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6화 〉216. 신의 꼭두각시(1) (216/730)



〈 216화 〉216. 신의 꼭두각시(1)

[아이가 처음 그 엘프 아이를 만난 것은 약 350년 전이었다.]

당시의 은현은 그저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도는 방랑 생활을 하면서 개인의 실력을 갈고닦는 세월만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지구가 멸망하기 이전, 기술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그 기술이 무뎌디지 않도록, 더욱 위의 경지를 노리도록 은현은 개인의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
가뜩이나 은현에게 체술을 가르치고, 검술과 창술을 물론 다양한 기술을 가르쳤던 여러 스승들은 하나 같이 은현을 무술에 재능에는 일도 없는 반푼이 만도 못한 둔재라고 말을 일컬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현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단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걔가 재능이 없었다고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베르단디의 말에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그 사람이 노력파였다는 이야기는 잘 공감이….”

언제나 자신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력과 해결방법을 제시해왔던 은현은 엘레노아는 물론, 일리아나의 마음속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만능의 영웅처럼 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후후, 둘은 지금의 아이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이는…남들보다 10배는 더 노력해야 하나를 성취해낼 정도로 재능이 없는 아이였지.]

“자기 사도에 대한 평가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은현에 대한 평가가 가차가 없었기 때문에, 일리아나는 실소를 흘렸다.

[후후, 하지만 그 노력의 끝에, 성취를 이뤄내는 집착과 집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아이였기 때문에….]

작게 미소지은 베르단디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침울해졌다.

[우리는 아이를 선택한 것이다.]

무언가를 이뤄내고자 바라는 강력한 열망,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주어져 있던 운명과 미래를 비틀어내었던 그 눈부심.

[원래 아이는 죽을 시간과 장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족들은 악마에게 살해당하고, 은현 또한 그 악마에게 잡아먹혀 저항 번 해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 속에 엑스트라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하찮은 배역을 부여받았던 존재가 바로 은현이다.
하지만 은현은 인간의 몸으로 가족을 살해한 악마에게 저항했으며, 끝에는 그 악마를 죽여 가족의 복수를 하기까지 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사망해야 했었던 인간이 사망하지 않고, 비틀려버린 운명을 감지해낸 여신은 은현의 존재를 주목했다.
어째서? 왜?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악마를 죽일 수 있었는지, 죽임을 당하는 미래를 스스로 비틀어버릴 수 있었는지, 개연성을 따지고  원인을 분석하고 생각해볼 여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 많은 인간들의 운명들을 보아왔으면서, 딱  번 유일하게 등장한 이레귤러와도 같은 존재.
그저 신이 읽은 미래를 비틀어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인간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원인’과 ‘과정’ 따위는  필요도 없었고, 신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재능.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집념.
그것이 은현이 선택된 유일한 이유다.

[아무튼,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아이가 그 엘프 아이를 만난 것은 나의 사도의 사명을 부여받고 하계로 내려간 지, 약 40년이 되었을 때였다.]

‘하계의 멸망’을 막아내고 대륙을 지킬 수 있는 영웅을키워내고 보조하라는 사명은 설명만으로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여러모로 모호한 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영웅이 될 자질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판별하는가?
언제 나타나는가?
어디서 나타나는가?
애초에 다시 세상을 덮치는 ‘하계의 멸망’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지구를 침공했던 악마들이 등장했던 것처럼, 아르케나 대륙에도 힘겹게 공허의 저편에 봉인했던 악마들이 다시 침공을 해오는 것일까.
여신의 사도가 되었지만, ‘어디로 가라.’, ‘누군가를 찾아라.’, ‘무언가를 해라.’라는 자세한 행동지침이 나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은현은꾸준한 자기 단련을 통해 부족한 재능을 반복된 노력과 경험으로 채워 넣으면서 방랑하는 생활을 보내왔고, 그 과정에서 한 여자 엘프, 실비아를 만났다.
마수의 무리들과 조우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황의 실비아를 발견한 은현이 싸움에 가세했던 것이 만남의 시작.
마수들의 위협에서 자신을 구해낸 놀라운 실력의 검사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실비아는 물었다.

-당신은…누구죠?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은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당연한 대답을 입에 담았다.

-사람인데요.

-아니….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닌데….

