이 여동생의 철없음을 힐난했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오빠의 질책을 들은 에린은 억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이는…어디 있어?”
◆ ◆ ◆
“이야아~! 이렇게 모이는 건 진짜로 오랜만 아닙니까!?”
제라드는 정말로 오랜만에 맺어보는 팀업에 호돌갑을 떨며 말문을 열었다.
“후후, 그러게요.”
근 20년 만에 보는 얼굴들에 반가운 기색을 띄우는 것은 앨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은현과 일리아나, 엘레노아 이외에 인간을 보는 것은 엘프의 숲에서 결혼을 한 이후로 처음이다.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알았다니깐, 그리고 이 기회에 너희에게 소개해야 할 종족이 하나 있는데.”
굳이 ‘인간’이라 표현하지 않고, ‘종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은 간단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현의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자신의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틀어, 자신과 함께 이곳으로 온 남편, 데르킨을 소개했다.
“제 남편인 데르킨이라고 해요. 종족은….”
“앨리스, 그건 내가 직접 설명할게.”
앨리스의 말을 제지하고, 데르킨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귀에 걸려있던 귀걸이를 해제했다.
은현과 일리아나가 엘프인 데르킨과 에리스를 배려하여, ‘폴리모프’마법이 부여되어 특별히 제작한 귀걸이 마도구는 착용자의 외양을 설정한 대로 변형시켜준다.
두 엘프의 경우에는 뾰족하고 기다란 귀를 인간의 귀처럼 형태를 변형해주기만 해도 다른 인간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순식간에 둥글었던 인간의 귀의 형태를 하고 있던 데르킨의 귀가 납작하고 뾰족해지며 엘프의 특징이 도드라지는 형태로 변했다.
“귀가…?”
“서, 설마 엘프입니까!?”
남성임에도 장신이며,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름다운 미형, 게다가 기다랗고 뾰족한 귀의 특징은 역사서에 전승으로 내려오는 숲의 종족의 설명과 똑같았다.
데르킨의 정체를 처음 본 리오드와 제라드는 각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응했다.
이내 제라드가 침울한 기색을 보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앨리스마저도 결혼을…나만…어째서 나만….”
“야, 이 X끼야. 나도 결혼 안 했어.”
“아니에스 누님을 도대체 어떤 미X 놈이 데려가겠습니까?”
“이 X끼가?”
대놓고 디스를 하는 제라드의 간 큰 행동에 아니에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짜증이 난 아니에스가 제라드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힘을 주자, 손가락의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 같은 격통을 느꼈다.
제라드가 전신을 비틀며 비명을 지른다.
“끄아아! 죄송합니다! 손! 손 좀 풀어주세요! 부러져! 부러진다고요! 진짜로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
“형님드을! 일리아나 누님! 끄아아아!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경박한 태도로 매를 벌고 마는 가볍기 짝이 없는 말을 일삼는 제라드의 만행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
리오드는 물론, 일리아나까지 한심하게 쳐다보며 아니에스의 보복의 손깍지 공격을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지못해 은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둘의 중재를 했다.
“자자, 해후는 여기까지만 풀고, 나머지는….”
은현은 잠시 말을 끊고, 숲의 건너편의 중심부를 응시했다.
“저거부터 해결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풀자고.”
“동감이다.”
리오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가장 앞장을 섰다.
20년 전에 이루었던 팀의 대열의 배치를 잊지 않고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리운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앨리스까지 전선에 합류시켜 여섯 명의 영웅 중, 다섯 명을 다시 한곳에 불러모은 것은이번에도 은현이었다.
대외적인 리더는 리오드인 자신이 맡아 얼굴을 파는 역할을 전담했던 것을 제외하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은현이었다.
여섯 영웅 중, 다시 한번 집결한 영웅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숨겨진 영웅은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