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223. 사전 준비(3)
은현 일행이 엘프의 숲에 정착해서 시간을 보낸 지, 약 2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위해 아르미타스 공작령을 떠난 시점부터 계산을 해보면 거의 3개월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시간 동안, 은현은 알렉스와 루난을 통해 정기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최근 대륙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여기 차요.”
“고마워.”
-…….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엘레노아가 타준 차를 마시던 은현은 보고가 뚝 끊긴 수정구슬을 쳐다보았다.
“계속 말해. 듣고 있으니까. 정세가 어떻다고?”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 있는 모험가 길드에 특정 의뢰들이 급증하고 있다.
“어떤 의뢰들?”
-마수의 토벌.
“…흐음.”
차를 마시던 은현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고는 턱을 쓰다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세히 설명해.”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이나, 다른 고위 귀족령의 모험가 길드의 1개월 총 마수 토벌의 숫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건….
“마수와 던전의 발생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모험가 길드에 마수 토벌의 의뢰가 급증하고 있다는것은, 대륙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수의 등장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마수가 태어나는 던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공작령도 마찬가지인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소공작은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나?
“아니. 전혀?”
은현은 흘끗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다소곳하게 앉아 차를 마시며 은현과 루난의 대화를 듣고 있는 엘레노아는 무척이나 담담한 반응이었다.
“왕국 측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지? 마수의 토벌 의뢰가 급속도로 많아지고 있다는 건, 그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마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뜻인데.”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하는 주체는 국가나 고위 귀족들일 수도 있지만, 마수의 토벌 의뢰는 대부분이 마을의 대표자가 모험가 길드를 찾아와 의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하면서 발생하는 의뢰금을 비롯한비용들은 모두 마을에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즉 마수의 토벌 의뢰가 증가했다는 뜻은, 그만큼 마을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
모험가들이 의뢰한 마수 토벌을 무조건 받아줄지, 주지 않을지의 여부도 불확실한 데다가, 받아준다고 하더라도 모험가들 개인의 인성이 그릇되지 못한다면 모험가 길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을 자체에 직접적으로 이런저런 사적인 대가를 요구해 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결국에는 의뢰의 난이도, 보수의 양 같은 여러 요건에 따라 끝까지 의뢰가 수리되지 않아 마을이 괴멸하게 된 경우도 존재한다.
-왕국 측은 모험가 길드에 지원금을 보내어 의뢰금액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써 모험가들에게 많은 보상이 돌아가도록 유도하고, 의뢰의 수리율을 높여서 토벌 의뢰가 많이 해결되는 방향을 이끌어가고 있더군.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렇게 나쁜 방법은 아니네.”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짐작하고 있는 건가?
“대강은 항상 최악의 악수들만 떠올려 둘 뿐이야. 대표적으로 모험가 길드 쪽에 제시한 지원금의 일부를 중간에 빼돌린다던지.”
특히나 지난번 아르티아에 의해 애슈턴에 동조해 국가 예산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10배에 달하는 금액을 벌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눈독을 들일 수도 있는 맛있는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정확하다.
“페르닌 쪽의 상황에는 관심 없어. 내가 나서야 할 만큼의 의리를 페르니아스 왕국에 느껴야 할 건덕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이미 공작령으로 이주하여 공작 쪽의 사람이 된 시점에서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당파벌 궁정 귀족들과는 척을 지게 된 셈이니, 굳이 도울 이유도 없다.
“이 지경이 돼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것들은.”
“…부끄럽네요.”
같은 나라의 귀족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듯 엘레노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다. 지원금을 빼돌리기 위해 눈독을 들였던 일부 귀족들의행동을 생각했던 것은 너뿐 만이 아니니까.
“리오드인가?”
-그렇다. 상황을 예상했던 아르티아단장인 올리비온 후작이 직접 움직여서, 지원금이 모험가 길드에 제대로 전달이 되도록 엄중한 감시가 이루어졌었다.
“흐음. 그래서 알렉스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일단은 실력이 있는 금위계의 명성이 높은 모험가들을 필두로, 은, 동위계에 신참 모험가들까지, 다양한모험가들을 스카웃해서공작령으로 데려왔다고 하더군.
“그래서?”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모험가 길드에 의뢰된 마수 토벌 의뢰를 페르닌보다 비교적 싼 값에 게시할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스카웃한 모험가들에게 지급대는 의뢰대금의 부족분을 공작가문의 주머니에서 나온 지원금으로 충당하는 거지.
“굳이 신참 모험가들까지 스카웃을 해온 건 그들에게 자잘한 의뢰를 시켜 경험을 쌓도록 해주고, 가능하면 계속 아르미타스 공작령 쪽에 정착해서 활동을 해주길 바라는 의도도 섞여 있겠네.”
-그런 의도도 없지 않아 있겠지.
토벌의뢰를 해야 하는 입장인 의뢰자들의 마을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과 동시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모험가들을 데려와 빠른 사건의 해결이 되도록 체제를 구축했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만만치않았지만, 지난 마나스트림의 치료제를 판매함으로써 왕당파벌 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거금을 뜯어낸 바가 있으니, 비용적인 측면에서 여유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지의 상황을 개선하라고 준 돈이었지만, 뭐 어쩔수 없었겠지. 알렉스도 애쓰고 있네.”
