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4화 〉244. 귀향길(1) (244/730)



〈 244화 〉244. 귀향길(1)

“베르단디님.”

“왜 그러느냐?”

숙면을 취하고,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은현과 베르단디는 침대 위에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애정이 담긴 키스를 나누며 한참이나 뒹굴었다.
자신을 부르는 은현의 목소리에, 베르단디가 고개를 올려다보며 은현과 눈을 마주쳤다.

“이곳에서는…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지나가나요?”

“이 방은 신계 안에서도 나의 힘으로 만들어진 독립된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도 나의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는 있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의 흐름 자체를 멈추게 만들 수는 없지만, 물이 떨어지는 것의 속도는 느리게도, 빠르게도 조절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은현이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궁금해진 베르단디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며 은현에게 물었다.

“혹시…아이는 좀  나와 함께 이곳에 있고 싶은 것이냐?”

“하하, 그것도 있지만요.”

“그것도?”

“수련을 하고 싶습니다.”

“수련?”

느닷없는 은현의 부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베르단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은현의 사고를 읽고, 쓴웃음을 짓고 있는 은현의 얼굴을 보며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조금 서운하구나…. 나와의 시간보다 개인의 단련이 더 중요한 것이냐?”

사도로서의 역할과도 연관된 개인의 단련을 위한 성장보다, 자신을  우선시해주길 바라는 여신의 사고방식은,  이상 신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하긴, 제대로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셨다면 나의 영혼에 걸려있던 제약을 풀어주셨을 리가 없지.’

“지금 또 나에 대해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은현의 사고를그대로 읽어낸 베르단디가 인상을 쓰며 은현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위아래로 흔드는 상체운동으로 여신의 부드럽고 푹신한 살결이 비벼져 오면서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베, 베르단디님. 그거 진짜로 하지 마세요. 위험하다고요!”

주로 당하고 있는 은현, 자신의 마음이 매우 위험해진다.

“후후. 여신에게 불손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아이에 대한 벌이다.”

이내 은현과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베르단디가 은현의 몸 위에 올라타 기승위 자세를 취했다.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겠다.”

“아니, 부탁을 들어주시겠다면 제 위에는 왜 올라타시는데요….”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그렇다.”

베르단디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은현의 입가에 입맞춤을 했다.
이미 몇 번이나 나누었던 키스였음에도, 섞여가는 서로의 혀와 타액은 맛을  때마다 달콤하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후우, 조건은….”

이내 키스를 마치고 얼굴을 떼어 은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외롭지 않게 만족을 시키고 나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은현은 고개를 끄덕여, 또다시 자신의 여신과 몸을 섞었다.
그렇게 베르단디를 만족시킨 은현은 베르단디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으로 장소를 옮겼다.
자신의 던전 주택의 지하 훈련장과 똑같은 규모의 시설.

“…이게 진짜로 되네.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니….”

마치 지금이라도 7개의 용볼을 찾으러 떠나야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 아뇨….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의 얘기입니다.”

“…만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듯 베르단디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리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은현은 자신의 집과 똑같이 재현된 지하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마치 하계로 내려와 집으로 복귀한 것만 같았던 친숙함을 느낀 은현이  공간을 만들어준 베르단디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베르단디님.”

“무엇을, 아이를 위하는 게  나를 위하는 일이 아니냐. 그것보다…정말로 괜찮겠느냐?”

시간의 흐름의 배율을 건드려 하계와는 다른 현저히 느린 시간이 흐르도록 설정을 했다지만, 똑같은 공간에서 혼자서몇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보낸다는 것이 제대로 된 방법일 리가 없다.
베르단디의 걱정에, 은현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가 아니잖아요. 베르단디님이 계시니까.”

“…….”

“같이 있어 주실 거죠?”

기대감이 잔뜩 섞인 직설적인 은현의 돌직구에 베르단디가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곤 얼굴을 붉혔다.

“아, 아이가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함께 있어 줄 것이다.”

평생 저런 말을   것 같은 성격이면서도, 어째서 가끔가다 저런 대사를 거리낌 없이 할  있는 것인지, 순간순간 베르단디의가슴을 꿰뚫는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미소지으며 베르단디에게 화답을 한 은현은 훈련장의 중앙에 서서, 한 자루의 검을 소환하여  손으로 거머쥐며 자세를 잡았다.
평소 사용하던 쌍검술의 자세가 아닌, 시에테에게서 처음 배웠던 검술의 기본자세.
지금껏 사용해왔던 쌍검술은 주현성에게서 배웠던 체술을 베이스로 시에테의 검술을 섞어서 개량시켜 사용하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시에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처음 가르침을 받았던 때의 기억과 이번 교전의 기억을 상기시켜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데스나이트가 되었던 시에테와의 일전을 떠올린다.
다리 사이의 간격, 허리의 움직임, 팔의 각도, 검격의 궤도까지.
눈에 담았고, 떠올릴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떠올려야 했다.
따라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경지를 따라잡아야만 한다.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조차 해서는 안 된다.
해내야만 한다.
유품조차 남기지 못했던 스승이 자신에게 남겨주고 간 것을 이뤄내야 하는 것은 사도로서가 아닌, 그녀의 제자로서 가슴 속에 품게 된 하나의 사명이다.

