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8화 〉218. 신의 꼭두각시(3) (218/730)



〈 218화 〉218. 신의 꼭두각시(3)


많은 영웅들, 실력자들과 만나고, 다양한 인연을 만들어 상황을 헤쳐나갔다.
그것은 은현이 가지고 있었던 운명을 비트는 힘이 작용한 결과였을지.
스쿨드가 부여한 운명개척의 권능이 영향을 준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운명이라는 것이 은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인지.
세상의 섭리에 대한 진리는 베르단디조차도 알 수 없는  고차원의 영역의 문제다.

[아이의 주변에는 항상 아이와 함께 싸워주는 누군가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아이 뿐이었단다.]

“…쯧.”

베르단디의 설명을 들은 일리아나는 과거에 한차례 조우했던 적이 있었던 메디아의 말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영생을 살아가는 불멸자라는 존재는 언제나 누군가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입장의 존재지.

어째서 지금 이 순간, 떠올리는 것도 끔찍이 싫은 그 여자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그 엘프 아이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런 조짐은 보였었지. 결국에는 지금 시점에서 터져버려 우리가 걸어둔 여신의 제약이 발동되어버렸던 것이었지만.]

지구에서 악마들과 전쟁을 이어나갔을 때, 은현의 신체기술의 기초를 다져주었던 주현성은 자신의 딸을 은현에게 맡기고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검술을 가르친 시에테는 재능이 없는 은현이 노력 끝에 아무리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자신의 경지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의 모든 기술을 가르치고 주현성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했다.
창술을 가르친 ‘무기’, 마창(魔槍) 브류나크는 은현이 악마 대공 아스타로트를 봉인시킬 때, 창인 자신의 본체와 함께 아스타로트의 공격의 데미지가 누적되어 무기로서의 수명을 다해 소멸했다.
하루 단위로 수천, 수만 명이 죽어가는 암울한 공허의 시대 속에서 많은 이들과 힘을 합쳐 모든 악마들을 다시 공허의 저편으로 밀어내어 봉인을 해내고, 싸움은 인류의 승리로 끝낼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는 것을 은현도 알고 있었기에, 감정으로 거부를 하면서도 그 희생들을 발판 삼아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이가 처음으로 사도의 역할보다 다른 일을 더 우선시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던 것은 이곳에서 있었던 사건이었다.]

은현은 실비아를 잃고 자신의 영혼에 권능과 함께 각인되어 있던 여신의 제약의 법칙을 준수하여, 철저하게  법칙에 따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사실상 60년에 걸쳐 그 제약을 깨달은 순간은, 은현은 진짜 ‘여신의 사도’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때로는 다수의 사람들을 희생시켜 단 한사람을 구하는 선택을, 때로는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시켜 다수의 사람들을 구하는 선택을,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숨기고 감추면서 이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행동을 해왔지.]

자신의 영혼에 주입된 규칙에 철저히 얽매인 상태로 이용할 수 있다면 어떤 쓰레기의 악인이라도 뒤에서 이용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이는  전쟁의 막바지에서 홀로 몇만 마리의 마수들을 홀로 막아내다가 끝에는 최후를 맞이했다.]

“아….”

은현의 최후를 들은 엘레노아는 작게 탄식했다.
이내 그때 그 광경을 직접 마주했을 일리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일리아나는 자신의 몸을 욕탕 안으로  담갔다.

“나쁜 X끼….”

“네?”

“이러면 날 두고 그렇게 죽어버렸다고 원망도 못하잖아.”

“아….”

질끈 감은 일리아나의 눈가에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려 욕탕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엘레노아는 작게 탄식하며 일리아나의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해주었다.
은현을 잊지 못하고 20년 가까이 혼자 사는 생활을 이어왔던 일리아나에게, 여신이 들려주는 은현의 과거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털어놓기라도 해주지…. 멍청한 X끼야. 진짜….”

“그러게요….”

미련하다.
어리석다.
가지게 된 사고방식과 논리들은 엉망진창이고 뒤죽박죽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일리아나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은현을 탓할 수 없는 이유는 그동안 짊어져 왔던 짐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순되고 마음이 깎여나갈 수밖에 없음에도 앞으로 걸어가야만 했던 은현의 마음을 헤아린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결국엔…현이를 되살려주셨잖아요. 게다가…그 영혼 속에 걸려 있던 ‘제약’이라는 것까지 없애주셨다고 들었어요.”

