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249. 모험가 에린(3)
“…….”
남성 모험가는 생각지도 못한 에린의 당당함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저씨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이곳에 정말로 한 명도 없었을까요?”
“그건….”
“가서 다 말씀드리세요. 제가 아저씨를 때렸다고 항의할 수있는 건 다 하세요. 대신….”
잠시 말을 끊은 에린이 꺾어버린 남성 모험가의 중지 손가락 옆, 검지 손가락을 쥐었다.
우드득
“크아악!”
인정사정없이 검지 또한 중지와 같이 꺾어버리는 잔혹함은 아까까지 헤실헤실 웃는 표정을 지으며 밝은 모습 보였던 소녀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이전의 에린이었다면, 불합리한 악의와 폭력을 당하면서도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그저 몸을 웅크리며 자기 자신을 감쌌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 악의와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있으며, 자신을 믿어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힘이 되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면, 강하게 저항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이제는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고, 에린에게 강한 용기를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와 폭력에 순응하지 않고, 참지도 않는다.
에린은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다 말할게요. 아저씨가 저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끄으으! 나는 공작 가문과 계약한 몸이야! 너처럼 새파란 어린애의 말과 내 말 중에서 당연히…!”
언제나 똑같은 반론.
수작을 걸려는 사람만이바뀌었을 뿐, 거는 수작의 방법, 반론들은 하나 같이 똑같다.
“그러니까 해보시라고요. 공작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지. 저도 궁금하니까.”
우드득
중지와 검지에 이어, 마침내 약지 손가락까지 역으로 꺾이면서 최후를 맞이한다.
“크아아!”
세 개의 손가락이 역으로 꺾여버리기까지, 남성 모험가는 에린의 손에서 벗어나기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으나, 그러지 못했다.
“저는 공작님이 제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저씨의 생각은 어떠세요?”
에린은 현재 공작 가문에서 모든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소공작, 알렉스가 다수의 모험가들을 스카웃하여 공작령의 모험가 길드에서 활동하도록 조치를 한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알렉스와 공작령에 민폐가 될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에린은 이것이 민폐가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알렉스가 모험가들이 일정 기간을 공작령에 거주하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을 진행하면서까지 스카웃을 제의하여 데려온 것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빈번해지는 마수의 출현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되먹지 못한 인성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모험가의 존재는 공작령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민폐밖에 되지 않는다.
“애초에 아저씨, 정말로 공작 가문과 계약한 사람 맞아요?”
심지어 스카웃 제의를 받지 않고 공작령으로 넘어와, 공작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모험가 길드에 다양한 혜택을 주장했던 모험가들도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이 꺾이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남성 모험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반응을 정확히 캐치해낸 에린은 남성 모험가가 정식으로 공작 가문과 계약을 맺고 이곳으로 온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지금 당장 저택으로 가서 확인을….”
“이, 이거 놔!”
꺾어버린 손가락을 쥐고 있는 손의 힘이 느슨하게 풀어지자, 황급히 손을 흔들어 에린의 손을 뿌리친 남성 모험가가 헐레벌떡 뒤를 돌아서 출구를 향해 뛰어갔다.
그 순간.
“멈춰라!”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나 출입을 통제당하자, 손가락이 꺾인 남성 모험가가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남성 모험가의 인상착의를 쓱 훑어보며 확인 과정을 거친 기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이 맞군. 연행해.”
“예!”
가장 지위가 높은 것으로 보이는 기사가 손짓하자, 포승줄을 꺼내들어 남성 모험가의 손과 팔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이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나는…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저계집애…! 저 계집애를 체포해! 내 손가락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갑작스러운 체포에 당황한 남성 모험가가 꺾여져 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들이밀며 기사들에게 항의했다.
“이건…누가 그랬지?”
역으로 꺾여져 있는 손가락을 확인한 기사가 모험가 길드의 내부를 훑어보자, 가장 중앙에 서 있었던 에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눈을휘둥그레 떴다.
“에린?”
“아, 메르딘님. 안녕하세요.”
놀란 표정으로 에린을 발견한 메르딘에게 에린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냈다.
아까까지 당당하면서도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모습과는 다른, 맨 처음의 발랄한 분위기로 돌아온 소녀의 모습이다.
“네가 이 녀석의 손가락을 이렇게 만든 거냐?”
“네.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아니, 그건 안다만….”
