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217. 신의 꼭두각시(2)
“그건…!”
엘레노아가 욕탕 속에서 몸을 일으켜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베르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안다.]
마치 하나의 인간을 대우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하는 꼭두각시와 같다.
[하지만…아이는 그 역할을 받아들였고, 그 역할을 강제적으로라도 이행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도 그것에 대해서는 납득을 할 수밖에 없었지.]
애초에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비롯해, 세 가지의 권능을 부여하여 특권을 주었던 이유는 그저 베르단디가 은현이라는 이레귤러 적인 특이케이스의 인간을 발견하고, 그를 특별히 여겼던 것이 모든 이유가 아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감상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철저하게 결과만을 추구하는 효율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들이 신이라는 존재들이다.
“여신님도…현이에게 그 제약을 건 것에 동의하신 건가요?”
계속 생각에 잠겨있던 일리아나가 입을 열고, 베르단디에게 물었다.
[…그렇다. 처음 아이를 우리들의 사도로맞이했을 때, 우리 자매 모두가 동의했던 사안이었단다.]
노른의 세 여신들은 은현의 운명을 비틀어버리는 그 가능성 속에서, ‘하계의 멸망’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비틀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과정들을 읽어낸 베르단디는 처음 은현을 사도로 받아들였을 때, 은현이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역경들을 걱정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렇기에 한 번도 해본 적도 없었던 여신의 입맞춤을 통해 은현의 앞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여신의 가호를내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아무리 베르단디가 우르드나 스쿨드와 달리 특출나게 은현을 아낀다고 하더라도, 신으로써 은현에게 부과해야 했던 역할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은현과 세 여신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었다.
[그때, 아이는 깨달았던 게지.]
은현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신들의 대리자이며 ‘하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영웅을 육성시키는 사명을 부여받은 신의 사도이다.
-그렇구나….
은현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연과 친분을 쌓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인간의 관점이 아닌, 신의 사도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보자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신의 사도인 은현이 영웅의 자질을 가진 레지나를 데리고 구출해야 하는 사명을 수행하려는 것이 쉬워지도록 상황이 만들어지고있었다.
-하지만 왜?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여신의 제약이 발동된 것일까?
감정의 충동에 맡겨 일을 그르칠 뻔했던 적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결국 이렇게 죽을 때까지 너하고 술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네. 우리 홍이…잘 부탁한다.
재능이 없다고 포기하라고 이야기했음에도, 결국엔 은현을 아꼈던 주현성이나.
-잊지 마. 네가 이 미친 세상 속에서 찾아낸 내 유일한 희망이니까.
재능이 없었던 은현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자신의 검을 가르쳤던 시에테.
-상관없어! 절대로 무너지지 마! 저 새끼 죽이는 것만 생각해! 절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
악마를 멸하는 것 자체가 사명이었던 무기, 은현이 악마를 처치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의 소멸을 각오했던 브류나크.
이외에도 함께했던 많은 동료들을 희생시켰음에도, 사도가 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동된 여신의 제약의 조건은.
-내가 사도의 사명을 거부하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려고 하면….
그때는 무언가 저항을 해보려 할 틈도 없이 잃었다.
막 사도가 되었던 은현은 약했고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었던 나약했던 시절.
그들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과거다.
즉 직접적으로 사도의 사명을 거부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면, 영혼에 각인된 제약은 발동되어 은현의 행동을 제한한다.
-딸을 잘 부탁드릴게요.
심지어 남아있는 엘프들을 통솔하여 최전선으로 나서면서, 은현에게 레지나를 직접 맡긴 인물은 레지나의 어머니인 엘프 여왕이다.
어째서 엘프 여왕은 딸을 인간인 은현에게 교육을 맡겼는가.
어째서 엘프들은 달의 마을 안에서 강한 전력이나 다름없는 은현을 최전선에 내보내지 않고 엘프 공주의 호위를 시키는 것에 동의를 하는 것인가.
어째서모든 엘프들은 다른 종족인 은현에게 호의를 가지고, 은현을 서슴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나는 어째서 엘프의 마을을 찾아왔던 거지?’
