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232. 엘프 여왕(3)
나비 날개들을 움직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작은 요정의 무리들은 그 광경을 처음 본 엘레노아에게는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을 보는 것만 같은 절경과도 같았다.
“와아….”
마치 심해 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유려하고 아름답게 허공을 누비며 감미로운 웃음소리들이 난무하는 광경.
만약 자신이 은현과 이어지지 못하고, 신력의 일부를 몸속에 주입을 받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정령들을 인식하지 못한 평범한 눈으로 이 절경을 두 눈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
이곳이 좀비와 엘프들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으로 주위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넋을 잃은 것은 엘레노아 뿐 만이 아니다.
“정령들이….”
“세계수의 힘이 부활했다!”
“우리들의 여왕께서! 전쟁에 참전하셨다!”
그 절경에 넋을 잃었던 엘프들이 동족들이 외치는 소리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린다.
이곳이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각자가 무기를 들어 바리케이드를 넘어오려는 좀비의 무리를 응시했다.
이미 레지나와 정령들의 등장으로 엘븐가드 엘프 전사들의 사기는 최고조와 마찬가지.
먼저 앞서 정령술을 이용한 공격을 선보였던 데르킨을 선봉으로,많은 엘프들이 무기를 들며 좀비의 무리에 뛰어들었다.
막대하면서도 신성한 기운을 보유한 마력의 간섭이 오염되었던 대지를 가득 채우고, 대지 전체에 걸려 있던 사기(死氣)의 저주를 차차 정화를 시켜나갔다.
마치 지금까지 자신의 힘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에 대한 분풀이라고 하고 싶은 듯 세계수의 의지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대단해….”
자신이 선보일 수 있었던 최고위 주문인 ‘성역화의 결계’를 통해서도 완전히 해주 하지 못하고, 억제하는 것이 한계였던 저주를 조금씩 정화시켜 썩어들어갔던 대지를 점점 활기차게 만들어간다.
“이게 바로 신목(神木)의 힘….”
엘레노아가 발동시킨 결계는 아니에스의 기도를 따라하여 발동시킨 것에 불과한, 모방했을 뿐인 미완성의 결계.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간단히 뛰어넘어 기적의 모습을 보여주는 세계수의 힘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엘레노아의 신성력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아무리 ‘성녀 후보’라는, 사제들 사이에서 둘도 없는 직함을 가지고 많은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절대로 비교할 수 없는 격차를 실감했다.
‘아니에스님이라면…?’
알 수 없다.
아니에스가 가지고 있는 신성력의 총량도, 세계수가 가지고 있는 신성한 마력도, 양쪽 다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비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아니에스와 함께 여행을 했었던, 여섯 명의 대영웅들이 믿고 따랐다고 알려졌던 숨겨진 영웅.
그리고 세계수의 힘을 직접적으로 빌려와 눈앞의 기적을 행사하고 있는 엘프 여왕의 어린 시절을 교육했다는 남자.
이제는 자신의 남편이 된 은현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들의 힘을 피부로 체감하면, 자신은 아직도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더욱더 정진해야 해.’
엘레노아는 그렇게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적을 빠짐없이 두 눈 속에 담았다.
수많은 정령들이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는 곳의 중심에 서 있던 레지나가 마침내 발걸음을 움직였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미약한 선풍이 휘몰아친다.
그 선풍의 원인이 레지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꺄르륵 웃고 있는 정령들의 원인이라는 것은 엘레노아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엘븐가드 정령술]
[요정의 개화]
꺄르륵!
엘프 여왕, 레지나의 정령술에 반응해 선풍을 불러일으키던 정령들이 사방으로 퍼져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의 요정 수십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대량의 농밀한 마력이 흩뿌려지고 치열하게좀비의 무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엘프들의 몸에 흡수가 되기 시작했다.
“오, 오오!”
“이것은!”
정령들의 마나를 신체 내부에 직접 주입받음으로써 생겨나는 신체의 강화 효과.
끝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투의 연속으로 쌓여있던 근육과 정신의 피로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가고, 지금까지 낼 수 있었던 한계 이상의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효율을 끌어내는 광역 버프를 체감한 엘프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정령들을 비롯한 자연친화력이 매우높은 숲의 민족이기에, 오직 엘프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수의 축복.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예외적으로 유일하게 엘프가 아니면서 그 축복의 혜택을 받는 존재가 나타났다.
“이건….”
둔기와 도끼들로 수 많은 좀비들을 때려눕히고 있던 엘빈이,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슬슬 동이 나기 시작한 마력으로 인해 한계를 직감한 순간이었다.
자신의 체내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자연의 마나의 존재를 감지하고, 엘빈이 행동을 멈칫하고 허공을 바라본다.
[뭐야. 뭐야?]
[우리와 같은 존재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실체를 가지고 있지?]
[잘 봐! 우리와 같지만, 힘의 근원이 엄연히 틀려!]
마치 자신을 신비한 동물을 관찰하듯 요목조목을 뜯어보면서 날개짓을 하며 허공에 떠 있는 요정들의 존재가 정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자연스레 허공에 떠 있는 수십 개체의 하급정령들과 이어져 있는 레지나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새까만 암흑 기사의 투구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레지나가 미소지었다.
“판은 만들어드렸습니다. 한 번 당신의 힘을 보여주세요. 당신이 선생님의 기사로서, 우리가 당신의 신체를 만들었다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세요.”
엘빈의 신체의 재료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다.
정령들의 마나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당연한 수순.
레지나는 엘빈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엘프들에게 증명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이 아닌, 은현과 일리아나의 손에 의해 인공적으로 태어난 정령으로써 정령들을 모욕되게 하는 존재가 아닌, 은현의 충실한 기사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이고 많은 엘프들을 납득하게 만들라고.