“공작가문과의 계약한 능력 있는 모험가라고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여성 신입 모험가들을 속여서 악독한 수법으로 파티에서 피해를 입도록 상황을 조장하고, 빚을 지게 만들었어요. 피해자는 총 세 명. 그 중 한 명은 이미 노예로 팔았고, 다른 두 명은 현재 저 사람의 집에 갇혀 있어요.”
“그, 그걸 네가 어떻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비밀을 에린이 줄줄이 말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모험가들과 기사들은 물론, 그 범죄를 저질렀던 남성 모험가까지도.
두 눈을 부릅뜨며 에린을 바라보았다.
“헤헤, 방법은 비밀이에요.”
신수의 힘을 밝힐 수 없는 것에 멋쩍어진 에린이 실실 웃으며 이야기를 얼버무리자, 메르딘은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알았다. 뭐, 그 녀석의 제자인 네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정확한 정보를 말했을 리도 없으니까. 지금은 고맙단 말만 해둘게.”
“네! 수고하세요!”
“젠장, 젠장!”
에린을 보며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르미타스 기사들에 의해 연행되어 길드 밖으로 나가자, 에린이 작게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우…. 여러분,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아가씨! 덕분에 재미있는 걸 봤다고!”
“그러게! 그런 쓰레기였다니. 같은 여성 모험가로서 자랑스럽네!”
“아까 그 자식의 범죄 사실은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헤헤. 감사해요! 아!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비밀이에요!”
순전히 감탄을 비롯한 다양한 호의를 받은 에린은 부끄러우면서도 자신을 칭찬해주는 이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았다.
이 사람들이, 이 장소가, 이 시간이 지금의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테르에 있었을 때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뿌듯함과 바닥을 기어 다녔던 자존감이 조금씩 자각도 없이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아까 전의 남성 모험가가 보내왔던 악의와 시기, 질투의 감정들을 가진 모험가들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에린은 슬쩍 구석으로 시선을 옮겨, 트리샤와 소재를 교환할 때, 자신의 험담을 했던 모험가들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 몸이 떨리며 위축되면서 자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피하는, 험담을 퍼부었던 모험가들.
“흥.”
저렇게 위축되서 스스로 시선을 피할 것이었으면 어째서 자신을 욕했던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코웃음을 쳤다.
에린은 저런 사람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자신의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이내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높이 들어 올렸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으니까, 오늘 여러분들의 술값은 제가 살게요! 짜잔! 저 오늘 돈 많거든요!”
“와아아아아!”
“역시 아가씨는 베포가 크군! 으하하하!”
에린의 골든벨 선언으로 시끌벅적했던 길드 내부에 마련된 술집 테이블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환희로 가득 찬 시끄러운 모험가 길드의 건물을 나온 에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길거리를 걸었다.
“후우….”
돈주머니가 굉장히 가벼워졌지만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부에 들어서 있던 술집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인원이있었다지만, 골든벨선언을 당당하게 선언한 것 치고 지불한 비용은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이가 어린 소녀의 돈으로 술을 얻어먹는다는 것이 마음이 걸렸던 부분이기 때문일까, 모험가들은 에린에게서 1인당 딱 술 한 잔 분의 값만을 받아들였다.
“히히, 진짜로 재미있는 아저씨들이야.”
오늘 번 돈의 절반을 가까이 무작정 써버린 과소비였지만 이상하게도 써버린 만큼 마음속이 충족된 기분이었다.
“시간은…좀 애매하네.”
에린은 아직 해가 떠 있는 하늘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저녁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대로, 공교롭게 날씨까지 굉장히 좋다.
무엇보다도 현재 은현도,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도 없는 쓸쓸한 집에 빨리 돌아가봤자, 잔뜩 들뜬 지금의 기분의 반동으로 외로움과 공허함만을 느낄 뿐이다.
“현이 보고 싶다….”
뿐만이 아니라 함께 신혼여행을 떠난 일리아나나, 엘레노아의 얼굴도 못 보게 된 지, 근 1년이 다 되어 간다.
“…보육원이나 갈까.”
그리 생각을 마치고, 최근 마음을 터놓게 되어 친하게 지내게 된 여성을 떠올렸다.
“릴리 언니나 만나서 같이 집에 들어가야겠다.”
결심을 마친 에린은 발걸음을 옮겼다.
