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225. 암흑 기사(2)
누군가는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누군가는 심장을 관통당하고.
누군가는 어깨가 찍혀 도려내어 지고.
누군가는 머리 전체가 으깨졌다.
“…세상에.”
일방적으로 연출되는 학살의 현장에, 한 엘프가 전투 도중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크아악!”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많은 수의 다크엘프들이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엘빈의 그림자에 일방적인 죽음을 맞이하며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갔다.
다크엘프의 영역인 본진 전체를 그림자로 뒤덮어,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던 것은 단 10초.
그 10초 안에 몇백 명이나 되었던 다크엘프들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가 죽음을맞이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할 압도적인 살상능력을 발휘하였음에도, 엘빈에게는 그리 만족스러운 성과가 되지 못했다.
“효율이 너무 나쁘군.”
단 10초 만에, 은현에게서 공급받았던 마력의 절반 이상이 소모됐다.
공격의 범위는 터무니없이 넓었지만, 이것은 오로지 자신보다 약한 다수의 상대를 상대할 때나 유용한 기술이다.
자신의 그림자 무기가 통용되지 않는높은 방어력을 갖추고 있거나, 자신보다 강한 소수의 강자를 상대할 때는, 굉장히 연비가 나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술이었다.
다크엘프들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아군 진영에는 다수의 엘븐가드들이 함께 싸우고 있다.
아무리 은현에게서 금방 마력을 공급받아 채워진다 하더라도, 한 번 더 이런 광역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래서는 나도 그냥 검으로 근접전을 하는 게 낫겠어.”
엘빈은 처음 선보이는 광역 기술, ‘그림자들의 윤무’에 대한 평가를 간략하게 마치고, 자신의 그림자의 형태를 조작해 두 자루의 검을 만들어 양손에 한 자루씩을 쥐었다.
“검을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다리에 힘을 실어 질주하기 시작한 엘빈의 몸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주춤거린 다크엘프들과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퍼억!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짐과 동시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가장 앞쪽의 다크엘프가 복부에 엘빈의 검을 맞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크아악!”
완전히 절단시킬 기세로 휘두른 검격이었지만, 기술이 가미되지 않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검격은 다크엘프의 복부를 얕게 가를 뿐, 복부와 허리 자체를 절단시키지는 못했다.
조영술이라는 마법을 통해서 절단을 시키는 것과, 직접무기를 쥐고 살과 뼈를 절단시키는 것에는 감각의 큰 차이가 존재했다.
검에 가격당하면서 발생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던 다크엘프의 몸이 뒤로 날아가면서 바닥에 처박혔다.
‘기술의 부족인가.’
그것은 당연하다.
생전의 엘빈은 검술은커녕,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던 평민 출신의 마법사.
검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던 자신이 느닷없이 터무니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신체를 얻었다고 해서 급격히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엘빈의 검은 직선상으로 뻗어오는 솔직하고 단조로운 공격이 연속일 뿐.
처음의 선제공격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던 다크엘프들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엘빈의 움직임을 분석해내며 대응해나갔다.
대열을 가다듬고, 그저 무작정 휘둘러올 뿐인 엘빈의 검을 맞받아치면서 생긴 빈틈을, 절묘한 타이밍으로 다크엘프가 치고 들어왔다.
상체를 낮게 숙여 엘빈의 품으로 파고들고, 그의 칠흑의 갑옷 사이의 이음쇠 사이로 단검의 칼날을 밀어 넣었다.
카앙!
“…어?”
살을 가르며 생기는 소리가 아닌, 단단한 철과 맞부딪치면서 나오는 금속의 소리.
갑옷 틈새로 밀어 넣었던 칼날이 일정 부분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에 다크엘프가 당황하여 얼이 빠진 소리를 내었다.
일리아나의 공격 마법도, 제라드의 통상공격도 막아낸 전적이 있던 조영술의 그림자는 적들의 공격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을 정도로 견고하다.
다크엘프들이 그렇게 당황했던 것도 잠시.
높게 들어 올린 엘빈의 검이 있는 힘껏 아래로 내리쳤다.
우드득
살을 서걱 베면서 나는 검술의 달인이 만들어낸 소리가 아닌, 그저 쥐고 있는 무기로 있는 힘껏 때리면서 뼈가 짓이겨지고 부러지는 소리.