[그건…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신의 제약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자신의 사도로서  시간의 고행의 길을 걸어왔던 은현에게 베르단디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그것 만으로도 저한테는 평생의 은혜를 내려주신 거나 다름없어요.”

아무리 자신의 사도였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을 되살리기 위해 다른 신들을 설득하고 보통은 간섭할 수 없다는 하계에까지 내려와 그 인간을 곁에서 지켜보려는 신이 존재할  있을까.
은현의 영혼 속에 행동을 강제하는 제약을 박아넣었다고 하더라도, 신으로써의 입장과 역할을 제쳐두고, 베르단디가 은현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다.
게다가 어느 여신이 인간과 맺어지고 싶어 몸을 섞는 선택을 할 수가 있을까.
은현이 베르단디와 다른 여신들을 원망하고 있다면, 베르단디와 관계를 맺는 것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마녀 아이가 용기를 내어, 나의 아이에게 다가가 주었던 것이 굉장히 고마웠었다.]

부활 이후, 은현의 방을 찾아와 강제로 정력제를 먹이고 그를 덮치려는 과격한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을 때, 영혼의 제약이 사라진 은현이 일리아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는 것을 결심했던 장면을 베르단디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신과 사도의 아내들은 서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 ◆ ◆

“여, 여왕 폐하….”

마땅히 대화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결국 은현과 레지나가 대화할 장소로 고른 곳은 데르킨과 앨리스의 집이었다.
느닷없는 엘프 여왕의 방문에 앨리스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예를 차렸다.

“느닷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앨리스.”

“여, 영광입니다.”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그나저나….”

레지나가 은현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고는, 의외라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앨리스가 선생님의 무리에서 함께 여행을 했던 사이라니…. 인연이란 정말로 신기하네요.”

“…선생님?”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던 앨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레지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여왕의 시선이 은현에게  있던 것을 눈치채고 입가가 경직되었다.

“서, 설마…?”

“네. 이분이 어렸을 적 저를 직접 교육해주신 선생님이세요. 지금은 300년도 더  일이니까요.”

“정말로….”

본인이 그렇다고 직접 설명을 하고 있음에도, 믿겨 지지 않는 사실에 앨리스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곧바로 차를 내오도록 할게요. 호위분들도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앨리스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엘븐 가드의 엘프들이 레지나와 은현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후 앨리스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은현은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품고 있던 마력이 300년 전보다 적어지고 있던데.”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정확한 지적에 침음성을 흘린 레지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평범한 엘프들과 달리, 세계수의 축복을 직접적으로 받고있는 엘프 여왕의 혈통은 일부나마 신력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어쩌면 선대 엘프 여왕이 타종족이었던 인간인 은현에게, 어린 딸이었던레지나를 맡긴 이유는 은현의 몸과 영혼 안에 각인되어 있는여신의 잔재를 느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레지나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의말씀대로, 세계수의 힘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로 인해 세계수의 축복을 통해 계약했던 정령들이 모두 힘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게다가…동시에 세계수의 축복으로 풍족했던 대지들까지 조금씩 메말라가고 있죠.”

“힘이 줄어들고 있다라…. 입구에서 나와 조우했던 엘븐가드들이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했던 건 이게 원인이었구나.”

“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희 쪽에서 실례를….”

“아니, 그런  괜찮아. 오히려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던 엘프들이 많았다는 건, 그만큼 새로운 엘프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뜻이니까.”

다크엘프와의 항쟁으로 엘프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애 많이 썼구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여왕으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선대께서는?”

“저에게 왕위를 물려주시고, 이제는 은거하고 계세요.”

“그렇구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가만히 레지나를 응시했다.
밝게 빛나는 금발과 오똑한 콧날, 미색을 갖춘 이목구비에 가녀린 얼굴형 속에는 더이상 300년 전의 어린 엘프의 모습이 아니다.

“많이 컸네. 이제는 놀리지도못하겠어.”

“후후,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선생님. 여왕이라고요. 하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찬은 듣기 좋네요.”

