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260. 마수 전선(3)
콰앙!
성벽 위에서는 일리아나의 제자인 유리아 왕녀를 필두로 많은 마법사들이 후열의 마수의 무리를 향해 공격 마법들을 퍼부어 댔다.
그리고 전열의 마수들과는 많은 병력들과의 근접전을 통해 치열한 교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서걱
에린은 또 하나의 마수의 머리를 베어 넘기고, 자신보다 거대한 크기의 마수의 시체를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수들의 포효, 사람들의비명, 무기가 살을 베는 소리, 폭염 계열의 마법의 여파.
다양한 요인들로 소음으로 귀가 어지럽고, 시야가 뒤흔들린다.
많은 마수들을 베어 넘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수들과의 교전이 시작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들을, 변경 요새의 병사들은 보름이 넘도록 지속을 해왔다는 뜻.
“젠장! 더는 못해 먹겠어!”
“열어줘!”
“살려주세요! 제발!”
에린은 간절한 외침의 목소리에 이끌려 굳게 닫힌 성문 쪽을 응시했다.
휘황찬란한 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 몇몇과 병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바닥에 버리고 성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이다.
“뭐…하는 거야. 지금…?”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에린이 중얼거렸다.
저 갑옷과 무장들은 분명히 왕국군의 병사들과 크라시르 기사단원들이다.
계속 싸워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이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지금 전선에서 빠진다면, 빠지면서 생기는 공백은 누가 채우라고?”
“크아악!”
“끄아아!”
에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힘겹게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왕국군 진영 쪽을 응시했다.
마수들과 교전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 속에서, 에이라의 모습이 에린의 두 눈에 들어왔다.
“도우러 가야 하는데….”
반사적으로 에이라와 아르티아의 단원들을 돕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던 에린은 순간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멈칫했다.
크르으!
“……!”
다른 짐승보다 유난히 팔다리가 길면서, 이족보행을 하고있는 늑대형 마수, 라이칸스로프가 에린의 팔을 뜯어먹기 위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순간 자신의 뒤를 노리는 마수의 공격을 감지해내고 몸을 회전시켜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쩍 벌린 입을 시작으로 아예 두동강을 낼 기세로 휘둘렀지만, 라이칸스로프는 벌렸던 자신의 입을 다물며, 입을 베려던 레이피어의 칼날을 깨물었다.
쩌적!
“아…!”
마수의 턱에 가해지는 어마 무시한 힘에 의해, 위태위태했던 자신의 레이피어의 내구가 한계를 맞이해 깨져버렸다.
“이…게!”
[호족요술(狐族姚術)]
[여우불]
키아악!
황급히 손에 여우불을 생성시켜 마수의 몸체에던져버리자, 푸른 불꽃에 휩싸인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불태워졌다.
“내 검이….”
부러져버리면서 더 이상 무기로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린 레이피어를 바라보고,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언니는….”
이내 다시 다른 진영에서 힘들게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에이라와 아르티아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에린은 고민에 빠졌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은현이 선물해준 또 한 자루의 레이피어에 시선이 갔지만, 이 검은 자신의 수준으로는 뽑을 수 없다고 구미호가 단언했다.
게다가 자신이 전선을 이탈하게 된다면, 자신의 공백은 아르미타스의 병사들과 모험가들이채워야 한다.
이게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을 친 왕국군 병사와 기사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도망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간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전선을 이탈하는 것은 맡겨진 역할을 내팽겨치는 무책임한 행동이기도 하다.
에린이 머릿속으로 그 딜레마 속에 빠져 있을 때.
“에린!”
자신을 부르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에린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스의 얼굴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도우러 가고 싶다면 도우러 가도 상관없다고 알렉스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에린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뭘 하고 싶은 거지?”
자신은 이 원정에 어째서 참여를 했던 걸까.
원초적인 그 이유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가지고 있는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영웅의 말이다.
-명심해. 에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수의 힘을 사용하게 되는 건 가능하면 피해야 해. 많은 사람들이 네 힘과 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보다 더한 검은 속내를 품으며 다양한 목적으로 너에게 접근할 거야.
신수의 힘은 평범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력보다 한 단계 높은 질을 가진 순도 높은 고밀도의 마력 그 자체다.
이 힘이 2년 전, 에린이 구미호의 힘을 각성시키자마자 왕국에 발견이 되었다면, 틀림없이 정신적으로 미숙한 에린을 이용해서 소녀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때 그 사건 속에서 애슈턴의 생기를 모조리 빨아들였던 구미호의 상태의 에린을 은폐시키고, 모든 것이 악마의 소행으로 꾸몄다.
-그럼 나는 남들 앞에서 평생 이 힘을 쓰면 안 되는 거야?
쓴웃음을 지으며 상냥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던 은현의 손길을 떠올린다.
-그런 뜻이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어른이 되었을 때는 써도 되려나?
-어른? 으음…19살이 되면 써도 된다는 거야?
처음 신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은현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구미호의 힘을 꺼내 쓰는 것을 제한했다.
-언젠가는 네 곁에 내가 없는 순간이 올 거야.
-…싫어. 아무 데도 가지마.
에린은 그런 상황의 가정을 상상하는 것도 싫었다.
-그런 순간은 반드시 와. 그때가 되면은 네가 모든 걸 결정해야 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지. 누구도 너에게 답을 제시해주지 않아. 네가 스스로 그 답을 찾아 나가야 해.
