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252. 긴급 의뢰(3)
[그렇군요.]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은 수정구슬 너머의 엘레노아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에린과 함께 모래 출발하시는 건가요?]
“그럴 예정이지.”
저택을 찾아온 에린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소녀와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수정구슬을 통해서 은현에게 보고할 생각이었지만, 교신에 응한 것은 은현이 아닌 알렉스의 여동생인 엘레노아였다.
“그 반응을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군.”
그간의 상황과 에린의 이야기를 전달받은 엘레노아가 모그라프령에 마수의 스탬피드가덮쳤다는 이야기에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알렉스가 이미 짐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뭐…그 녀석이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과정은 파악하고 있었겠지.”
흑랑단도 부하로 들이고 있는 이상, 일련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은현이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둔 게 있는 건가?”
혹시라도 있다면, 자신 쪽에서 그 계획을 도울 수 있는 움직임을 취할 수 있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알렉스는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점이 있다고 했어요.]
◆ ◆ ◆
던전 주택의 지하 시설, 대장간과 연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방에서에린은 눈앞의 인형 소녀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
“에, 에밀리아…혹시 화났어?”
“본 개체는 화났다는 감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니, 그 표정은 누가 봐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고운 외모의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입술이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나 심통 났어요.’라는 표정이다.
“서브 마스터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제작된 ‘옵티머스’의 성능시험은 혹시 모를 결함 여부와 정상 작동 여부를 테스트하는데 알맞은 기회입니다. 또한 본 개체의 막강한 화력은 마수와의 섬멸전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여지가….”
“안 돼. 이곳에서 아이들을 지켜줘.”
“…….”
내일이면 알렉스는 공작 가문의 기사들을 동원한 사병들을 이끌고 긴급 의뢰를 수주한 모험가들과 함께 모그라프령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는 에린,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으며, 절반 이상의 병력이 빠지는 만큼공작령의 치안은 그만큼 위태위태해지는 것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설이었다.
알렉스의 출정으로 공작령은 비공식적으로 은퇴가 결정되었던 그의 아버지인 아브로스가 영지를 맡게 되었다.
아직까지 과거의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브로스는 아들의 부탁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자리를 비우는 동안은 누군가의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것에 적임인 사람은 아브로스 뿐이었다.
비공식적인 은퇴가 결정되었을 뿐이지, 외부의 사람들은 아브로스의 은퇴 사실을 모른다.
이 상황에서 아브로스가 다시 영지를 맡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감춘 의미가 없어진다는 점을 어필하여 아브로스는 마지 못해 알렉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 상황 속에서 에린은 에밀리아에게 많은 고아들이 있는 보육원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부탁할게. 에밀리아.”
에린은 ‘약자’의 입장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약자들이 위험에 노출된다면 얼마나 무력하게 비참한 꼴을 당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알렉스의 갖은 노력으로 공작령의 치안이 굉장히 좋은 편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외부에서 유입된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진 모험가들이 많은 편이기도 했으며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을 비롯한 사병들은 출정으로 절반 이상의 공백이 생긴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가능성을 염두해두며, 에린은 에밀리아를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서 릴리와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한 명령이다.
게다가 에밀리아를 전선에 데려갈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존재했다.
흘끗 고개를 올려다보며 배치되어 있는 거대한 강철의 거인형 골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런 걸 공개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저것이 현재 은현이 개발하고 있던 비밀병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은현의 계획 속에도 저런 규격 외의 성능을 가진 골렘을 공개적으로 선보이는 시점이 지금이 아니라는 것즈음은 에린도 알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옵티머스’라는 골렘을 한시라도 빨리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은현이 없는지금 인형소녀를 제어해야 하는 것도 에린의 몇 안 되는 에린의 역할 중 하나였다.
뭔가 에밀리아의 내부에 존재하는 ‘감정’이라는 요소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는 감상을 느끼면서, 에린은 ‘옵티머스’라는 골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골렘을….’
보기 드물게 남자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애매모호 한 말을 늘어놓으며 은현이 에밀리아와 함께 골렘의 제작에 열을 올리는 것을 일리아나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때가 아직도 두 눈에 선하다.
“아. 아무튼 부탁할게?”
이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황급히 정신을 차린 에린은 에밀리아에게 재차 당부의 말을 전했다.
“…명령을 수락합니다.”
“응. 고마워. 곧바로 릴리 언니에게로 가줘.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와 아이들 한 명도 다치게 해서는 안 돼.”
마지못해 뚱한 표정으로 명령을 수락하는 에밀리아의 반응을 확인한 에린은 기쁜 미소를 짓고는 공방을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눕기 전에, 책상 옆에 놓여 있는 레이피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좋아. 한 번 해보자.”
결심이 서자마자 곧장 침대 위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키고는 책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된 표정으로 레이피어를 집어 들고는 크게 숨을 들이켜 있는 힘껏 검집 속에서 레이피어를 뽑았다.
