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화 〉222. 사전 준비(2)
달의 마을의 통치자인 엘프의 여왕, 레지나는 자신의 앞에 등장한 ‘그림자’를 보고, 넋을 잃은 채로 중얼거렸다.
“정령을…?”
“이럴 수가….”
“정령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었다고?”
정령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마나가 응집된 곳에 영혼이 깃들고, 자아가 싹트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한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말한다.
정령이 발현하는 힘은 인위적으로 술식을 구성하여 개인의 마력을 동력원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과는 달리, 자연의 마나 끌어다 사용함으로써 발현시키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가깝다.
하지만 은현과 일리아나의 기지로 창조된 엘빈의 상태는 ‘마법’과 ‘정령’의 경계에 다리를 한쪽씩 걸치고 있는 몹시 애매모호 한 상태.
“선생님은 정말 터무니없는 걸 만들어내셨군요….”
엘빈을 창조해낸 은현을, 레지나를 비롯해 회랑의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많은 엘프들이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힘을 통해서 태어난 정령들과 계약을 맺고, 그 정령들을 신성한존재로 여기고 있는 엘프들에게 인위적으로 정령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어낸 은현의 행위는 정령에 대한 모독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요소도 없지 않았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고,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시고의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다.
“저는 이자를 믿습니다.”
이내 한 원로 엘프가 굳은 표정으로 손을 들고 은현을 옹호했다.
“저는 300년 전 우리의 편에서 함께 싸워줬던 그때의 인간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음.”
다른 엘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을 옹호하는 원로 엘프의 주장에 동의하는 기색을 보였다.
모두 300년 전, 은현이 달의 마을을 떠나기 전에 인연이 있었던 엘프들이다.
“…….”
그에 반해, 은현을 모르는 젊은 세대의 엘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원로 엘프들의 의사에 반대할 생각도 없었기에, 별다른 잡음은 나오지 않았다.
“좋아요. 저 정령에 대한 건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정령이 무언가 문제를 일으킬 시에는,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넘어갈 수 없어요.”
“명심할게. 고마워.”
레지나와 엘프들이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의 수라는 것을 납득한 은현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선생님께서는 세계수의 잔가지가 필요하시다는 건가요?”
“맞아. 그걸로 이 녀석의 새로운 신체를 제작할 거야.”
“…….”
아무리 힘이 감퇴하고 잔가지라고 하더라도, 그 나뭇가지 안에 담겨 있는 세계수의 힘은 개인에게는 감당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그것을 부탁해오는 것이 은현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무엇을 만들어낼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최종적으로 은현의 전력이 증강된다는 것은 앞으로 있을 다크엘프와의 교전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 또한 고려해볼 수 있는 점이다.
“알겠습니다.”
“고마워. 이 건은 꼭 보답할게.”
아침 일찍 오전부터 열린 회랑의 회의가 끝나고, 은현은 곧장 앨리스의 집으로 향했다.
“…엄청난 양이군.”
족히 건장한 남성 셋 정도는 간단히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짐꾸러미의 크기를 보고, 엘빈이 중얼거렸다.
“이것들을 가공해서 네 신체를 만들 거야.”
“나뭇가지들을 이용해서 말인가?”
“미리 말해두는데 평범한 나뭇가지들이 아니니까.”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림자를 이용해 나뭇가지들이 들어있는 짐꾸러미를 들어 올려, 운반을 하고 있던 엘빈은 자신이 운반하고 있는 나뭇가지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질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공만 된다면, 어지간한 인간의 뼈보다도 단단한 경도를 가질 수 있으니까.”
“너는 정말로 대단한 존재였군.”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길을 걷던 도중, 실체화를 하여 은현과 함께 걷던 엘빈이 은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는 소리다.”
일반적인 인간의 평균 수명의 한계를벗어나, 3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빈은 복잡한 시선으로 은현을 바라보았다.
“이런 녀석에게 에린을 맡겨도 될지….”
지금까지 봐온 은현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영혼이 울릴 정도로 실감을 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위험한 사건 사고의 중심에 거리낌 없이 뛰어드는 것이 은현이다.
그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여동생, 에린이 앞으로도 은현을 중심으로 일어날 사건 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은현도 에린에게 힘든 시련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엘빈에게 결의를다지라는 의미의 경고를 했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에린이 은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절대로 동경심과도 같은 스승에게 품는 감정이 아니다.
“뭘 새삼스레. 에린은 머지않아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가 와. 그만큼 노력했고, 성장했으니까.”
이미 아르미타스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은현은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자신에게 엉겨 붙어오는 습관을 떼어내지는 못했지만, 에린은 착실하게 성장하여 소녀에서 숙녀로 변모해가고 있다.
“…….”
그런 의미로 말했던 것이 아닌데.
엘빈은 아직도 여동생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은현을 쳐다보며 살짝 찡그렸다.
생각해보면 깨닫지 못하는 것도 그렇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라는 훌륭한 여성들을 아내로 두고, 3, 400살이 넘는 불멸자에 가까운 존재가 20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의 연정을 눈치챌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모르겠군.’
자신은 그런 긴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늠해볼 수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해 보이는 것은 은현은 에린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그럴 마음조차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두 분의 생각도모르겠고.’