-엘프는 처음 보네. 정말로 실존하는 종족이었구나.

뾰족한 귀를 흘끗거리며 중얼거린 은현의 말을 듣고, 생각보다 놀라기는커녕 담담한 표정을 짓는 은현에게 실비아는 신비한 인상을 품었다.
은현은 검을 역소환시키고 등을 올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는 이만.

-어, 어디로…?

-세계수라는 나무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그걸 어떻게…!

세계수의 존재를 어떻게 인간이 알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실비아가 크게 당황하며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긴 은현의 뒤를 쫓았다.

-어, 어떻게 인간이 세계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답하세요!

끈질기게 추궁하는 실비아와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제 갈 길을 가던 은현의 기묘한 동행은 시작되었다.
몇 년을 함께 여행하면서 깨달은 점은 은현의 정체가 좀처럼 종잡을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세계수에 대한 것을 알고 있던 것도 그렇지만, 세월의 흔적이 은현에게는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언제나 늘 한결같이, 은현의 외모는 엘프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게다가 늘 같은 시간에 강도 높은 훈련을 꾸준히 해왔던 것에 대해서, 대단한 집념을 느끼기도 했다.
서로의 대화를 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자 방랑하는 여행과는 달리,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여행을 한다는 감각은 은현에게나, 실비아에게나 그렇게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많은 대화 속에서 서로의 나이를 공개하고 100살의 차이가 나는 연상의 실비아를 은현이 누나라고 부르게 된 것은 서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은현과 실비아는 마침내 세계수의 비호를 받고 있는 엘프들의 나라, 달의 마을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인간인 방문객의 존재를 엘프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 제가 데리고 살게요! 제집에 두고 평생 감시할 테니까, 출입을 허가해주세요!

-…누나, 그거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동족인 실비아의 필사적인 설득도 있었지만, 은현이 달의 마을에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공교롭게도 꾸준히 단련해왔던 무술이었다.
엘프들이 정령술과 궁술을 이용하여 인간이었던 은현을 위협하려 했으나, 도리어 은현에게 당하면서, 상처 없이 엘프들을 제압해낸 것으로 그의 실력을 본의 아니게 입증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정령의 존재를 감지해낼 수 있었던 은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공격으로 이점을 살리는 요행이 통하지 않았으며, 긴 시간 동안 발전시켜온 궁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은 엘프들에게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었다.
결국 실비아의 설득과 함께 은현이 엘븐가드에 들어가 그 실력을 달의 마을을 위해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은현의 체류는 허가가 되었다.
이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은현과 엘프들 사이에 존재했던 갈등의 골은 점차 사라져갔고, 많은 엘프들이 은현의 인성과 실력을 인정하면서, 은현은 조금씩 달의 마을 속의 일원으로 녹아 들어갔다.

-당신이 그렇게 기술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인간이군요.

평소처럼 엘븐가드의 일원으로써 실비아를 포함한 동료 엘프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복귀하는 도중, 많은 호위들을 거느린 고귀한 엘프가 은현을 찾아왔다.
은현은  고귀한 엘프의 다리 뒤에 숨어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엘프 소녀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레지나라고 해요. 내 딸이죠. 내 딸의 교육을 맡아주시겠어요?

-…왜 저입니까?

다른 엘프들도 있고, 자신은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이종족인 인간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어째서 차기 엘프 여왕의 교육 담당으로 자신을 고른 것인지, 은현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최근 엘븐가드들 사이에서 당신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더군요. 인간의 몸으로 엘프들을 압도했던 그 기술들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단련방식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훌륭한 교관이라며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그렇기에 제 딸의 교육을 맡겨보고 싶어요.

본의 아니게 여왕의 명으로 떠맡게 된 레지나는 정말로 ‘천재’에 속하는 부류였다.
엘프 여왕의 혈통으로 태어나 마나의 축복을 받은 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선천적으로 많은 마나를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검과 활을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 마냥 모든 가르침을 흡수하는 재능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자신이 몇 년에 걸쳐서 쌓았던 무술의 기초 단계를 1년도  되지 않아서 쌓는 수준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재능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이도 참 멘탈 좋은 것 같아.

-무슨 말이에요?

한 번은 실비아가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던 적이 있었다.

