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6화 〉236. 검술의 계승(4) (236/730)



〈 236화 〉236. 검술의 계승(4)

왼쪽 옆구리부터 대각선 위로 오른쪽 어깨까지 그어진 선이 균열을 만들고,절단된 데스나이트의 상체가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졌다.

철컥

검은 데스나이트의 갑옷이 부딪치면서 나는 쇳소리가 은현의 귀를 때린다.
데스나이트의 투구 안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에테의 시선을 은현이 느끼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

짧은 순간 펼쳤던 기술의 여파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감각도 희미해진 상태.
검을 떨어뜨리고, 녹초가 된 신체의 상태를 점검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은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에테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들어가는 것처럼, 데스나이트가 된 시에테의 신체는 조금씩 소멸해가고 있었다.

“이걸로…저는 스승님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현은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재능의 부족함을 여신의 권능과 신의 무구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커버를 하면서, 거머쥘 수 있었던 값진 승리는 사실상 순수한 기술의 완성도와 개인의 능력으로 거머쥔 승리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세계수의 힘이 부활하고, 레지나가 전장에 참여하게 되면서, 급변했던 싸움의 양상은 다시 엘프 진영 쪽으로 다시 기울었다.
저주를 통해서 사기(死氣)를 공급받고 있던 사령(死靈)의 힘이 점점 감소하고 있었던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시에테는 힘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순수한 자신의 힘만으로 스승을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승리를 쟁취해내서, 과연 스승을 넘어 설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나 소통이 불가능한 시에테가 은현의 물음에 답해오는 일은 없었다.

“은현!”

“선생님!”

허공에서 두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은현은 그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씩 소멸해가는 데스나이트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볼 뿐이었다.

[여신이시….]

“괜찮아.”

정화의 기도를 통해 데스나이트를 정화시키려던 엘레노아의 행동을 은현이 제지시켰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

담담히 침묵을 지키며 한쪽 무릎을 꿇고, 상체를 절단당한 데스나이트의 소멸을 경건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은현의 모습.
엘레노아는 그 이질적인 광경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자신과 일리아나가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상황 속에서, 은현의 표정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메디아…아마 스승님의 영혼을 통해서 보고 있겠지.”

엘레노아와 레지나가 은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인다.

‘스승님…?’

소멸해가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을 바라보고, 엘레노아는 표정을 굳혔다.

“너만은…너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어떻게 아르케나 대륙이 재창조되기 전, 지구가 존재했던 시절의 영혼을 데스나이트로 만들 수 있었는지, 어째서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인과관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자신의 스승을 이 꼴로 만들고, 농락한 원흉에 대한 살의로 변해갔다.

“반드시 죽일 거야.”

그녀가 아르케나 대륙과 단절된 다른 차원, 공허의 저편에 존재하는 마계에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서, 그녀를 죽이리라, 은현은 맹세했다.
누군가와 하는약속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거는 맹세의 서약.
그렇다고 마계로 가는 통로를 열어젖혀 아르케나 대륙을 위험에 빠뜨릴 생각도 없었다.
이곳에는 일리아나가 있고, 엘레노아가 있다.
리오드와 공작 가문의 사람들, 에린과 엘빈 남매, 릴리와 고아원의 아이들.
책임져야 하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 어느새 너무나도 많아졌다.
그렇기에 이쪽으로 메디아를 불러내는 것이 아닌, 은현 자신이 마계로 이동하여 메디아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강구 해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큼은 반드시 죽이겠어.”

-기다릴게. 너와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될 날을.

아마 메디아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은현은 짐작했다.
뒤틀려버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메디아의 말과 행동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고 머리끝까지차오르다 못해 터져버리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아이야.]

“진정하세요.”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고,  쥐고 있는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주며, 베르단디와 엘레노아가 은현을 위로한다.

[지금은 마음을 가라앉혀라.]

“당신의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그렇죠.”

둘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괜찮아요?”

“응, 고마워. 손잡아줘서.”