오랜만에 만나는 인연이었기 때문일까, 은현을 마주한 레지나는 기분이 좋은 기색이었다.
짧은 문안 인사를 나누고, 은현은 곧장 이야기를 본론으로 되돌렸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 다크엘프의 무리들과 만났어.”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은현은 레지나에게 작은 촌락의 마을을 습격하여 납치한 인간들을 인신공양함으로써 무언가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모조리 죽이긴 했지만, 아마 그 다크엘프들을 통솔했던 우두머리는 따로 있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떠난 이후로 다크엘프들이 무언가 이곳에 수작을 걸어오지는 않았어?”

레지나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요. 하지만…”

고개를 돌려 창밖 너머에있는 거대한 나무,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은현은 레지나의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힘이 감퇴하기 시작한 원인이 다크엘프의 짓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거구나?”

“확실하진 않아요. 단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이해했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은현은 차를 대접해준 앨리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차 잘 마셨어.”

“가시려는 건가요?”

“오늘은  쉬려고, 도착하자마자 이곳에 온 거니까. 아내들이 내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내일 내가 다시 레지나 쪽으로 찾아갈게.”

‘아내’라는 단어의 발언에 레지나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결혼…하셨다고 들었어요.”

“응. 그래서…실비아를 보러  거야.”

“그때 보이셨던 두 여성분인가요?”

“맞아.”

“그렇군요….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일단은 성묘는 끝났고, 다른 목적도 있어서…이건 내일 얘기하도록 할게.”

이렇게 된 이상, 엘빈에 대한 이야기를 숨길 것이 아니라, 아예 공개를 하고 적극적으로 허락을 받는 것도 고려해볼 여지가 존재했다.
시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엘빈의 모든 사정을 듣고 엘빈에게 위로의 말을 건냈던 앨리스처럼, 레지나도 엘빈의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본 결과였다.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먼저 떠난 레지나와 엘븐가드 엘프들을 배웅을 보내고, 은현도 앨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의 집을 나왔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되었던 은현은 오늘 하루가 굉장히 기나긴 하루였다는 상념에 잠기면서, 나무 위에 건조되어 있는 집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이네.”

실비아와 함께 10년을 가까이 살았던 집이었지만, 흐르는 시간 자체는 300년이 넘게 오래된 집이었다.
레지나의 지시로 꾸준한 관리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의 추억이 잔뜩 남아있던 목조건물의 창문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의 풍경은 3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익숙한 기분을 불러일으켜 은현의 마음을 간질였다.

“아…오셨어요?”

거실로 들어온 은현의 모습을 발견한 엘레노아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 반겼다.

“씻고 있었어?”

“네, 네.”

살짝부끄러운  타월로 알몸 상태인 자신의 중요 부위를 가리며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하는 엘레노아는 관계를 맺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청초한 모습이다.
중요 부위 만을 가리고 전신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굉장히 선정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은현은 거실에 비치  짐 속에서 엘레노아의 옷을 꺼내어 그녀에게 입혀주기 위해 이동했다.

“읍!?”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느닷없이 엘레노아가 은현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해왔다.
알몸의 유방을 잔뜩 밀착시키면서 상냥하게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었고, 두 사람의 혀가 얽히면서 서로의 타액을 탐했다.
애정이 듬뿍 담겨있던 짧은 키스가 끝났다.
타액으로 이루어진 실선이 끊어지고  사람의 얼굴이 멀어지며 서로를 응시했다.

“…무슨 일 있었어?”

자신을 바라보는 안쓰러운 시선이 신경쓰여, 은현이 물었다.

“들었어요. 이 집의 주인과  마을에서 있었던 당신의 이야기.”

“…….”

누가 이야기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쩐지 안 보이신다 싶었는데, 둘을 따라가셨던 거구나.’

새삼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아내들에게 했다고 해서, 은현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베르단디가 어떤 의도로 실비아와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조차도 자신에 대한 배려와 염려가 담겨있는 행동일 진데, 뭐라 말할 수가 있을까.

“여신님은?”

“신계로 올라가셨어요. 지금 욕실 안에는…일리아나님이 혼자 계세요. 저는 괜찮지만…일리아나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저보다 더 마음이 울적해지신 것 같아요.”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었네.”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있어서 좋았어요. 좋았던 동시에…너무 안타까운 이야기였어요.”

엘레노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부정했다.

“저는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엘레노아는 포옹을 풀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인 은현은 그녀와는 반대로 옷을 벗고 곧장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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