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1화 〉231. 엘프 여왕(2) (231/730)



〈 231화 〉231. 엘프 여왕(2)

“…과연.”

많은 엘프들을 진두지휘하여 치열한 싸움이 진행된 와중, 헐레벌떡 뛰어와 엘레노아의 말을 전달받은 데르킨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도인지아시겠습니까?”

단지 엘레노아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로튼이 데르킨에게 물었다.

“이걸 그 사제님이 말씀하셨다고?”

“예? 예. 그렇죠.”

“아직 20년하고도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인간이…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셨군.”

“예?”

“그 사제님은 이대로 가다가는,  싸움에서 우리들이 질 거라고 판단하신 거다.”

“그게 무슨….”

자세한 설명을 해줄 여유도 없었던 데르킨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로튼을 뒤로하고 큰 목소리로 좀비들의 무리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엘븐가드 엘프들에게 외쳤다.

“전 병력! 퇴각한다!”

“예!”

데르킨의 명령에 따라, 엘프들이 화살을 쏘며 좀비들의 접근을 견제하면서 교전을 벌이고 있던 지역을 이탈했다.
일제히 퇴각을 하는 엘븐가드의 엘프들을 이끌면서, 데르킨은 진형이붕괴되어 제각기 싸우고 있던 엘프들과 합류를 하며 엘레노아의 위치를 찾았다.
이윽고 떨어진 엘프들과 합류를 반복하여 도합 90명의 엘프 무리들이, 엘레노아와 엘빈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과 합류를 했다.

“오셨군요.”

단신으로 좀비의 무리들을 엘빈이 막아내고 있는 와중, 좀비의 습격으로 오염된 부상을 정화시켜 엘프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엘레노아가 데르킨을 발견했다.

“좋은 수를 찾으신 겁니까?”

“목적을 바꿔보려고요.”

“목적을 말입니까?”

“네. ‘적들의 섬멸’이 아닌, ‘버티는 것’으로요.”

“…그렇군요.”

데르킨은 엘레노아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결계가 엘레노아가 발동시킨 기적이라면, 현재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엘프들을  자리에 모은 것도 납득이 간다.

“이 지역 전체에 쳐뒀던 제 결계의 범위를 축소시킬예정이에요.”

모든 엘프들을 장소에 밀집시키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정도로 결계를 축소시킨다면, 결계의 유지에 들어가는 신성력의 양은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래 버틸 수가 있다는 뜻.

“하지만 동시에 분산되어 있던 좀비들이 동시에 이곳으로 몰려 들어오게 될 거에요.”

엘레노아가 선택한 방식은 한 장소에 모든 전력들을 모아놓고, 좀비들의 진입을 막는 바리케이드를 쳐서, 원거리의 공격으로 접근해오는 좀비들을 섬멸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디펜스 전략을 취하면서, 결계의 유지에 소모되는 신성력의 양을 최소화시키고, 결계 안에 있는 엘프들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낼  있도록 고민하고 짜내어 만든 엘레노아의 최선.

“저희의 역할은 이곳으로 집중되어 달려드는 좀비들을 막아내는 거군요. 하지만…이 전략으로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듭니다.”

“알아요.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있죠.”

그렇기에,적들의 섬멸이 아닌, 최대한의 오랜 시간을 생존으로 목표를 두는 것이다.

“버티면…승산이 있는 겁니까?”

“네. 반드시.”

데르킨은 확고히 말하는 엘레노아의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아와 함께 왔던 일리아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리아나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언가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 수가 무엇인지는 엘레노아, 그녀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할 진데, 일리아나에 대한 굳은 신뢰만으로 이 전략을 짰다는 것에, 엘레노아의 배짱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해봅시다.”

“선봉에는 엘빈을 세우도록 할게요. 엘프분들은 결계 안에서 좀비들이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진을 치고 원거리 공격으로 엘빈을 보조해주세요.”

좀비들의 공격에도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고, 근거리 전에서 무작위식의 폭력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엘빈은 결계 밖에서 싸워줄  있는 엘프 진영의 유일한 전력이었다.
엘빈은 그 역할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고 지금도 축소된 결계 바깥에서 단신으로 좀비 무리를 막아내고 있는 상황.

“부상자분들은 이쪽으로!”

“하하.”

100살도 먹지 않은 나이 어린 인간 여성이 앞장서서 엘프들을 지휘하고 있는 광경에, 데르킨은 자신의 지휘 권한을침해당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었다.

“과연 그분이 고르신 여성이라는 건가.”

엘레노아의 지휘로 인해, 엘프 진영은 결계 내부에 토벽과 나무들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건설하고, 화살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으로 좀비들을 견제했다.
그리고 결계 바깥에서 그림자 무기들로 좀비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다리를 뜯어버리고, 팔을 꺾어버리는 등의 일방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전황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좀비들의 엘레노아의 결계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필사적으로막고 있는 상황이지만, 원거리로 좀비들을 견제하고있는 엘프들의 궁술은 투사체인 화살의 잔량이 떨어진다면, 그들도 물리적인 근접전을 펼쳐야만 한다.
남은 좀비들의 숫자는 약 500으로 엘프 진영의 피해 없이 나름 선방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기전에서 엘프 진영이 불리한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

“크아악!”