은현이 실비아를 만나기 이전부터, 엘프의 마을을 찾고 있었던 이유는 단지 ‘세계수’라는 신비한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어떠한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달의 마을에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운명은, 자연스레 은현에게 사명을 수행하라고 강제적으로 등을 떠밀고 있는 것만 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은현은 엘프 여왕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것 이외의 선택지를 고르는 것 자체가 여신의 제약으로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는 은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나, 공주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빨리 돌아올게요. 절대로…다치면 안 돼요.
-나도 엘븐가드의 일원이야.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까 봐? 너야말로 공주님한테 생채기라도 나게 하면 안 돼. 알겠니?
그렇게 은현은 실비아와 엘프 여왕을 포함한 엘프들과 작별의 인사를 마치고, 레지나와 호위 엘프 몇몇과 함께 달의 마을을 빠져나왔다.
-선생님. 저는 이제 괜찮아요.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이동한 은현과 레지나 일행은 마침내 엘프 왕족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은신처에 도착하였고, 레지나는 담담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부디 어머니와…엘프들을 도와주세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어린 엘프 소녀의 두 손이 굉장히 떨리고, 힘겹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안타까운, 슬픈 감정들이 마구 새어 나왔다.
엘프의 희망이라며 자신 하나를 피신시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어머니와 엘프 전사들을 생각하면서 은현에게 부탁을 해왔다.
은현은 스스로 자신의 영혼 속에 강제되어있는 여신의 제약을 재차 확인했다.
아까와 같은 강제성이 발현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사명을 완수했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어떤 기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은현은 알 수 없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실비아와 다른 엘프들을 구하고 싶다는생각뿐이었기에, 깊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혼자가 된 아이는 나의 권능을 이용하여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 만에 주파할 정도로 쉬지 않고 달렸지.]
그리고 불타는 달의 마을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엘프들과 다크엘프들, 악마들을 목격하고 곧바로 싸움에 가세를 했다.
소환을 통해서 공허의 저편에서 넘어왔다고는 하지만, 세상의 섭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아르케나 대륙으로 넘어온 악마들은 모조리 하급, 중하급에 해당하는 악마들이었다.
지구가 멸망하기 이전에, 최상급, 상급 악마들과의 조우에서도 살아남았던 은현에게는 귀찮을지언정, 상대하기 어려운 적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악마들이라도 숫자가 모이면 쉬운 것도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일 대 다수의 치열한 싸움이 이어진 끝에, 결국엔 승리를 거머쥔 은현은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황급히 엘프 쪽의 전선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는….]
-누나!
소환된 악마들이 모두 정리가 되어가던 것을 기점으로, 다크엘프들이 점점 불리해져 가고 엘프들의 우세가 굳어져 가는 전황 속에서, 실수로 인해 다크엘프들에게 인질로 붙잡혀 버린 몇몇 엘프들 중에 실비아의 모습을 확인하고 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은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실비아는 자신의 목에 들이밀던 다크엘프의 칼날에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을 선택했다.
인질로 붙잡힌 자신의 존재가 전쟁을 패배로 이끌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바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강경한 수단이었다.
-아…!
실비아의 결심을 본받아 함께 인질로 붙잡혀 있던 다른 엘프들까지 모조리 자결을 선택하자, 은현을 비롯해 인질로 인해 망설이고 있던 엘프들까지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크엘프들을 모조리 척살하기 시작했다.
-누나…안 돼요….
-하, 하하…미안해…. 정말로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멍청하게 붙잡혀서 인질이 되는 바람에….
실비아는 목에서 쏟아지는 피로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와중에,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은현의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공주님을 피신시키지 않고, 처음부터 최전선에서 함께 싸웠더라면….
-그랬으면, 공주님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아까는 아주 조금…네 생각이 났어.
자신의 목덜미에 겨눠진 서슬 퍼런 칼날을 두고,자결을 결심한 와중에 은현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실비아는 은현에게 고백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은데…. 그냥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너무 좋아서…앞으로도 쭉 이어지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어서….
-누나, 괜찮아요. 말하지 마요.
-하하…. 네가 죽을 때까지 내가 평생 데리고 살려고 했는데…. 내가 먼저 가버려서 미안….
실비아는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할 것만 같은 일그러지는 은현의 표정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현아. 괜찮아. 비록 이렇게 죽어도 난 절대로 너를 원망하지 않아.