하지만 움직이기는커녕 미동도 하지 않는 레이피어는 검집 속에서 뽑히지 않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은현이 직접 제작하여 선물해줬던 레이피어는 가느다란 자신의 검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아…역시 안 되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지? 지금의 네 수준으로는 그 검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뽑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아놓고는….”
무작정 ‘지금의 너로는 불가능하다.’라는 말 만을 반복하는 구미호의 말이 굉장히 야속했다.
기껏 받은 무기를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방 안에 방치를 해둬야 하는 신세라니, 에린은 적지 않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현이는 어째서 뽑지도 못하는 검을….”
처음에는 은현에게서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 뛸 듯이 좋아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신에게 이런 무기를 선물한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어 답답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흥, 그 검을 받았을 때, 어째서 곧장 뽑아보지 않았던 거지? 그때 그 녀석에게 직접 조건을 물어봤더라면 됐을 텐데.]
“윽….”
구미호의 지적에 그저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 마냥 좋아하기만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그 검은 지금의 너에게 준 선물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미호야?”
[공경을 담은존대로 나를 대하라고 했거늘….]
육체가 있었다면 구미호는 몇 번을 이야기해도도저히 고쳐먹지 않는 에린의 태도에 자연스레 이를 갈았으리라.
20살도 먹지 않은 어린 소녀를 데리고 화를 내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며 속이 좁은 면모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구미호는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지금의 너가 아닌, 성장했을 미래의 네가 쓸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무기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네 수준으로 검을 뽑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게 도대체 언젠데?”
[글쎄. 그건 네 하기에 달렸겠지.]
“설명이 너무 불친절해….”
[흥,그 검이 무엇으로, 누구의 손으로, 어떤 제련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너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검이다.]
“응? 현이가 만들어준 거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다.]
구미호는 자신의 힘인 신수의 잔재가 어째서 이런 소녀의 몸 안에 들어가게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설명을 개시했다.
[잘 들어라. 먼저 그 검의 재료는 평범한 철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속 중 하나로 신철(神鐵)이라고 불리는 오리하르콘이라는 광석으로 제련된 철이지. 그리고 그 철을 몇십, 몇백 번을 두들겨서 양질의 신성으로 가득 채워 제작된 무기가 바로 그 검이다. 아무런 가치도 모르는 네 녀석 같은 핏덩이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먼저….]
“아니, 아무튼 현이가 엄~청 노력해서 만들어준 무기라는 거잖아.”
[…….]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에린은 은현이 직접 제작해준 레이피어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기와 사용자 간에 벌어져 있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원인이다.
아무리 성검 급으로 제작된 터무니 없는 스펙의 검을 손에 쥐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본인이 무기에 대한 이해와 자각이 부족하다면, 돼지 목에 다이아 목걸이를 걸어준 것만큼이나 쓸모가 없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은현은 ‘지금의 에린’이 아닌, 크나큰 성장을 이뤄냈을 ‘미래의 에린’을 위한 무기를 제작하여 선물한 것이다.
[일단…챙겨라.]
“응?”
에린에게는 에린의 역량이 부족해서 검을 뽑을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그 설명은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설명이다.
어째서 은현은 에린에게 성검 급의 스펙을 지닌 레이피어를 에린에게 선물했으면서, 그 레이피어를 사용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검집 속에서 검을 뽑을 수 없도록 걸어둔 장치를 해제시킬 수 있는 방법은 구미호도 대략적으로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 방법을 에린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은현의 의도를 깨달은 구미호는 자신을 이 판에 끌어들이려는 은현의 속내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여신의 사도’라고는 하지만, 지구의 문명이 존재했을 때부터, 천년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며 셀 수 없을 만큼의 마력을 쌓아 자기수양을 정진했던 신수를, 한낱 인간이 이용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것을 감추기는커녕 다분히 드러내는 당당함이 불편했다.
[건방진 것….]
“…나 말이야?”
[네 녀석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너는 혹시 모르니, 그 검을 가져가도록 해라.]
“아니, 이거 못 뽑잖아….”
[이번 출정을 통해서 네 녀석이 또 한차례 성장을 이뤄낸다면, 그 검을 뽑게 되어 활용할 수도 있으니, 챙겨두도록 해라.]
“으응? 이 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그걸 미호, 네가 어떻게 알아?”
[설명해줘도 일일이 이해하지 못할 녀석이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설명하는 것조차 귀찮았던 구미호가 짜증을 부리자, 에린은 입술을 삐쭉 내밀려 툴툴거렸다.
“설명 안 해줄 거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지, 맨날 나한테 성질만 내. 못됐어. 진짜.”
천년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며 자기 수양을 통해 영험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전혀 믿겨지지가 않는다.
‘진짜 속 좁아.’
투덜거리는 에린의 무의식을 읽어낸 구미호가 다시 말을 걸었다.
[다 들린다. 미숙한 것.]
“흥! 들으라지. 뭐! 어쩔 건데!”
[이 건방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