“…고맙군.”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엘빈의 마력이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다.
암흑 기사 갑주와 무기들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림자들을 조종하는데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수시로 채워지고 있다.
소모되는 양보다, 보충되는 양이 더욱 많아 바닥을 드러낼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연료통이 거의 무한대가 되어버린,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진 지금 엘빈이 취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다.
마나의 잔량을 걱정할 필요 없이, 그저 날뛰기만 하면 된다.
양손에 쥐고 있던 둔기와 도끼의 그림자들을 없애버리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최대 범위, 한계의 한계까지 대지를 뒤덮는 그림자를 확장시켜나갔다.
[엘빈 고유 정령술]
[그림자들의 윤무(輪舞)]
푸욱 서걱
광범위한 넓이로 대지를 잠식한 그림자들이 검과 창의 형태를 하면서 바닥에서 튀어나와 다크엘프 좀비들의 사지를 사정없이 관통하고, 절단하며, 뜯어버리는 광경.
“…와우.”
정확히 아군인 엘프들의 몸은 건들지 않고, 오로지 다크엘프 좀비들의 시체들만을 정확히 노린 정밀한 공격에 엘빈의 활약을 멍하니 지켜보던 엘프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굉장히 잔인하면서도 압도적인 광경은 틀림없는 힘의 격차를 과시하고 있었다.
“굉장하군.”
단 한 번의 기술로 자신의 체내에 있는 모든 마력을 소진한 광역 기술을 선보인 이후, 마력이 바닥을 드러낸 엘빈의 신체가 주위의 자연의 마나에 호응하여 방대한 양의 마력을 흡수하여 회복시켰다.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신체가, 그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거라면 몇 번이고 쓸 수 있겠어.”
지금까지 마나를 아껴가며 효율을 추구한 방식의 싸움을 임하고 있었다면, 세계수의 마력으로 신체의 힘을 보충시키고 있는 지금은 효율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일 수 있는 방식의 싸움을 시작한다.
레지나의 등장으로 인해 점점 한계를 맞이해가고 있던 엘프진영이 단숨에 사기를 회복시키고, 지금까지 밀리고 있던 반동으로 열 배에 달하는 숫자의 좀비 무리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후우….”
맥이 풀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엘레노아가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아뇨.”
다시 행동을 개시하려는 엘레노아의 모습을 흘끗 보고 눈치 챈 레지나가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내며 엘레노아를 설득하려 했지만, 엘레노아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가봐야 해요. 그 사람에게.”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레지나는 숲의 가장 깊숙한 곳, 짙은 사기가 느껴지는 방향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곳으로 텔레포트 하기 전, 일리아나에게서 대강의 상황은 들었기에 은현이 단독으로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며 막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전해 들은 바였다.
‘이렇게 정화가 진행되었음에도, 저렇게 짙은 사기를 뿜어내고 있다니….’
이내 다시 흘끗 엘레노아의 몸을 바라보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과 거친 숨을 토해내는 불규칙적인 호흡.
좋지 못한 안색은 그녀가 이 전쟁에서 얼마나 고군분투를 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아있던 신성력을 모조리 쥐어 짜내서 결계를 유지하고, 엘븐가드 엘프들이 부상을 입을 때마다 정화와 치료의 기도를 병행하여 엘프들을 케어한 엘레노아는 틀림없는 엘프들의 은인이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은현을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인 시선에서 엘레노아를 은현 쪽에게 보낸다고 무언가 상황이 호전될 것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레지나의 개인적인 감상이었다.
어차피 이 땅의 저주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고, 저주를 통해 힘의 공급이 끊긴 데스나이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 되어 엘프 진영에 점점 유리한 상황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은인인 엘레노아를 혼자 보내는 것보다, 이곳의 좀비들을 모조리 정리하고 자신과 엘프들 전원이 버티고 있던 은현의 전투에 합세하여 다 같이 데스나이트를 처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지나가 이 의견을 엘레노아에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엘레노아의 굳은 표정이 원인이었다.
‘뭔가…뭔가 불안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진정시켜보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엘레노아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은현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사기는 도저히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가서 은현을 도와야 한다고 자신의 가슴이 시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제 남편인 걸요.”
“…….”
뭐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대답을 망설이고 있던 도중, 한 엘프가 레지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왕님.”
“데르킨?”
“이곳은 이제 괜찮습니다. 여왕님의 등장으로 사기는 단숨에 저희 쪽으로 넘어왔고 20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세계수의 정령들이 다시 저희 엘프들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좀비들의 숫자는 근 200.
엘빈의 활약과 세계수와 정령들의 힘을 등에 업은 엘프들의 고군분투는 마침내 승리로 보답 받기 직전이었다.
“여왕님께서는 사제님을 데리고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가주십시오.”
“…알겠어요.”
자신감이 가득 찬 목소리에 결국 레지나는고개를 끄덕였다.
[중급 정령술]
[중위계 정령소환]
손바닥 위에 자연의 마력을 응축시켜 만든 바람의 구체가 점점 허공으로 떠올라 선풍을 일으키며 커져 나갔다.
이윽고 구체가 변형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천 옷으로 몸의 일부를 걸친 아름다운 여성.
[이곳은….]
“오랜만이에요. 실라프.”
[레지나? 많이 컸구나. 세계수가 힘을 잃어가고,몇 년의 시간이 흐른 거지?]
“근 20년 정도요. 실라프님. 도움을 좀 부탁드릴게요.”
[흐음? 오랜만에 보자마자 대뜸 부탁부터네?뭐, 좋아. 상황이 급박해 보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