어디선가 숨어있던 다크엘프의 비명이 울리고, 시체가 된 동족들에게 살점을 잡아 뜯어 먹힌다.
다크엘프의 시체로 만들어진 좀비들은 엘프들뿐 만이 아니라, 생전의 동족이었던 다크엘프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신체를 오염시키고, 좀비화로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었다.
사실상 엘프와 다크엘프의 항쟁은 은현 일행의 개입과 기습작전으로 엘프들의 승리가 확정되었던 셈이지만, 레디아의 자결로 발동된 저주로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고, 동족 전체의 목숨과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원수나 다름없던 은현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싶었던 레디아 개인의 이기적인 복수심이 만들어낸 참상.

퍼억

‘더, 더 빠르고 강하게.’

 상황 속에서 엘빈은 조금씩 아티팩트로 제작된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나갔다.
그저  동작으로 온 힘을 발휘해 가격하는 공격에서, 정밀하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정확히 급소인 좀비의 머리를 짓뭉개는 효율적이고 최적화된 방식을 찾아 나간다.

‘그 녀석은 이렇게 움직였던 것 같은데.’

흐느적거리는 좀비의 다리를 걷어 차버리자, 휘청이면서 바닥으로 쓰러진 좀비의머리를 있는 힘껏 밟았다.
다른 좀비들이 엘빈의 그림자 갑주를 붙잡고, 때리고 물어뜯어 타격을 주려고 들러 붙어있었지만, 지성이 없이 그저 본능대로만 움직일 뿐인 좀비들의 공격은 엘빈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아무리 많은 수의 좀비들이 들러붙었음도, 엘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콰직

발목을 비틀어 다크엘프 좀비의 머리를 짓밟은 발에 힘을 주자, 두개골이 으깨지면서 거무칙칙한 썩은 피가 튀었다.

‘이게 아닌가.’

그 움직임은 가끔가다 공작 가문의 기사들을 훈련 시킬 때 보여주었던 은현의 동작을 흉내내었을 뿐이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검술은 무리다.’

그것은 몸소 체험을 하면서 느꼈다.
연비가 나쁜 조영술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의 마력이 동나면서 행동불능에 빠지게 된다면, 힘겹게 버티고 있는 엘프진영에 직접적인 타격으로 이어진다.

‘검이 안 된다면 다른 무기로.’

검은 적을 베기 위한 무기.
아무리 좋은 검을 쥐고도 적을 벨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하다면 돼지 목에 다이아목걸이를 걸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절대로 데미지를 입지 않은 최상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갑옷과 저 무리들을 뚫고 나갈  있는 힘.’

그렇다면 그 무식한 장점들을 살릴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이 있을까.
엘빈은 고민했다.
이내 고민을 마친 엘빈이 자신의 그림자들을 이용하여 두 자루의 무기를 만들어냈다.
 손에는 메이스를, 다른 한 손에는 손도끼.
기술의 유무나 숙련도와 상관없이, 그저 힘만으로 상대를 으깨버릴 수 있는 살벌한 무기들을 쥐고, 다시 전장을 누볐다.
얼마나 많은 좀비들을 쓰러뜨려야 하는 걸까.
얼마나 더 버텨야 엘레노아가 말한 ‘승기’가 보이는 걸까.
사실 엘빈에게는 그런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는 충실한 역할과 최선의 행동을 할 뿐이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해준 은현에게 보답을 하는 길이었기에, 고민하지 않는다.
붉은색 안광을 번뜩인 암흑의 기사는 계속해서 쉬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다.

  ◆

“조장님! 화살이 모두…!”

“젠장…! 무기를 들어라!”

마침내 소모품이었던 엘프들의 화살들이 하나둘씩 동이 나기 시작하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데르킨이 외쳤다.
바리케이드에 하체와 허리가걸려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좀비의 무리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진입을 최대한 저지했지만, 쓰러진 좀비의 시체들을 밟고 바리케이드를 넘어오려는 좀비의 무리를 보고, 엘븐가드 엘프들이 표정을 굳혔다.

“이….”

“젠장…정령들의 도움을…정령술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이렇게 화살이나 검 같은 물리적인 무기만을 이용한 공격에 의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는 않았으리라.

“어…?”

갑작스러운 이변을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데르킨이었다.
 20년 가까이 느껴보지 못했던 그리운 감각을 느끼고,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믿을 수가 없는 상황.
그리고 데르킨보다는 아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정령과의 계약을하였음에도 세계수의 힘의 감퇴로 정령들이 현현을 하지 못하여 정령술을 쓸 수 없었던 다른 엘프들도 서서히 데르킨을 따라 이변을 눈치챈다.