상냥하게 쓰다듬던 실비아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별을 맞이하게 된 순간, 은현은 자신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던 소중한 여자를 떠나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크엘프들의 술수로 하계에 악마들이 다시 재침공을 하게 되는 전조를 막아냄으로써, ‘하계의 멸망’이라는 정해진 운명이 시작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은현이 느낀 상실감은 너무나도 컸다.
[아이는…안일했던 게지. 수명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고 불멸에 가까운 존재가 되면서, 10년이고, 20년이고 언제고 그 엘프 아이와 함께하게 될 것이라고 마음속 어딘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착각이자, 자그마한 바램이었다.
그렇기에 10년이 넘도록 함께 해왔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마음도 전하지 못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시간들이 너무나도 즐겁고 소중해서 그 관계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비아가 죽었을 때, 여신의 제약으로 인해 그녀와 함께 싸운다는 선택을 고를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모든 다크엘프들을 죽이고, 엘프와 다크엘프 간의 항쟁은 다크엘프의 패배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전선에 나서서 싸웠던 엘프들 중, 사망한 숫자는 전체 전사들 중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 엘프의 숲은 불타버려 재건을 해야 하는 상황.
[엘프의 마을을 재건하는 것에 함께 힘을 쓰면서, 아이는 자신의영혼 속에 새겨져 있는 ‘제약’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어째서 세 여신들은 자신의 영혼 속에 이러한 제약을 걸어두어 강제적으로라도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는가.
은현이 사도의 사명보다, 소중한 사람을 더 우선시하고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순간이 오리라고,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혼에 이런 장치를 걸어둔 자신의 세 여신들을 원망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지.
이것은 인간의 수명을 초월한 삶과 시간을 부여하는등, 이런저런 능력과 혜택을 부여해주었던 것에 대한 대가다.
-아이야.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싫다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처음 여신의 방으로 소환이 되어 사도의 제안을 받았을 때, 여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은현, 본인의 선택이다.
사도의 역할을수행하지 않고, 그 임무를 저버리려 했던 것은 은현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여신들의 탓으로 돌릴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실비아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처음부터 공주를 피신시키는 것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자신은 엘프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악마들과 다크엘프들을 막아내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만약의 가정.
-이런 가정도…다 부질없어.
이미 실비아는 죽었고, 자신은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 일까.
고민은 생각만큼 길지 않았다.
이런 감상에 빠져있어도, 은현은 일어서서 여신들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틀림없이 나타나겠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들을 비롯한 사사로운 감정들은 언젠가 또다시 여신의 제약과 충돌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때마다 실비아를 잃었을 때처럼, 이렇게 마음의 일부가 깎여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칙과 리스크를 알 수만 있으면…대비할 수 있어.
시작부터 그런 욕구를 아예 차단하면 된다.
마음을 주고 싶을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자신에게 힘을 부여하고, 역할을부여한 신들의 방식에 철저히 따라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미래의 엘프의 희망인 엘프 공주 하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엘프들의 생명을 저버려야 하는 방식.
그것이 더 많은 엘프들과 이 세계를 지키는 미래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은현도 믿어야만 했다.
은현의 존재는 전쟁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 ‘배럭’ 속에서 생산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마린’이라는 일개의 ‘유닛’에 불과했다.
세계 너머에서 자신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이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유저’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일개의 ‘유닛’.
달의 마을의 복구 작업이 끝나고, 은현은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다.
-가시는 건가요?
-네.
-레지나가 쓸쓸해 할 거예요. 그 아이에겐…아직 당신이 필요해요.
-레지나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가르쳤습니다. 나머지는 그 아이가 하기에 달렸죠. 제 역할은 여기서 끝입니다.
은현은 어째서 자신이 세계수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이끌려 엘프의 마을을 방문을 할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엘프와 다크엘프 간의 항쟁에서, 영웅의 자질을 가진 레지나는 죽게 되고, 이후 중급 이상의 악마들이 침공하게 되어 ‘하계의 멸망’이 초래되는 미래가 확정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운명개척’의 권능을 통해, 타인의 미래와 운명 또한 비틀어버릴 수 있게 된 은현이 개입하어, 그 확정된 미래를 바꿔버리도록.
거대한 운명의 흐름이 자신을 달의 마을로 이끈 것이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은현은 뒤를 돌아보며 거대한 나무인 세계수를 응시했다.
오랜 시간을 한 지붕 안에서 살아왔던 실비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저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