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246. 스탬피드
아직 결계의 범위를 다 벗어나지 못한 은현은 근처의 적당한 곳에서 자리를 잡아, 노숙을 결정했다.
“흐응, 그래?”
신계에서 시에테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들은 일리아나는 자신의 일처럼 기쁜 미소를 지으며 반응했다.
스승을 포함한 과거의 인연의 인물들이 더 이상 메디아에 의해 영혼을 농락당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확인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그에 의해 심리적으로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은현을 보고,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도 한시름 놓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라….”
반면, 은현의 이야기를 들은 데르킨과 앨리스는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잘 와닿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도 그럴 것이 이곳보다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신이라는 존재를 설명해봤자,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애매한 표현이었기에, 은현은 두 부부의 반응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들었던 이야기인 앨리스에게도 두 번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공감이 잘 되고, 명확한 얘기는 아니었다.
사실상 대놓고 부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만큼 은현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베르단디는 다시 구현시켰던 육체를 없애고 영체화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은현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많은 이들에게 보이는 것이 그렇게 옳은 판단은 아닐 것 같다는 여신의 판단 때문.
이내 은현은 자신을 걱정해주었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 두 사람한테 걱정을 끼쳤나 보네.”
그 안도의 한숨이 너무나도 크고 적나라했기 때문일까, 은현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수련을 했다고? 얼마나?”
“글쎄…. 그곳은 시간이나 정확한 날짜개념이 없으니까.”
자는 것조차도 체력이 다해 피곤할 때가 되면 침대에 드러누워서 잠을 자거나, 눈을 뜨면 다시 베르단디와 시간을 보내거나 수련을 할 뿐인 반복된 일상이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지났는지조차도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진전은…있었나요?”
“…글쎄.”
수련의 성과를 묻는 엘레노아의 질문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애매모호하게 답했다.
그 태도가 이상했는지, 일리아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뭐야? 있었으면있었고, 없었으면 없던 거지, 왜 이렇게 애매해?”
“하면 할수록, 스승님의 검을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나에게 부족했던 부분들이 자꾸만 느껴졌어.”
수련을 하면 할수록,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더 많았던 시간이었다.
결국 은현은 원했던 경지를 이루지 못하고 하계를 내려왔다.
하지만 얻었던 것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자신은 분명 몇 단계 성장했노라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그곳에서 수련을 하자고, 은현은 속으로 다짐했다.
“흐응.”
생각보다 은현의 표정이 굉장히 개운했기에, 일리아나는 기묘한표정을 거두었다.
“그래서? 구태여 축제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엘프의 숲을 나온 이유는 따로 있는 거지?”
“없지는 않지.”
“그런데 이렇게 노숙을 해도 돼?”
“아예 급한 건은 아니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아직 나이가 어린 에리스를 데리고 야간 행군을 감행하면서까지 체력을 소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루난을 통해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모그라프령에서 왕가에 구원 요청을 보냈다고 하더라.”
“모그라프? 페르니아스의변경에 위치한 거기?”
“맞아.”
은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그라프라면…페르니아스 왕국의 변경에 위치한 곳인가요?”
구체적인 지명이 나오자, 앨리스가 20년 전의 과거의 기억을 애써 떠올리며 대화에 참여했다.
“당신의 고향이야?”
“아뇨. 저는 페르니아스 왕국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모그라프 변경은 20년 전에 대륙에서도 ‘철벽’이라는 이름으로 꽤 유명했으니까요. ”
“철벽?”
페르니아스 왕국민이었으면서, 들어본 적이 없었던 명칭에 대해 엘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본 적 없나요?”
엘레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무릎을 베고 잠들어있는 에리스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려주고 있는 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없습니다.”
평민의신분으로 왕국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인 아이테르에다니면서, 왕국의 지리와 역사에 관한 교육도 받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제 아이테르 성적은 교양과 역사, 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만점이었습니다.”
무언가의 기시감을 떠올린 은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 그 이외의 그 세 성적은 바닥이었다는 거냐?”
“그딴 걸 익혀서 내 앞날에 도움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남매가 받아오는 성적도 비슷하냐…. 아니, 그래도 에린보다는 너가 좀 더 낫나.”