“정령의 기운이…?”

“돌아오고 있다?”

“설마, 세계수가…?”

“이건….”

허공에서 나타나, 성역화의 결계 내부로 들어오는 나비 날개를 달고 있는 작은 바람의 정령들을 발견하고 엘레노아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요정들?”

어떤 정령은 미소 짓고, 어떤 정령은 깔깔거리며, 또 어떤 정령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자신들과 계약을 맺었던 엘프들과 20년 만의 상봉을 하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려는 순간이었다.

“전군, 주모옥!”

 감동의 재회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데르킨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다시 쥐고, 당기고 있는 시위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활시위를 당기면서 데르킨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하던 바람의 흐름이 이내, 화살이 형태가 되어 활시위 위에 걸리면서 돌풍을 만들어냈다.

[엘븐가드 정령술]
[바람 요정의 화살]

데르킨이 팽팽하게 잡아 당겨진 활시위를 놓는 순간, 활대에서 튀어나가며 일직선상으로 곧게 뻗어 나가는 바람의 화살이 사선상에 있는 좀비 무리들의 머리들을 일제히 관통해나갔다.

“……!”

어마어마한 마력이 담겨진 화살로 그어진 직선의 존재를 느끼고, 근처에 있던 엘빈이 좀비들과의 전투 도중 행동을 멈칫거리고데르킨의 화살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을 정도다.

“…와.”

수십의 좀비들의 머리를 관통시킨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느끼고, 엘레노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이내  화살 한 발로 당황했던 엘프들의 주목을 단번에 모은 데르킨이 외쳤다.

“세계수의 힘이 부활했다!”

정령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정령술을 사용할  있게 되었다는 뜻은 달이 마을에 있는 세계수가 본래의 힘을 되찾고 있다는 뜻을 의미했다.
이것이야말로 엘레노아가 악착같이 성역화의 결계를 유지하면서 엘프들을 지휘하며 버티고 기다리고 있었던 순간이라는 것을 데르킨이 깨닫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전장입니다!”

저주로 조금씩 오염되어 가고 있던 결계 바깥의 대지가 조금씩 정화되어가면서탁한 기운을 몰아내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다시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세계수의 힘이 돌아온 것에 기쁘고 환호하고 있어야  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쟁이 끝난 이후에, 축배를 들이마시며 종족 전체가 축제를 벌여야  정도로 경사스러운 일.
그렇다면  축제를 벌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일은 간단하다.

“축배는 이 항쟁을 승리로 이끌고,  다음에 들어야 한다! 전원이! 살아서!”

우우웅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겨 좀비들을 향해 겨눈 데르킨의 옆으로 바닥에 그려진 전이의 마법진.
 마법진의 정체를 알아본 엘레노아가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사, 사제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엘레노아를 보고, 주위의 엘프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부축했다.
지금까지 모든 엘프들이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엘레노아의 신성력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엘프들은 혹시라도 무리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냥 긴장이 풀어져서….”

마침내 한계를맞이한 성역화의 결계가 해제됨과 동시에, 텔레포트의 전이 마법진 안에서 등장한 레지나의 모습을 발견한 엘레노아가 미소지었다.

“일리아나님이 해내셨구나….”

고개를 돌려 바닥에 주저앉은 엘레노아를 바라본 레지나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부인분들이 똑같이 바닥에 주저앉으시는지….”

“네?”

“아니에요. 당신 또한 우리 엘프들의 은인입니다. 동족들을 위해서 고군분투해주신 노고 엘프들을 대표해서 여왕인 제가 잊지 않고 보답하도록 하죠.”

그 말을 끝으로 레지나가 데르킨을 뒤로하고 앞장을  걸었다.

‘아름다워….’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수십의 작은 바람의 정령들이 레지나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광경이 굉장히 아름답다.
동시에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대지와  전체를 정화되기 시작한다.
엘레노아의 신성력으로도 완전한 정화가 불가능했던 저주의 힘을 상쇄시키고,  땅에 뿌리내리고 있던 사기(死氣)와 원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강력한 신성(神聖).
그것은 신성력인가, 마력인가, 아니면 둘의 개념을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인가.

‘그 사람의 기운과 비슷해….’

자신의 남편인 은현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닮았다고 생각한 엘레노아는 레지나가 뿜어내고 있는 기운의 정체가 세계수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내 그 아름다운 자태와 신성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엘프 여왕의 모습을멍하니 바라보던 엘레노아는 이전에 은현이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프 여왕’은 모든 엘프들을 대표하는 통치자로서의 권위를나타내는 칭호야. 세계수의 힘을 자유자재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여왕의 특성에 걸맞는 호칭은 따로 있어.

“정령들의 여왕….”

넋을 잃고 바라보던 엘레노아가 레지나의 또 다른 이명을 입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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