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5화 〉215. 달의 마을(4) (215/730)



〈 215화 〉215. 달의 마을(4)


“엄청나네요….”

길을 걷던 도중, 엘레노아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하고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 나뭇잎들 사이사이로 비치는 마을의 풍경은 장관 그 자체다.
사람 몇십 명이 동그랗게 둘러싸고 팔을 둘러도 모자랄정도로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고, 거대한 나무줄기만큼이나 굵은 나뭇가지들위에 건조되어있는 목조건물들은 그저 외관만으로도 엘레노아의 시선을 빼앗았다.
평평하고 고른 땅 위에 건축하여,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인간들의 건물과는 달리, 나무 위에 지어진 건물들은 자연과 하나가 된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하하,그리 반응해주시니 조금 기쁘군요.”

엘레노아의 반응을 본 데르킨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앨리스에게도  마을의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굉장히 아쉽습니다.”

몇 안 되는 인간들이 엘프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반응은 한결같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마을의 환경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 유일하게 이 풍경을 볼 수 없었던 인간은 시력을 잃은 앨리스가 유일했다.

“정말로…눈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많은 인간들이 죽어 나갔다던 대전쟁을 종식시킨 영웅 중 한 명의 이후의 인생이 너무 안타까웠던 엘레노아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였다.

“아까는 아무런 말도 안 하긴 했는데,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아니지?”

“…….”

넌지시 떠보는 투로 물어보는 일리아나의 질문에 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일단은 조용히 있어.”

“그게 무슨….”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하는 은현의 말에 엘레노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희망을 발견하게 된 데르킨은 더더욱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은현님께선 아내의 눈을 고칠  있는 방법을….”

“아직 방법은 몰라. 시력을 회복시킬 방법이 존재한다면, 나도 앨리스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고 싶어. 하지만 검증되지도 않은 확신이 없는 방법을 사용해서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남는 치료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희망을 품지 않도록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일리아나도 앨리스의 당사자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앨리스 본인이 지금의 생활을 만족하고 있어 보이고, 제대로 검증된 치료 방법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방법을 강구해낸다면, 그때 데르킨과 앨리스에게 의사를 물을 생각이었어.”

“아, 아아….”

데르킨이 은현의 말을 듣고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어깨를 떨었다.
이내 은현을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고 간곡한 애원의 말을 꺼냈다.

“부탁드립니다…. 뭐든, 뭐든 하겠습니다. 아내의 눈을 위해서라면….”

“딱히 대가를 바라고 치료를 해주려던 것도 아니야. 앨리스는 네 아내이기도 하지만, 나와 일리아나의 동료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그 전쟁을 함께 헤쳐나갔던 것에 대한 보상이라면…해주고도 남지. 게다가 엘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예정이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데르킨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단은 너만 알고 있어. 앨리스에게는 말하지 말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소용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걸으면서, 처음 와보는 엘프의 마을의 관광의 기분을 나름 만끽하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숲으로 가득 찬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기 바빴다.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 인간인 자신들이 마을의 길거리를 당당히 활보하고 있음에도 딱히 경계나 관찰의 시선이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뭔가…반응이 생각보다 평범? 하네.”

“그러게요.”

은현에게 굉장히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종족이라는 이야기를 사전에 들었기 때문일까, 배척이나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른다고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던지라 생각보다 간단히 받아들여졌다는 인식이 강했다.
종족이 차이라는 점 등으로 트러블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무런 일도 없으니 역으로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예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만큼 무난한 것이 없지만, 만반의 준비와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것대로기분이 복잡했다.

“최근 엘프들 사이에서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변화인가요?”

“네. 한 20년 전부터 그게 엘프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해서….”

“20년 전….”

일리아나는 데르킨이 언급한 구체적인 시간대의 언급에 작게 그때를 곱씹었다.
정확히 제국과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전쟁으로 대륙 전체가 혼란의 시기를 겪었던 시대였다.

“그때…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건….”

엘레노아의 질문을 받은 데르킨은 잠깐 은현의 옆얼굴을 바라보더니,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건 엘프들의 중대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중에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개를끄덕이며 납득한 두 여성은 그것으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와아….”

엘레노아는 고개를 끝까지 들어 올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를 응시했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구름에 가려져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내지르게 만드는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가장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이 나무가 바로, 달의 마을과 대륙을 수호하는 세계수입니다.”

세계수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질이다.

“흐음….”

은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세계수의 힘이 300년 전에 비해서 현저히 줄었어.’

어쩌면 앨리스가 꺼내기 꺼려했던, 지금 엘프의 마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것과 관계된 일이 아닐까.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니야.”

“그런데…성묘하러 오신 거라 하지 않으셨나요?”

멍하니 세계수를 응시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묘비와 같은 자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프의 마을에서는 죽은 이의 묘비를따로 만들지 않습니다.”

“네? 그러면….”

“자연에서 태어난 엘프들은 모두자연으로 돌아간다는 풍습이 있어.”

엘프라는 종족은 태어나는 개체 수도 인간에 의해 극히 적을뿐더러, 그 긴 수명 때문에 영면에마주하는 숫자도 극히 적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안에 영면에 엘프들을 묻어주는 관습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망한 엘프들은 모두 세계수의 뿌리 아래에 묻힙니다.”