꽉 쥐고 있었던 주먹을 풀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엘레노아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맞잡아주었다.

[…나한테는 감사의 인사도 없는 것이냐?]

“그럴리가요.”

엘레노아에게만 고마움을 표한 것이 살짝 서운했는지 베르단디가 물어왔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고, 은현은 레지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레지나. 축하해. 세계수의 힘을 복원시켰구나.”

“감사합니다. 하지만…이건 순전히 선생님의 부인이신 일리아나님께서 노력해주신 결과인 걸요. 오히려 보답을 드려야 하는  저희 쪽이에요.”

“그 건은 차후에. 지금은….”

저주로 오염되어 있던 숲이 레지나가 소환한 정령들에 의해서 정갈한 기운으로 정화가 되어가고 활기를 되찾아갔다.
전쟁은 끝났고, 다크엘프들은 패배했다.
엘프 진영의 사상자는 0명, 다크엘프들의 진영은 전원 사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레지나는 말했다.

“다크엘프들의 전멸 사실보다, 엘프 쪽의 사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기쁘면서, 놀라운 부분이네.”

“모두 엘레노아님의 덕분이죠.”

“엘레노아가?”

“모든 엘프들을 한 장소에 모으고 결계를 치면서 데르킨과 함께 엘프들을진두지휘하셨어요.”

“대단하네.”

“부, 부끄러우니까 이런 건 저희끼리 있을 때만….”

엘레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엘레노아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은현의 손길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사제로서의 역량을 모두 쥐어 짜내어 노력한 결과는 엘레노아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있을 정도로 뿌듯한 결과였다.

“저는 다시 엘프들의 전후처리를 위해 이만 물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해.”

여왕으로써, 다른 엘프들을 모두챙겨야 하는 레지나는 현재 이 장소에서 가장 바쁜 인물이다.
정령술을 이용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하늘을 날아 엘븐가드 엘프들에게 향하는 레지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은현은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일리아나는?”

“일리아나님께선 조금 무리를 하신 탓인지 세계수의 복구이후, 레지나님을 텔레포트로 이곳에 전이시키시고 곧바로 잠이 드셨데요.”

“그럴 만도 하지.”

은현은 납득이 간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나가 해낸 방법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사고의 확장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그것을 사고 가속을 이용해 커버하려고 했던 은현과는 달리, 일리아나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 한계를 깨부수고 세계수의 부활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아무래도  부분은 스쿨드가 손을 빌려준 것 같더구나.]

“…스쿨드님이요?”

[아주 잠깐, 하계에 간섭을 해왔다. 아마도 마녀 아이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기 위함이었겠지.]

“…….”

신은 하계에 간섭을 할 수 없다는 법칙은 이미 어느 정도 비틀어져 버린 지, 오래다.
베르단디가 직접 은현의 영혼에 간섭하여 하계에 내려올 수 있던 것이 시작.
사도와 여신이었기에 가능했던 방법이다.

“스쿨드님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처음 들어보는 다른 여신의 이름에 엘레노아가 궁금증을 가지고 물었다.

[스쿨드는 나의 자매 여신으로 동생격에 해당하는 여신이지.]

“아…그렇군요.”

납득했다는 듯 엘레노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스쿨드님과 일리아나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마녀 아이에게 직접 간섭한 것이 아니다. 나와 아이를 통해서 마녀 아이에게 간섭한 것이지. 마녀 아이의 몸속에는 아이를 통해서 받은 신력의 일부가 있지 않느냐.]

“아….”

베르단디의 설명을 이해하고, 은현이 작게 탄식했다.

[아무래도 스쿨드가 마녀 아이에게 무언가 제안을 한 모양인데, 이것은…마녀 아이에게 직접 들어보자 구나.]

은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제안이라고요?”