은현은 에린의 경우에도 필기 부분에서 전체적인 성적이 바닥을 기었던 것을 떠올렸다.
반면에 신체 능력의 사용이 메인이 되는 실기의 경우에서는 만점을 받아온 완전한 육체파 소녀가 되었지만, 엘빈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의경계를 정확히 구분 짓고, 필요 없다고 생각된 부분을 과감히 버리며 필요한 지식과 실력만을 쌓아갔다.
머리가 좋아 효율성을 추구하며 합리적인 방식을 내린다고 해야 할지,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것은 단호하게 버리는 그 행동력은 대단하다고 생각이 될 만하다.
“잘도 그 성적으로메이거스 마법사단에 입단을….”
“실기는 만점이었으니까.”
그것을 당당하게 자신의 입으로 밝히는 엘빈의 얼굴에는 자부심이나 뿌듯함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뒷배나 스폰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력만 있으면 뽑히는 게 당연하기는 하겠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리아나가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얘의 실력만큼은 진짜야. 아무리 흑마법이라고는 하지만, 그걸 몇 년 만에 독학으로 익혔을 정도니까. 마법을 다루는 센스나 이쪽의 감각 자체는 뛰어난 편이지. 아마 실기 시험에서 이 녀석의 수준을 알아보고, 그 영감이 합격시킨 게 아닐까?”
“그건…사이먼 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의외의 이름이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이먼 마기우스’라는 노인은 일리아나와 같은 고위자릿수의 마법사이며, 페르니아스 왕국의 엘리트 마법사단인 메이거스의 수장이다.
신입 단원의 인사 따위는 개인의 재량으로통과시킬 권력도 가지고 있다.
“그 영감은 인재 욕심이 엄청나니까. 생각해볼 수 있는 얘기이긴 하지. 뭐, 합격시켜두고 이후의 신입을 제대로 키워보려고 하기도 전에 다른 단원들에 의해 고립을 당해서 그때의 결과가 나온 것 같지만.”
“요컨데…사이먼님의 관심을 받게 된 것에 의해, 질투와 시기로 엘빈을 배척했을 거란 건가요?”
“모르지. 나야. 추측에 불과하고, 그 마법사단 쪽의 귀족 엘리트 마법사들 집단의 생태계에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아.”
일리아나는 자신의 추측을 던져두고, 어깨를 으쓱였다.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엘빈은 담담하게 관심 없다는 투로 일관했다.
“그런 정치적인 일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 진짜 마이페이스네. 멘탈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거 아니야?”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마이페이스인 일리아나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은현은 어이가 없었다.
“저어, 그래서 이야기를 되돌려서, 그 모그라프 변경이라는 곳이 ‘철벽’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것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손을 들어 다시 이야기를 원래대로 되돌린 것은 이 중에서 곤히 잠이 든 에리스를 제외하면 가장 부외자에 가까웠던 데르킨이었다.
태어나서 400년 이상의 시간을 살아온 데르킨은 한 번도 숲의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마치 모험을 하는 용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저희가 소속된 나라인 페르니아스 왕국은 대륙의 전체 위치를 따져봤을 때, 서부에 위치 해있는 나라입니다. 서쪽의 가장 끝에는 바다로 뒤덮여 있고, 동쪽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 해있는 영토가 바로 모그라프 변경이지요.”
은현을 제외하면, 공작가문의 여식으로써 왕국의 정세에 가장 밝은 편인 엘레노아가 입을 열어 데르킨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변경백의 역할은마수, 또는 타국을 비롯한 외적의 침입을 최초로 막는 최전선을 의미하기도 해요.”
“아,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파수꾼 같은 역할인가요?”
“네. 비슷합니다.”
“그럼 ‘철벽’이라는 의미는.”
데르킨의 짐작에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페르니아스는 건국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해온 역사가 없어요. 그건 모두 모그라프 변경에서 침공해오는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방어해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긴 이명이 바로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철로 된 단단한 벽. ‘철벽’이죠.”
다른 말로는 ‘모그라프의 철벽’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그라프의 변경백이, 이번에 왕가에 구원의 요청을 보냈다는 이야기지.”
“흐응, 전에 그 일 때문이야?”
대강 상황을 짐작한 일리아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것 같아. 결국 ‘스탬피드’가 일어났어.”