“돈도 좀 남았고, 맛있는 거나 사서 애들 좀 먹일까?”
의뢰를 완수하고 대량의 마수 소재들을 팔아치운 덕택에, 품에 가지고 있는 주머니는 매우 두둑했다.
이동을 하던 도중, 눈앞에 보인 빵집을 응시하고 기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해줄 어린 애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문을 열자마자 주방에서 흘러나온 매우 따뜻한 갓 구운 빵 냄새가 에린의 식욕을 자극했다.
“어서 오세요!”
자신을 맞이하는 빵집 주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빵 냄새를 맡던 에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이거야!”
“…네?”
느닷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리치는 소녀의 외침에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이하려던 빵집 주인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아저씨! 지금 빵 막 구우신 거죠?”
“예? 예. 뭐 그렇습니다만.”
잔뜩 기대감이어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방의 테이블 위에 진열된 갓 구운 빵들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을 했다.
“저거 다 주세요!”
“…예?”
느닷없는 대량 주문에 빵집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빵집 안으로 들어온 에린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행색으로 보아, 평범한 소녀 같지는 않아 보였고, 허리춤에 찬 가느다란 레이피어를 보고 모험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소녀가 혼자서 주방 위에 진열된 수십 개의 갓 구운빵을 모두 쓸어가려는 지금의 행동은 빵집 주인을 당황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도, 돈은 있습니까?”
“네. 여기요.”
툭 하고, 오늘 번 돈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하더라도, 한탕을 목숨을 걸고 뛰는 모험가들의 의뢰 대금이 그렇게 적은 돈일 리가 없다.
사실상 오늘 번 대금을 모조리 써버리게 되는 셈이지만, 오늘의 수입만큼 다른 날도 보고 있으며, 저금하며 모아둔 돈도 있으니 그렇게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여,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떨어지지 않도록 두 손에 꽉 쥔 커다란 빵 봉투를 받아든 에린은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릴 리가 관리하고 있는 보육원을 향했다.
약10분 정도를 걸어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 에린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찌나 이리 아름다우신지!”
“이, 이것 좀 놓아주세요!”
“갈 곳이 없는 어린 아이들을 한데 모아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헌신하시는 그 마음씨! 정말로 존경을 금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말 좀 들으라고요! 이 인간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곤란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와 전혀 듣는 척도 안 하고 일방적인구애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는 에린의 기억 속에서 익숙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 목소리…. 저 말투….”
굉장히 낯설지가 않다.
보육원의 입구 앞에서 곤란한 표정을 보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메이드 복을 입은 여성과 깔끔한 양복을 입고 등을 보이며 릴리의 양손을 붙잡고 있는 한 신사.
“저, 저는…말씀드렸잖아요. 그게…반은 사람이 아니라…‘악마’라고….”
‘악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 주위의 반응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려야 했던 것은 자신의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하는 릴리의 입장 때문이었다.
“아아, 그렇죠. 그럴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모습은 확실히 악마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이 X끼가 진짜 뭐라는 거야….”
마침내 끝까지 꾹 참고 있었던 릴리의 이성이 조금씩 끊어지기 시작하면서, 입 밖으로 욕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야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저의 마음을 현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제 당신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제 눈앞에 나타나신 겁니까! 이 악마! 어서 저를 책임지세요!”
“미쳐버리겠네. 진짜! 이봐요. 당신! 저는요! 이미 평생을 거쳐 제 마음을 바치기로 한 상대가 있어요! 이러셔도 제 마음은 바뀌지 않아요!”
릴리의 폭탄선언에 일방적으로 열정적인 구애의 행동을 펼쳐오던 신사의 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럴 수가…. 혹시….”
“뭐, 뭔데요. 또…?”
“처녀가…아니신 겁니까?”
“아, 이 X끼가 미쳤나. 진짜!”
정중해 보이는 신사처럼 보였기 때문에 끝까지 정중하고 예의 있는 모습을 차리려던 릴리의 이성이 마침내 끊어진 순간이었다.
익숙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대화의 흐름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변태 신사의 정체를 눈치챈 에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 나 성희롱한 거, 우리 주인님한테 다 일러바치기 전에 당장….”
“여기서…뭐 하세요. 제라드님?”
“응?”
“엉?”
에린의 목소리에 놀라, 웃기지도 않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두 사람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에린을 발견했다.
“에린?”
“에린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