“그러게요.”
정말로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서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오라비의 근황을 듣고 있자니, 엘레노아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는 이번 건에서 나서지 않는 건가?
“알렉스가 아무런 말도 해오지 않았잖아.”
-나설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 뒤에서 처남의 동향의보고를 일일이 듣는 건 어째서지?
“심각한 상황이 되면 당연히 나설 거야. 하지만 일단은 지켜보고 싶어.”
-…….
혹시라도 아르미타스 공작령 쪽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문제가 터지고 나서 움직이는 건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은현과 공작 가문에 굴복하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완전히 은현의 산하로 들어간 흑랑단의 거주 공간도 아르미타스 공작령 쪽에 있다.
자신들의 목숨이 은현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는 하더라도 루난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은현과 알렉스의 자선 사업에 가까운 활동으로 운영되고 있는 고아원의 운영 여부다.
혹시라도 은현이 잘못될 일은 상정하지 않고있지만, 알렉스를 포함한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문제가 생긴다면 고아원에 지급되는 지원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루난은 혹시라도 잘못되기 이전에, 은현이 재빨리 나서서 상황을 해결해주어 불안을 해소해주길 바랬다.
“엘레노아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당신의 뜻에 따를게요.”
“내 아내로서의 뜻을 물어본 게 아니야. 공작 가문의 여식이자, 알렉스의 동생으로써 물어본 거지.”
“…….”
은현의 질문에 엘레노아는 작게 숨을 삼켰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고민을 하던 엘레노아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굳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가만히 있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오라버니는 지금 이번 일을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시험으로 생각하고 계실지도 몰라요.”
“시험?”
“당신과 나란히 서기 위한 시험이요.”
언제까지고 은현의 도움만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엘레노아는 자신의 오라비의 의중을 추측했다.
“저희 집안은 사실, 당신에게, 에린에게 걸리적거리는집안 그 자체였잖아요.”
에린의 실종사건을 조사하면서 엮이게 된 은현과 공작 가문의 인연은 처음에는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잘못된 길을 걸었던 애슈턴이 있는 공작 가문을 치워버리지 않았던 것은 간단하다.
‘쓸모가 있었으니까.’
최종적으로는 언젠가성장한 에린이 직접 애슈턴을심판을 하는 날이 오도록 판을 깔고 주위의 상황을 조장하려는 의도밖에 없었다.
“애슈턴의 일로 공작가문의 위신은 바닥에 떨어졌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각자의 방법으로 책임을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아버지는…가문의 모든 일에서 물러나기로 마음을 먹으셨고, 오라버니는…당신과 대등한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세요.”
사실 알렉스가 은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좀 남다르다.
처음 공작 저택에 몰래 찾아와 헤르샤 준남작 사건의 전말을 모두 까발렸을 때의 인상도 강렬했다.
유리아 왕녀의 가출로 아르키스 대미궁의 원정 때, 제대로 된 관계의 형성을 하지 않았던 시점이었음에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은현을 찾아가라고 엘레노아에게 당부했을 정도.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유리아가 오랜 시간 보필했던 자신이 아닌, 은현에게 자신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음에도 질투와 같은 감정으로 은현을 미워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알렉스가 그만큼 은현과 친교를 다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는 이런 일조차 당신의 힘을 빌려서 해결을 해야 한다면…당신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꽤나 낯간지러운 추측을 통해서 알렉스의 의중을 들은 은현은 어색하면서도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듣고, 은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 엘레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 떠 있는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후후, 아이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란다.]
일방적으로 보내어오고 있는 호의와 순수한 경쟁심과 속죄의 마음 등에 대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정확히 파악 당했다.
베르단디는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로 엘레노아에게 해설을 해주었다.
“조용히 하세요….”
[후후.]
민망해진 은현이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여신에게 일침을 날렸지만, 여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뭐, 아무튼 대강 답변은 되었나? 알렉스가 굳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오지 않는다면, 나는 나설 생각이 없어.”
-불안한 기분을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이유 자체는 이해했다.
“좋아. 그럼 오늘 정기 보고는 여기까지. 이쪽도 그렇게 한가한 상황은 아니라서.”
-…알았다.
수정구슬의 교신이 끝나고, 은현은 다 마신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치울게요.”
“고마워.”
“현아.”
방안으로 들어온 일리아나가 굳은 표정으로 은현을 불렀다.
“어.”
“준비 다 됐어.”
“…….”
은현은 조용히 눈을 감고상념에 잠겨 30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지만,지금의 은현에게는 그때와 달리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베르단디는 자신의 영혼에 강제되어 있던 제약을 풀어주었다.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자신의 곁에 있다.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했다.
“가자.”
“응.”
“네.”
집을 나서고 다크엘프들의 섬멸을 위한 출전을 위해, 레지나가 있는 ‘숲의 회랑’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