은현의 아내가 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생각도 모르겠다.
정작 은현은 모르고 있지만, 그에게 엉겨 붙으면서 무한한 애정이 담긴 스킨십을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는 에린의 행동을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기회가 된다면 여쭤보도록 할까.’
가능하면 은현이 없을 때, 여동생의 연심에 대해서 복잡한 생각을 품고 있던 엘빈은 일리아나에게 물어보자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느닷없이 말을 걸더니, 이번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며 걷고 있는 엘빈을 보고, 은현이 말을 걸었다.
“너한테는 말할 수 없는 문제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은현은 생각에 잠긴 엘빈의 표정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도 않았기에 구태여 묻지 않았다.
이내 앨리스의 집에 도착한 은현은 정중한 노크와 함께 집안의 반응을 살폈다.
“네에! 누구세요?”
밝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작은 엘프 소녀가 나와 은현과 엘빈을 반겼다.
“어제 봤던 아저씨?”
“그래. 아저씨야.”
딱히 아저씨라고 불릴 만한 외모도 아니었지만, 새삼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귀여운 하프 엘프 소녀를 보고, 은현은 피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앨리스 있니?”
“네에. 아저씨가 오면안으로 들여 보내달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래. 그러면 들어가도 될까?”
“네.”
인간인 앨리스와 엘프인 데르킨의 피가 섞인 하프 엘프 소녀는 그렇게 은현과 엘빈을 집안으로 들였다.
“오셨군요.”
차를 마시며 이미 와있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랑 셋이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앨리스가 딸아이와 은현의 발소리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차 드릴까요?”
“잘 마실게.”
앨리스가 컵에 따뜻한 차를 따라 은현에게 권했다.
“오빠는 누구예요?”
“나는….”
집안에 들여놓고서 물어보기에는 한참이나 늦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엘빈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물어오는 에리스의 질문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간도, 정령도 아닌 지금의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은현의 제안에 따라 정령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지만, 자신의 현재 상태를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만큼, 엘빈은 자신의 현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페르니아스 안에서는 궁정마법사단에 입단할 정도로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것도 은현과 일리아나의 앞에서는 전혀 티끌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머뭇거리며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은현이 입을 열었다.
“아저씨의 친구야.”
“친구요?”
“응.”
“그럼 우리 엄마랑도 친구예요?”
“아니, 그건….”
호기심이 섞인 에리스의 질문세례를 받던 엘빈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에리스. 언니랑 나가서 놀까?”
“네에~!”
“부탁드릴게요.”
“네.”
에리스가 호기심이 섞인 시선으로 꼬치꼬치 질문을 하면서, 대화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자, 엘레노아가 요령 좋게 나선 것이다.
앨리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아는 에리스의 손을 잡고 집 밖을 나섰다.
“신기하네요. 원래 타인에게 저렇게 호기심을 품는 아이가 아닌데.”
어째서 자신에게 흥미를 가졌던 것일까.
엘빈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던 엘프 소녀의 눈을 다시 떠올리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네 딸도 자연 친화력이 높아서 정령사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있는 거야?”
“아마도…그런 것 같아요. 제 영향이기도 하고, 데르킨에게서 엘프의 피를 절반 이어받았으니까요.”
“흐응? 여기 엘프들은 모두 그 자연 친화력이란 게 높은 거였어?”
“아뇨.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일리아나의 질문에 앨리스는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선천적으로 자연 친화력이 높은 엘프들이 태어나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을 뿐이지, 모든 엘프들이 그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니까요.”
때문에 새롭게 태어난 어린 엘프들 중에서, 자연 친화력이 높아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엘프들에게는 정령술을 배운 다음, 기술을 배워 엘븐가드에 들어갈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진다.
대개 마을의 외곽으로 나가 사냥을 하거나, 수상한 침입자들이 있는지 없는지 경계 임무를 서는 전투적인 활용 방식으로, 정령술은 굉장히 유용한 능력이다.
때문에 정령술을 다룰 수 있는 대부분의 엘프들은 엘븐가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 친화력이 높은 엘프들의 숫자는 전체 엘프들의 숫자 중 절반이 조금 더 넘지. 오히려 인간이면서 정령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앨리스 쪽이 굉장히 드문 경우야.”
은현도 긴 시간을 살면서, 정령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만났던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자, 그럼….”
은현은 묵묵히 서 있는 엘빈을 흘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기한도 정해졌으니, 바로 제작에 들어가자.”
기한은 1개월이다.
다크엘프 진영에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정한 기간.
이 시간 내로 엘빈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담아내고,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릇을 제작해야 한다.
“호문쿨루스의 제작이라…. 살다 살다 진짜로 별걸 다 해보네.”
“어디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게아니긴 하지. 마법 가공. 자신 있지?”
이번에 다뤄야 할 재료는 바깥에서는 절대로 다뤄볼 수 없는 재료인 ‘세계수의 나뭇가지’다.
은현이 조금의 실수도, 낭비도 없어야 하는 이번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일리아나에게 물었다.
“흥. 날 뭘로 보고.”
세상을 뒤져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가장 귀한 재료들을 눈앞에 두고도, 일리아나는 긴장의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