-공주님의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다며? 네가 몇 년에 걸쳐 쌓은 것을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달성할 정도로. 나는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상대방은 그걸 간단히 추월해버린다면, 난 아마 공주님을 질투할지도 몰라. 특히나 현이는 공주님을 가르치는 역할이니까.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인 저와 엘프인 공주님을 비교하면  되죠.

애초에 인간과 엘프의 사이에는 수명부터가 다르고,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재능의 영역이 다르다.

-저한테는 저만이 가지고 있는 역할이 있으니까.

그런 질투심과 고민을 가지는 것은 지금의 은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은현은 레지나를 교육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사명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웅을 키워내어 ‘하계의 멸망’이라는 정해진 운명을 막아내는 것.
레지나가 빠른 속도로 은현의 실력을 따라잡고, 추월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훌륭한 영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엘프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해내고 있는 것에 어떻게 불만을 품을 수가 있을까.
은현은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 그런 모습이 멘탈이 대단하다는 거야. 바보야.

실비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은현의 등을 살짝 껴안았다.

-너무 공주님한테만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도 신경 써줘.

-알았어요.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은현과 실비아의 관계도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달의 마을의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전쟁이 터졌다.
세계수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다크엘프의 진영이 엘프 진영을 침략해 온 것이다.

-어서! 여왕폐하와 공주님을 피신시켜야 합니다!

그냥 다크엘프들 만이라면, 그럭저럭 싸워  만한 전력이었지만, 엘프들이 이렇게 허둥대는 이유는 다크엘프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악마소환을 통해서 불러낸 악마들이 더  문제였다.
엘프의 당면 과제는 크게  가지.
 번째는 소환된 악마들과 다크엘프 군대와의 전쟁.
두 번째는 아직 미숙한 엘프 공주의 피신.

-은현에게는 레지나의 피신이라는 임무를 맡기겠어요.

-아뇨. 저는….

은현은 엘프들에게 밝힌 적은 없었지만, 지구가 멸망하기 이전, 악마들과 수차례 교전을 벌였던 적이 있다.
아무리 인간들보다 긴 시간을 살아왔다고는 하더라도, 엘프들 중에는 악마들과의 전투를 벌여야 한다면 은현만큼 경험이 많은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현은 공주의 피신이라는 임무보다, 악마와 다크엘프들과의 교전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탁한다.

-너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자가 없어.

-현아, 나는 괜찮아. 공주님을 부탁드릴게.

은현이 강하다는 사실은 달의 마을에 사는 엘프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그들 모두가 은현의 인성과 실력을 의심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힘을 전선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나이가 어려 미성숙한 차기 엘프 여왕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키기 위해서다.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그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기에, 그들은 죽을 수도 있는 전선에 망설임 없이 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엘프를 위해! 숲의 주민을 축복하고 있는 세계수를 위해!

엘프라는 종족 전체의 운명과 번영을 우선시하고 앞날을 이어나갈 다음 세대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수 있는 존재들.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엘프들을 보며, 은현은 이를 갈았다.

-…웃기지 마. 종족의 번영, 미래 같은 것보다, 나는 당신들이 더 소중해. 나도 당신들과 함께…크윽!?

-…현아?

순간 할 말을 잃으며 신음을 내뱉은 은현을 실비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건….

은현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레지나를 피신시키는 임무를 거부하고, 함께 엘프들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입 밖으로 표현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은현의 영혼을 건드리고, 그 의지를 표현하려는 것을 강제적으로 막았다.
마치 앞에 놓여져 있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양, 무언가가 그 선택지로 향하는 길을 틀어막고 있다.
그것은 세 여신들이 사도인 은현의 영혼 속에 박아 넣어둔, 역할을 강제로 수행하게 만들기 위해 걸어둔 하나의 장치.
세뇌, 사상의 개변, 마음의 조작 따위의 그런 개념이 아니다.
하고 싶지 않아도,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지를 선택하도록, 강제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강제력.
여신의 사도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발동된 ‘사도의 제약’을 자각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라.’

은현의 영혼 속에 각인된 ‘제약’은 눈앞에 있는 엘프들과 함께 싸워 다크엘프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엘프의 차기 여왕이자, 영웅 후보로 선택된 레지나 공주를 안전하게 살리는 것을 더욱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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