‘비스트 스탬피드’
정확한 의미로는 대규모의 마수들이 군단 규모의 무리를 지어 지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습격하는 경계경보와도 같은 현상이다.
스탬피드의 전조로는 특정 지역을 범위로 하는 것이 아닌, 대륙 전체를 범위로 설정하고 곳곳에서 출몰하는 마수들과의 조우 빈도가 급격히 증가한다.
말 그대로 마수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시작으로, 대륙 곳곳에서 토벌되고 있는 마수들의 숫자를 넘어서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균형이 깨져 걷잡을 수 없는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이전부터 이 징조는 있었지.”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 특정 의뢰들이 급증하고 있다.
-마수의 토벌.
다크엘프와의 전쟁 이전, 루난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통해서 은현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공작령과 인근 지역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알렉스가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이유가 이 스탬피드에 대비하기 위함.
“오라버니는….”
“알렉스가 노력한 덕택에 공작령과 인근은 그럭저럭 버텨내고 나름대로 안정을 찾았다고 하더라.”
“그렇군요.”
엘레노아는 무사하다는 알렉스의 근황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공작령이 아니라, 변경 쪽이야.”
루난의 보고에 의하면, 변경 쪽은 상당히 상황이 심각하다고 했다.
보름을 가까이 마수 군단의 침략이 일정한 주기로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상황에, 변경 요새는 마수 군단의 공격에 제대로 된보수를 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고, 병사들의 소모 또한 심각해져 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모그라프 변경백이 내놓은 타개책이 왕가에 구원 요청을 보내는 거였다고?”
“그렇지. 변경의 병력들이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는 와중에, 외부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전선을 유지 시켜야만 하니까.”
“흐음, 지금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의 정치판 개판이나 다름없지 않나? 순순히 변경백에 지원을 보내줄 것 같지는 않은데.”
일리아나가 이렇게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20년 가까이 페르닌에서 거주하면서 페르니아스 왕국의 정치판에 간접적으로 엮여 신물이 날 정도로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현을 따라 페르닌에서 이주를 결정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일리아나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그게 꼭 그럴 수도 없단 말이지. 변경이 뚫리게 되면 그대로 침공한 마수들이 물밀 듯이 밀려와 마을과 다른 영지들을 덮치고, 정말 만약의 가능성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왕국의 중심인 수도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굳이 수도까지 도달을 하지 않더라도, 변경이 뚫리게 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최대한의 자원과 인력을 투입해서, 최초 방어선인 변경에서 모든 마수들을 소탕하는 게, 가장 피해가 적은 방법이죠.”
“엘레노아의 말이 맞아. 자기가 살길만을 모색하는 쓰레기 귀족이라면 나 몰라라 할지도 모르지만,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변경백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야만 해. 국가적인 규모의 피해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문제는…그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왕가가 제대로 개념이 박혀 있을지가 의문인데….”
“디아네 왕비가…이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왕국 병사들을 파견해줄지…판단이 잘 서지 않네요.”
엘레노아는 굳은 얼굴로 사태의 심각성을 중얼거렸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군요.”
과거 인간들과 조우했던 적이 있었다는 엘프 원로들을 통해서 대략적인 지식을 전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직접 인간들에게서 인간사를 듣자니, 엘프 여왕의 말에 무조건의 복종을 하거나, 종족 전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움직이는 엘프들의 사고방식과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알렉스 쪽은…도와달라는 요청은 오지 않았지만, 아마 알렉스라면 변경백에 지원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 공작 가문과 모그라프백작 가문은…오래전부터 친분이 남달랐던 관계니까요. 모그라프 백작님께서 오라버니에게도 구원 요청을 보내셨을 지는 모르지만…변경의 위기를 알고도 오라버니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이런 상황인데, 도우러 안 갈 거야?”
“알렉스가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닌데, 내가 가야 할 이유는 없지. 모그라프 변경과 딱히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지금까지 은현이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던 이유는.
“뭔가가 수상쩍단 말이지….”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었던 모그라프의 철벽이 뚫릴 정도로 커다란 위협이, 단순한 마물의 스탬피드 현상만으로 설명이 될 수가 있을까.
그 근원의 원인이 이상하게 명확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