“…커허!”
그대로 자신의 왼쪽 허리 부분에 단검을 박아넣었던 다크엘프의 어깨를 검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면서 그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이게 무슨….”
제대로 된 데미지도 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동족이 날아가는 광경을 보던 다크엘프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처음 그림자 윤무로 인해 10초 만에 병력의 절반을쓸어버렸던 엘빈의 무력을 다시 한번 느끼고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표정을 지은 몇몇 다크엘프들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명백히 다크엘프들의 사기가 꺾였다.
굳이 경험과 반복된 훈련을 통해 쌓은 기술이 없음에도, 마력의 질과 신체의 능력으로 그 격차를 눌러버리다 못해 짓이겨버리는 압도적인 격차.
‘이길 수 없다.’
라고 본능이 외치는 것도 당연하다.
“전원 공격!”
선제공격을 빼앗기고 완벽히 사기마저도 눌러버린 다크엘프의 진영에, 이번 습격조의 조장을 맡은 엘븐가드의 데르킨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백 명의 다크엘프 본진을 치러온 엘븐가드 병력의 수는 고작 해봐야 8~90명대의 숫자.
하지만 일리아나의 대지를 붕괴시키는 광역 마법에 피해를 입고, 엘빈의 그림자 윤무에 의해 몇백 명의 다크엘프가 죽어 나가면서, 기습은 완전히 성공했다.
싸움의 양상은 완벽히 엘프진영으로 기울었다.
“여긴 맡길게.”
“알겠습니다.”
은현의 말에 데르킨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어떻게 해?”
“중앙으로 곧바로 치고 들어갈 거야. 두 사람 다 날 붙잡아.”
“흐응, 알았어.”
“네.”
은현은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등에 업힌 엘레노아의 허리에 벨트를 둘러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키고, 일리아나를 안아 들었다.
마력을 통한 신체 강화를 이용해 두 사람분의 몸무게를 간단히 지탱하고 땅을 박차 혼잡한 전장의 정중앙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가장 안쪽에위치해 딱 보아도 다크엘프의 우두머리가 있을 법한 건물.
대지가 갈라진 균열의 여파로 만신창이가 된 목적지의 건물 앞에 도착한 은현은 아내들을 내려주고서 저택 앞에서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다크엘프 여성을 발견했다.
“너는…너는…!”
“나를 알아?”
멍하니 바라보던 다크엘프 여성의 표정이 이내 분노로 뒤바뀌면서 이를 갈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의 변화에 은현이 인상을 살짝 쓰며 물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분노하는 것인지,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일일이 모든 다크엘프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가슴 속에 있는 모든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담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350년 전의 전쟁의 생존자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은현과 마주한 다크엘프, 디레아는 예상치 못한 은현의 반응에 폭발할 것 같았던 증오와분노의 감정을 잊게 만들 정도로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기억하지 못한다고?”
“내가 일일이 너희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던 것도 아니니까.”
“나의 남편을 죽여놓고….”
디레아의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머릿속에 형용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다 못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불구대천의 원수의 얼굴을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정작 자신의 원수는 자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너희도 죽였잖아.”
내 소중한 사람들을.
그 의미가 함축된 말을 내뱉으며, 은현이 담담하게 디레아를 쳐다보았다.
담담한 표정 속에 감춰져 있는 냉기가 서린 섬뜩한 말.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뿜어내는 자욱한 살기에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살짝 몸을 떨었다.
“…당신.”
“알아. 괜찮아.”
가끔 보여줬던 섬뜩하고 무섭기 짝이 없던 차가운 면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분노의 감정을 감지해낸 엘레노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은현을 쳐다보았다.
‘가슴은 뜨겁게, 머릿속은 냉정하게.’
과거에 전쟁을 걸어왔던 다크엘프들이 패전하고도 이제 와 다시 전쟁의 준비를 하면서, 자신이 남편을 잃은 피해자인 양 행세하고 있는 저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들이 전쟁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실비아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여신님. 감사합니다.’
과거에 자신의 영혼에 여신의 제약을 걸었던 세 여신 중 하나인 베르단디에게, 은현은 감사를 전했다.
[…….]
그 감사의 의미를 알고 있던 베르단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죄책감이 가득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거라.]
“간단한 이치지. 죽였으니까.”
스르릉
검을 소환해 꽉 쥐고 있던은현이 말을 잇는다.
