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261. 마수 전선(4)
“문 열어! 어서!”
있는 힘껏 두들겼음에도, 거대한 철문은 소음은커녕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욕지기를 내뱉던 빌라드는 등 뒤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전장의 소리에 자연스레 위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깎아내며 마수들과 벌이는 교전은 수시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장 그 자체였다.
많은 것이 준비되고, 갖추어진 상태로 수도 근처의 하위급 던전을 답파하는 원정 속에서 조우했던 마수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 개체 수의 규모도, 뿜어내고 있는 불길한 오염된 마나의 양도, 모든 것이 난생처음 겪어보는 규격 외의 존재들로 가득한 이 광경.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어마어마한 수의 마수들의 위압감.
그 위압감에 짓눌려 갑옷을 입고 있는 전신이 갑자기 무거워지고, 호흡이 불규칙해진다.
“젠장…! 어째서 아버지는 나를 이번 원정에서 빼주지 않으신 거야!”
빌라드는 이렇게 된 상황의 원흉인 아버지, 오르바 백작의 명령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의도 자체는 간단하다.
변경백의 지원요청은 한 세대에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아주 드문 경우이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의미하여, 이 지원 원정에 참가해서 마수의 토벌에 조금이라도 공헌을 했다는 것만으로도,귀족으로써, 가문의 명예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바 백작은 아들이 이번 지원 원정에 참가해서 공훈을 쌓고 바닥으로 떨어진 오르바 백작가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번 지원 원정에 참가해서 공훈을 쌓고 와라. 한 번만 더 나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간, 그때는 정말로 각오해라.
작년에 있었던 마약 사건은 자신도 속아 넘어서 휘말린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설득하고 노력했지만, 오르바 백작이 아들을 바라보는 한심함과 실망으로 가득 찬 시선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잔뜩 열이 받아있었던 오르바 백작은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다면서 자신 때문에 재산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잃었다며 화풀이를 해대기 일쑤였고, 틈이 날 때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앞에서 빌라드를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갔다.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으로 가문의 수치 취급을 받게 되면서, 후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몰수당해 남동생에 빼앗긴 빌라드는 더 이상 집안에서조차 있을 곳을 잃어버렸다.
아이테르를 졸업하고, 1년이 지나 오르바 백작의 연줄로 크라시르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고, 그 결과가 지금 모그라프 변경에 있게 된 경위이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뭐하고 있는 거야?”
싸늘하기 짝이 없는 한 소녀의 목소리에 철문을 두들기며 안으로 들여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던 빌라드와 동료 신입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서서히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소녀의 모습을 발견하자, 빌라드는 표정을 굳혔다.
며칠 전,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격하여 3, 4개의 이빨을 깨지게 만들었던 에린이 레이피어를 쥔 채로, 자신을 포함하여 싸움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심지어 그때와는 또 다르다.
약 2년 전, 아이테르의 학생이었던 시절의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은백색의 아름다운 빛깔을 흩뿌리는 아홉 꼬리가 달린 여우 수인의 모습.
그때는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마력의 밀도를 뿜어내고 있는 구미호 소녀의 모습에 자동적으로 몸이 굳어졌다.
‘뭐야. 저 힘은…?’
처음 저 모습을 보았을 때는 어째서 저 힘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높은 마력.
그때나, 지금이나 타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빌라드는 그 원인을 눈치채지 못했다.
“싸우지 않는 거야?”
“……!”
“어째서?”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에린의 두 눈 속에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한심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너희들은 기사잖아. 왕국의 병사잖아. 어째서 도망치는 거야?”
까득
빌라드는 머릿속으로 치밀어오르는 짜증으로 이를 꽉 깨물고 에린을 노려보았다.
사제의 치료로 겨우 아물었던 잇몸 사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이빨이 있던 곳으로 바람이 새어 나온다.
“…너 때문이야.”
“응?”