‘스승님의 검. 반드시 따라잡고, 끝에는 완성 시켜 보이겠습니다.’

재능이 없는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정신력, 그리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
열을 가르쳐야 하나를 깨우치는 반푼이라도 좋다.
그 하나를 깨우치기 위해, 남들보다  배나 되는 노력 따윈 얼마든지 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은현만이 가질 수 있는 어드벤티지.
시간은 은현의 편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스승의 염원인 ‘검술의 완성’을 목표로 잡지는 않았다.
은현의 가장  번째 목표는 ‘시에테의 검술’을 완벽히 재현해내는 것.
나아가  번째 목표로는 ‘시에테의 검술’을 자신의 몸에 맞도록, 개량을 하는 것이다.
목표를 설정한 은현이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렀다.

“…대단한 집중력이구나.”

멀찍이서 은현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베르단디는 지금껏 보여주었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가장 불타오르고 있는 듯한 은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베르단디는 한 가지 결심했던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슬슬 준비를 해야겠구나.”

 ◆ ◆

“그렇군요…. 결국 떠나시는 건가요?”

“그럴 예정이야.”

은현의 앞으로의 일정을 들은 레지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에 담겨있는 술을 마시며, 은현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장식하듯 재잘거리며 날아다니는 정령들이 세계수에서 흘러나온 마력을 흡수하여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광경은  폭의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처음 실비아와 함께 달의 마을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향수가 가득한 그리움이 묻어나온다.

“예전에는 어째서 이곳이 ‘달의 마을’이라고 불렸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

승전과 세계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으로 활기찬 마을의 분위기가 달빛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고조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달빛이 어우러지는 평소의 고요한 숲의 마을과는 다른, 모든 생명들의 활기가 넘쳐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느라 여념이 없는 숲의 모습.
이렇게 달빛의 아래에서 활기가 넘치는 달의 마을의 모습을 보는 것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고 은현은 생각했다.

“오랜만이라 더 좋네.”

다크엘프와의 전쟁이 끝나고, 실비아가 죽으면서 ‘사도의 사명’을 핑계로 도망치듯 달의 마을을 빠져나왔다.
이런 활기찬 마을의 축제도, 웃고 있는 엘프들의 모습도, 생명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전경도, 모두 실비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슴 아픈 추억들이었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옥죄이는,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선택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던 길.

“이제는 괜찮으신 것 같네요.”

“…….”

은현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레지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레지나는 쓴웃음을 짓고 있는 은현의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떠나실 때의 선생님의 얼굴은 좋은 말로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요.”

무너지려는 것을 꾹 참고 버티려고애쓰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그 정도로  좋았었어?”

“네. 무척이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것만큼, 레지나의 지적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그때에 비하면 한결 나아지셨어요.”

“…그야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탱해주려는 이들이 있다.
베르단디가 그렇고,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있다.
최악의 과정이었지만, 시에테와 제대로 된 이별도 할  있었다는 위안도 얻었다.
은현의 눈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자신의 선생님이 무거웠던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을 레지나는 순수하게 미소지으며 기뻐했다.

“선생님.”

“응?”

“한 번만 안아주시면안 되나요?”

“레지나…. 그건 좀….”

그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400년이 지나, 선대의 자리를 계승 받아 모든 엘프들의 위에 서 있는 엘프 여왕.
아무리 은현이 그녀를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왕의 몸을 만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괜찮아요.”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젓던 레지나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옆에 앉아 있던 은현의 곁에 파고들어 그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 저기….”

이미 아내가 둘씩이나 있는 몸인데 강하게 거절도 하지 못한 은현이 고개를 돌려 본능적으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위치를 스캔했다.
잔뜩 술을 마셔 기분 좋게 취해 엘레노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일리아나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돌보고 있는 엘레노아의 모습을 확인한다.
아내들이 이쪽을 신경  여력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은현은 고민했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행동에 호응에 은현도 레지나의 상체를 끌어 안아주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잘했어. 정말 훌륭한 여왕이 되었구나.”

“감사해요.”

작은 칭찬을 받고서야 레지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은현에게서 몸을 떼어 원래의 자리로 복귀했다.
이내 어색한 기류 속에서 다시 술잔을 마시던 은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레지나.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가요?”

“떠나기 전에 앨리스에게 권유해볼 생각이야. 눈을 치료하기 위해 나를 따라오지 않겠냐고. 하지만 앨리스가 혼자 올 리가 없어. 만약에….”

“데르킨과 에리스가 숲을 나갈 경우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거군요.”

“맞아.”

앨리스는 인간이기에 그녀만 승낙의 의사를 밝힌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앨리스가 남편과 딸을 두고 은현을 따라갈 리도 없을뿐더러, 남편인 데르킨이앨리스를 혼자 보낼 리도 없다고, 은현은 생각했다.
앨리스를 따라, 가족 전체가 은현을 따라 출가를 하는 것은 엘프들에게도 민감한 문제였다.
400년 가까이 숲의 깊숙한 곳에서 숨어 살면서, 인간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폐쇄적인 관습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데르킨과 에리스가 숲의 마을을 나오고, 바깥으로 출가를 한다는 것은 400년 가까이 오래 이어져 왔던 엘프들의 관습을 깨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약 데르킨과 에리스가 앨리스를따라 숲을 나온다는 선택을 한다면…허락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레지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은현은 레지나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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