“죽는 거야.”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은현의 말을 이해한 디레아도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입가를 비틀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의 패배야.”
이미 전황은 제대로 된 싸움도 해보기 전에 기울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계수를 약화시키는 공을 들이고 준비해왔던 많은 것들을 사용하기도 전에, 다크엘프는 완벽히 패배한 것이다.
“…….”
하지만 디레아의 눈빛은 패배를 받아들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굉장히 꺼림직하게 느껴져, 은현의 미간을 좁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패배가 곧 너희의 승리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지.”
푸욱
“…….”
“뭐야, 저거? 미쳤나?”
“무슨…!?”
느닷없이 자신의 왼쪽 가슴을 찔러 심장을 움켜쥐는 자결의 행동을 보이는 것에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으로 놀람을 표현했다.
“크…으윽!”
심장을 관통당해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도, 디레아는 비릿한 표정을 없애지 않았다.
일리아나의 지각변동 마법으로 인한 기습과 엘빈의 존재, 엘븐가드의 맹공으로 다크엘프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더 이상의 역전의 가능성은 손톱의 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저항의 눈빛과 표정을 지우지 않고 선택한 것이 바로 자결.
“……! 일리아나! 디스펠!”
이내 디레아가 다름 아닌 자신의 몸과 이미 전멸해버린 다크엘프들의 영혼들을 바쳐 저주를 발동시키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은현이 황급히 일리아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았어!”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것인지, 그 의도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디레아가 자신의 심장에 새겨져 있던 ‘저주의 인’을 발동시켰다.
“우리의 신께 빕니다!”
[여신이시어!]
[베스타의 축복]
[퓨리피케이션]
저주를 발동시키지 못하도록막기 위한 ‘정화의 기도’를 읊음과 동시에, 은현이 행동을 개시했다.
“증오스러운 우리의 적에게 파멸….”
서걱
소환한 검을 꽉 쥐고 디레아의 목을 긋는 깔끔한 일섬과 함께, 그녀의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의식이…멈추지 않아요!”
“뭐 이딴 게…!”
이미 디레아가 자신의 심장을 파괴한 순간부터, 저주의 의식은 시작되었다.
목이 잘려 바닥에 쓰러진 디레아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아닌 검고 칙칙한 액체들.
그리고 허공에 떠오른 원혼들이 각자의 사념을 드러냈다.
[흐으으….]
[아파아아아아아아!]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크아아아아아!]
엘레노아의 정화의 기도로도 다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의 강력한 마력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는 원혼들.
“이래선 디스펠도 쓸 수 없잖아!”
이미 어마어마한 에너지들이 한곳으로 모여있는 곳에 무작정 디스펠을 걸어버린다면, 한점에 모여있던 마력들이 일제히 터지면서 다방면으로 흩어져 분사가 되어 버릴 것이 뻔하다.
평범한 마력의 폭발이라면 그냥 장벽을 쳐서 보호를 하면 끝날 문제지만, 지금 한 점에 모이고 있는 것은 강력한 원한들이 담긴 영혼들의 집합체다.
저것들이 폭발하면서 주위에 흩어져 버린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주술의 영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리아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미처 디스펠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때.
끼아아아아악!
원혼들의 비명이 섞이면서 끔찍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소름이 돋아 몸을 움찔 떨었다.
디레아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기분 나쁜 검은색의 액체가 거대한 웅덩이를 형성하고, 그녀의 몸을 집어삼킨다.
철컥!
이윽고 거대한 검은 액체의 웅덩이에서 묵직한 철 소리를 내며 갑주를 두른 팔이 나타나 땅을 짚고, 자신의 몸을 일으키는 갑옷 덩어리를 보고,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숨을 멈췄다.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죽음의 기운’은 이전에 한 번, 최근에 한 번 느껴보았던 익숙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느꼈던 그 기운과는밀도 자체가 전혀 틀리다.
이전에 한 번, ‘망자의 여왕’이라는 초월자와 대면했을 때를 상기시키는, 느끼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꺼림직 한 기운.
“다크엘프들이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은현이 대륙에서 가장 혐오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떠올리고, 은현이 이를 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륙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었던 언데드.
메디아의 충실한 종복이었던 죽음의 기사가, 메디아가 있는 공허의 저편, 마계에서 소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