느닷없이 중얼거리는 빌라드의 말에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때문이야. 다 너랑 엮이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됐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남자가 느닷없이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는 듯한 이 어이없는 사태에 에린이 기가 찬 시선으로 빌라드를 바라보았다.
이내 에린은그의 감정 상태를 읽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구나.”
자존심, 열등감, 분노, 수치심, 증오.
빌라드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감정은 하나 같이 스스로의 인생을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거무칙칙한 감정의 덩어리들뿐.
에린은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은 시간의 낭비라는 결론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이내 고개를 돌려 흘끗 빌라드를 비롯해, 싸움에서 도망친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내세울 수 있는 명예도, 누군가의 위에 설 자격도 없어. 뭐가 귀족이고, 뭐가 기사야?”
이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으로 지원을 온 사람들이, 맡겨진 역할을 내팽겨치고 도망을 치려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한심하다.
그것도 그들이 다름 아닌 우수한 혈통을 내세우며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귀족 가문의 자제라는것이 더 없는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깎아 내가며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데, 도대체 뭘까, 이 모습은.
도대체 뭘까, 이 감정은.
가슴 속에 치밀어오르는 이 짜증과 실망, 경멸로 어우러진 감정을 뭐라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 답답하다.
“거기서 보고 있어. 너희들이 얼마나 한심한지.”
그 말을 끝으로 에린은 고개를 돌려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서걱!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라이칸스로프의 몸을 베어 넘기고, 백귀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마수의 무리를 차근차근 정리해나갔다.
[미숙한 것,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나의 요술의 기초는 모두 꼬리에 축적된 마력을 근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첫 번째 형태가 바로 ‘여우불’이지.]
에린은 자신의 머릿속에 말을 걸어오는 구미호의 말에 일일이 대답을 해줄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수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려 나가면서, 모든 신경을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구미호가 말한 설명을 차곡차곡 받아들여 정리하고, 힘의 사용방법을 조금씩 익혀나갔다.
[백귀들의 소환도 마찬가지다. 그 소환의 시작은 고밀도의 마력을응집시켜 만든 여우불에 형태와 질량을 부여하고 계약한 백귀의 혼을 집어넣음으로써 소환의 과정이 끝을 맺고 눈앞에 현현하는 것이다.]
즉, 구미호의 모든 기술의 시작은 여우불의 발동부터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우불을 얼마나 능숙하게 조작하고 다룰 수 있느냐에 따라서, 네 녀석이 사용할 수 있는 요술의 위력과 효용 범위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크르륵!
이족보행의 수단을 버리고, 사족보행을 통해서 한 라이칸스로프가 에린을 향해 달려왔다.
발로 걷어차는 타격만으로도, 맞은 부위를 찢어버릴 수 있는 살인적인 각력으로 땅을 박차며 달려오는 속도는 어마 무시할 정도다.
하지만 에린은 두려움에 몸을 떨지 않았다.
[그 검에 네 여우불을 부여해보아라. 마력을 불어넣고 형태를 유지하여, 검신 전체에 기운이 고루 퍼지도록.]
구미호의 가르침대로 실행하여 레이피어에 여우불을 불어넣자, 화르르 불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에린의 팔부터 레이피어 전체를 감쌌다.
크르르!
어느샌가 근접하여 사정거리 내로 들어온 라이칸스로프가 그대로 에린의 머리를 몸통에서 찢어버릴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허리를 비틀어 유연하게 피해낸 에린은 가느다란 레이피어의 칼날이 라이칸스로프의 목을 꿰뚫었다.
크륵!
목을 꿰뚫려 입속에서 피를 내뿜던 마수의 피가 푸른 불꽃에 휩싸여 그대로 증발한다.
부르르 떨던 늑대형 마수의 전신이 그대로 불타오르면서, 흉흉한 눈빛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에린을 공격하기 위해 손을 내뻗었지만.
“하앗!”