머릿속으로 드는 불길한 상상에 은현이 인상을 찌푸린다.
설마 자신과 같은 존재의 여신의 사도로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한 상상.
하지만 이내 그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고 부정했다.
여신이 사도로 들일 수 있는 존재는 한 신당, 한  뿐이다.
베르단디를 포함한 우르드와 스쿨드는 각자 세 자매로 나뉘어져 있는 여신이기도 하지만, 노른의 세 여신은 셋이면서 하나의 신으로써 취급이 되고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은현이 베르단디 뿐 만이 아니라, 우르드와 스쿨드의 권능을 받아들이게 되어 세 여신의 사도가 되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스쿨드는 은현이 그녀의 사도로서 인정이 되고 있는한, 다른 사도를 들이지 못한다.
이내 은현의 생각을 읽은 베르단디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후, 아이가 생각하는 그런 제안이 아니다. 하지만…어느 의미로는 비슷하기도 하지.]

“혹시라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일리아나의 영혼이….”

안심시키려는 베르단디의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 속에 걸려있던 제약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얼굴을 굳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시는 아이와 아이의 주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란다. 그러니….]

베르단디는 살며시 은현의 머리를 끌어안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디 이번엔 나를 믿어주고, 마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은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엘레노아의 손을 잡고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가자….”

“네.”

◆  ◆

항쟁이 끝나고 달의 마을로 복귀하는 엘프들의 원정은 3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면서 끝을 맺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백 명도 안 되는 엘븐가드의 엘프 전사들로, 천 명이 넘는 다크엘프의 마을을 괴멸시킨 사건은 어떤 엘프는 끔찍했다는 표현을 사용했고, 또 다른 엘프는 기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저주로 인해 좀비로 변이해버리면서, 지성을 잃어버린 다크엘프들의 시체들을 처리하는 것은 항복을 통해서 전의를 상실한 다크엘프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고되고 힘든 싸움이었다.

“아~왔네.”

엘프들과 함께 복귀한 은현과 엘레노아, 엘빈의 셋이 곧바로 찾아간 곳은 앨리스와데르킨의 집이었다.
침대 위에서 벽 기대어 요양중이던 일리아나가 셋의 얼굴을 보고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생각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일리아나를 보고, 은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내 빠른 발걸음으로 일리아나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향했고, 그녀의 이마에 무자비한 딱밤을 가격했다.

“아!”

묵직한 충격으로 이마가 새빨개지자, 일리아나가 인상을 잔뜩 쓰며 양손으로 이마를 비비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아파!”

“그런 무모한 일을 벌여놓고 잘도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상체를 꽉 끌어안고는 잔소리를 해대는 은현의 행동에 일리아나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내 걱정  하셨나 봐?”

“좀이 아니라, 많이.”

“후후, 저희는 이만 나가볼게요.”

“간병 고마웠어. 앨리스.”

“아뇨. 세계수를 복구시켜 주신 은인을 소흘히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당연한 일이었는 걸요.”

엘프 남성을 남편으로 맞아들이면서, 완전히 엘프 마을의 주민으로써 말하고 있는 앨리스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뿌듯한  보였다.

“하하! 앨리스의 말이 맞습니다! 세 분은 저희 엘프들을 지켜주신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데르킨도 고생 많았어. 일리아나의 몸이 더 호전될 때까지, 조금만 신세를 질게.”

“물론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흔쾌히 은현의 부탁을 수락한 데르킨은 앨리스를 데리고 일리아나가 요양중인 방에서 나갔다.

“오빠!”

“음?”

로브 자락을 손에 쥐고 끌어당기는 엘프 소녀의 행동에 엘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데르킨과 앨리스 부부의 딸인 에리스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발하며 엘빈을 쳐다보았다.

“저랑 놀래요?”

“…….”

거절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무작정 알았다고 대답하기도 곤란했던 엘빈이 은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다.
피식 웃은 은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에리스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갔다.

“사이가 좋네요.”

“그러게.”

은현은 엘레노아의 중얼거림에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일리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나, 우리 할 얘기 있지?”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어.”

일리아나는 흘끗 베르단디를 한  올려다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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