-계속 네가 나를 이끌어주면 되잖아. 지금처럼.
인상을 살짝 쓰며 은현의 몸을 꽉 끌어안고는 찰싹 달라붙어 있는, 17살 당시의 에린은 그저 그에게 잔뜩 어리광을 부릴 뿐인 의존성이 과한 소녀에 불과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결과를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그게 어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야.
-너는 그 녀석이 없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는 어린애인가?
“아.”
은현의 말에 이어, 은현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속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 본 알렉스의 지적을 떠올리고 작게 탄식했다.
‘…어른의 의미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에린은 자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신수의 마력을 해방시켰다.
“…하자.”
공식적인, 많은사람들의 앞에서 이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선택이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는 에린은 상상할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이런 상황에서 신수의 힘을 개방시키는 것은 최대한 자제하라는 은현의 충고를 떠올렸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기주장의 결여는 과도하게 은현에게 의존적인 성향을 보이는 에린의 단점 중 하나다.
처음으로 은현의 조언을 거역하고, 에린은 마저 남은 신수의 마력을 해방시켜 완전한 구미호의 상태로 자신의 몸을 변화시켰다.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휘몰아치고 에린의 주위를 감싸던 밀도 높은 마력들이 에린의 몸에 응집되기 시작하면서, 은백색의 아홉꼬리와 여우귀가 나타난다.
동시에 꼬리에 응집된 마력들을 활성화시켜, 백귀들을 소환했다.
[호족요술(狐族妖術)]
[백귀야행(百鬼夜行)]
‘현이는 말을 듣지 않은나한테 화를 낼까? 실망…하려나?’
불안한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지금의 자신의 이 선택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지금만큼은,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을 뿐이다.
[아직도 미숙하지만…조금은 성장했군.]
“응? …미호야?”
갑작스레 자신의 머리속에 말을 걸어오는 구미호의 중얼거림에 에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날 공경할 줄 모르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그 녀석의 의도에 넘어가 주도록 하지.]
철컥!
“어…? 설마….”
무언가의 잠금장치가 해제된 소리를 들은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은현이 준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쥐고 검집에서 검을뽑았다.
스르릉
매끄럽게 뽑혀져 나오는 레이피어의 아름다운 검신을 바라본 에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워….”
[정신 차려라! 미숙한 것! 지금이 전쟁터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잊은 거냐!]
“응? 아! 그, 그렇지!”
[그리고…이번 일은 좀 기특하니, 특별히 칭찬해주도록 하지.]
몸속에 내재 되어있던 신수의 힘이 한층 더 증폭되기 시작한다.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기도 전에,갑작스러운 변화는 곧장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살랑거리는 자신의 꼬리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마력의 덩어리들은 총 아홉 개.
“어…? 아, 아홉분들이 모두!?”
자신의 역량의 부족으로 세 명까지 밖에 소환할 수 없었던 백귀들이 아홉 명 모두 소환이 되자,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다.
에린을 제외하고, 이 정도의 마력의 조작을 간섭할 수 있는 존재는 본래 이 신수의 힘의 주인인 구미호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호야…혹시 네가…?”
[전투 중에 딴생각을 품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 알았어.”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푸른 불꽃의 갑주들로 둘러싸인 백귀들을 보며 일제히 명령을 내렸다.
“여섯 분은! 마수들을 모두 처리하고,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명령을 부여받은 백귀들이 어린 주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뿔뿔이 흩어져 최전선의 마수들을 습격하고 모험가와 병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뭐야!?”
“우리를 돕고 있는 건가?”
갑작스레 난입한 푸른 불꽃의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무기를 휘둘러 마수들과 교전을 벌이자, 한창 싸우고 있던 와중인 모험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것으로 여섯 명의 백귀의 지원으로 자신의 부재로 인한 공백은 메워지는 것은 물론, 교전이 한층 수월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신체를 강화시켜 빠르게 질주하면서, 에린은 전반적으로 상승한 자신의 신체 능력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몸이…가벼워….’
[당연하지. 그건 네가 쥐고 있는 그 검에 부가된 능력이다.]
‘현이가 선물해준 이 레이피어가?’
[전에도 말했을 텐데? 그 검은 신철(神鐵)이라고 불리는 오리하르콘이라는 광석에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을 불어넣어 제련시키고, 많은 기술의 정수가 담긴 끝에 탄생한 무구라고. 인간이 제작했다지만, 그 검의 성능 자체는 이미 성검에 준하는 반열에 오를 정도다.]
‘그, 그렇게 대단한 무기였단 말이야…!?’
구체적인 예시로 성검을 예시로 들자, 에린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검보다 조금 못 미친다는 무기라니, 에린은 순간 구미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말했지 않느냐. 그 검의 가치도 제대로 모르면서 뽑지 못하는 검이라고 투덜거리다니, 돼지 목에 걸려있는 다이아 목걸이라는 비유도 아까울 정도군. 돼지 이하, 가축도 아닌 미물 수준의 지능이야.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군.]
‘네 말은 항상 가시가돋쳐있어서 아파! 진짜 너무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구미호의 말에 상처받은 에린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달리고 또 달렸다.
세 명의 백귀들을 대동하며 일직선으로 곧장 질주하는 사선 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수들을 베어 넘기면서, 마수의 신체를 채소를 썰 듯이 매끄럽게 절단시키는 레이피어의 절삭력에 에린이 또 한 번 경악했다.
‘대체 뭘 선물로 준 거야 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