관통한 상태로 레이피어에 힘을 주어 아래로 내려찍자, 말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단 한 번의 베기로 질긴 가죽과 살점, 뼈를 통째로 갈라버리는 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구미호의 조언대로 레이피어에 부여한 신수의 힘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이 개방한 신수의 힘을 모조리 받아 들여주고 있는 이 검의 성능이 진짜 이유.
“굉장해….”
에린은 넋을 잃고 푸른 불꽃으로 휩싸여 예기를 뽐내고 있는 가느다랗고 새하얀 검신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사용했었던, 이미 부러져버린 레이피어보다도 더욱 험악하고 과격하게 사용했음에도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검신은 찬란하게 빛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은현이 선물해준 이 레이피어가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지, 에린은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고마워.’
[흥, 이제 와 무슨 감사를….]
‘정말로 고마워. 정말로 좋아해! 현아!’
[…이런 괘씸한 년.]
자신의 힘의 일부를 사용하면서, 드디어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줄 알았던 구미호는 에린의 마음속에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은현에 대한 고마움으로 몸둘 바를 모르며 정신이 없던 에린은 마지막에 중얼거린 구미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구미호의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며 마수들의 정리가 더욱 수월해지던 찰나, 눈앞에 보이는 에이라를 발견하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언니이이이이!”
“에, 에린!?”
에이라는 목청을 높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녀가 달려오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른 불꽃을 두른 레이피어를 휘두르며 마수들을 압도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광경은 굉장히 기이한 광경이다.
“언니!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
과하게 걱정해주는 친한 동생의 모습에 에이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힘, 결국 모두 보는 앞에서 보이기로 결심했구나.”
“네.”
밝게 미소짓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기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웅
그리고 느닷없이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에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파동이 느껴진 방향을 바라보며 정체를 확인했다.
그 정체를 눈치챈 한 모험가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텔레포트라고…?”
대륙에서 여덟 자릿수의 고위 주문 마법을 쓸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고위 마법진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인영을 발견하고 에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셨구나.”
“아…!”
화려한 금발과 성스러운 사제복을 입고 있는 여성과, 검은색의 짙은 후드로 얼굴을 포함해 전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은, 에린이1년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 해서 그리워했던 사람들이다.
“엘레노아님! 오…!”
“쉬잇.”
반갑게 자신의 오빠를 부르려던 에린의 말을, 엘빈은 검지를 자신의 입가에 가리키며 막았다.
정령으로 되살아났다고는 하지만, 아르티아만이 엘빈의 부활 사실을 알고 묵인해주고 있을 뿐이지, 엘빈의 부활은 왕국에서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다.
“엘빈. 부탁할게요.”
주위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엘빈은 고개를 주억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알겠습니다.”
엘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의 후드가 점차 변형을 일으키고, 전신을 감싼 그림자는 점차 칠흑의 갑주로 변형되어 암흑 기사의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저게…?”
에린은 요 1년 사이에 자신의 오빠에게 일어난 급격한 변화에 놀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과 계약을 맺었어.”
“…계약?”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다는 주종의 서약을.”
그것을 말하는 엘빈의 모습은 정말로 주군을 모시는 충직한 기사와도 같았다.
엘빈의 말을 들은 에린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치사해.”
“뭐라고?”
“치사해! 현이의 첫 번째 기사는 내가 될 생각이었는데! 왜 그걸 새치기해서 오빠가 빼앗아 가는 거야!”
“이 멍청이가! 조용히 해!”
방금 전까지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서는 안 된다고 몇 초 전에 여동생에게 주의를 주었건만, 여동생인 에린은 시원하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까발려버렸다.
엘빈은 혹여나 왕국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채지는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아야 했다.
“심지어 뭐야, 그 갑옷은! 오빠 주제에 엄청 멋있잖아! 재수 없어!”
“아, 닥치라고!”
영문을 모르겠는 질투심으로 폭발해버려, 잔뜩 이성을 잃은 에린의 폭주에 짜증이 난 엘빈이 마침내 욕을 내뱉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특별한 형태로 다시 재회하게 된 남매의 대화는, 예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싸움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