“그렇군요….”

세계수의 비호를 받아, 태어난 엘프들은 모두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풍습.

“사실 성묘라는 개념도 최근 달의 마을로 들어와 정착한 아내에게서 들은 풍습일 뿐, 엘프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퍼지지도 않은 개념이죠.”

“이런 거대한 나무가 아직까지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있었던 건, 결계야?”

“맞아.”

어지간한 영지 하나는 간단히 압도할 만한 두께와 구름을 뚫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의 존재를 눈앞에 당도할 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런 거대한 나무가 떡하니 두 눈에 보인다면, 지금까지 엘프라는 종족이 대륙에 모습을 감추고 긴 시간을 살아올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법이라는 분야에서 어느 일정의 수준에 도달해있는 자신이 작은 이질감조차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 결계가 있었다는 것에, 일리아나는 흥미를 품었다.

“흐응….   자세히 분석해보고 싶네.”

“너에게도 굉장히 의미 있는 결계가 아닐까.”

은현은 흥미를 보이는 일리아나의 말에 대꾸를 하며, 은현은 자리에 쪼그려 앉고는 아까 전, 길을 걸으면서 꺾었던 꽃들을 세계수의 거대한 나무줄기 아래에 가지런히 두었다.

“…….”

아무런 말 없이 아래를 응시하는 은현을 따라 주위의 분위기가 굉장히 고요해졌다.
머리카락을 흔드는 작은 산들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사실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세계수에 대고 하는 은현의 말은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향하는,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는 말이었다.

“그냥 도망치는 거였다는  저도 잘 알았어요. 그래도…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죄책감, 마음을 약해지게 만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추억들, 신의 사도로서의 사명.
그것들을 핑계로 삼으며 엘프의 마을을 떠났다.

“그래도 많은 도움을 받고, 덕분에 결심이 섰어요.”

전쟁이 끝나고 죽음을 맞이했던 은현의 몸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부여한 여신의 배려, 태어나 처음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 두 아내들의 존재는 마침내, 도망치고 있던 과거의 인연으로부터 마주할 결심을 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저 이번에 결혼해요. 과분하게도 아내가 둘이나 생겼어요.”

쓰게 웃으며 은현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소개하듯이 말을 이었다.
살아있었다면, 실비아는 뭐라 대꾸했을까.

“제가 이번에 이곳을 찾아온 건, 실비아와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계속 마음속 어딘가에 가지고 있었던 죄책감과 아팠던 기억의 짐들을 내려놓기 위한 과정의 시작이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분들이 행차하시는데?”

“저, 저분은….”

은현의 성묘가 거의 끝나갈 즈음,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와 함께 등장하는 무리에 시선이 갔던 일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왕 폐하!”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는, 예를 차리는 데르킨의 행동에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무리의 중심에 서 있는 여자 엘프를 바라보았다.

“여왕?”

주위의 엘븐 가드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고 있고, 가만히 있어서 고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가장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엘프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다.

“데르킨.”

“예?”

“아내들을  집으로 안내해주겠어?”

“흐응….”

일리아나는 은현을 조금 흘겨보더니 이내 어쩔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올 거지?”

“오래 안 걸려.”

“알았어. 가자. 엘레노아.”

“아…네.”

“안내 부탁할게요.”

“어, 그게….”

은현의 부탁이 있지만, 엘프 여왕의 앞이라 함부로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데르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건지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하세요.”

이내 그의 고민을 알아본 엘프 여왕이 고운 미색의 목소리로 허가를 내리자, 데르킨은 그제 서야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데르킨이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혼자만 남겨진 은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엘프 여왕을 응시했다.

“오랜만이야. 레지나.”

“이…!”

엘븐 가드 중  젊은 엘프가 자신의 여왕을 여왕으로 존대하기는커녕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는 것을 보고 발끈했지만, 그런 그의 행동을 다른 엘븐가드들이 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인간은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네.”

직접 엘프 여왕, 레지나의 허가가 떨어진 이상 은현의 말투를 트집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은현을 본적이 없는 젊은 엘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레지나의 말에 따라야 했다.

“오랜만이에요. 350년 만인가요?”

“그래.”

은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

“후으….”

“하~아. 좋다…. 얼마 만에 해보는 목욕인지.”

나무로 건조된 욕탕 안에 몸을  담근 엘레노아와 일리아나는 기분 좋은 교성을 내쉬며 욕탕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좋은 것이냐?]

“네? 그야 그렇죠. 얼마 만에 해보는 목욕인데요.”

제대로  욕실 설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장거리 여행을 해본 것은 전쟁 이후로 굉장히 오랜만에 해 보는 경험이었다.
여행의 도중, 중간에연못을 발견하여 몸을 씻었던 것을 제외하면, 상쾌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 정도로 몸을 씻어본 적이 없었다.

“그 던전 주택의 설비가 너무 좋아서…오히려 이렇게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게 도리어 낯설 정도예요.”

“그렇지. 너무 편한 것도 생각하고  일이라니까.”

[그렇게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니 나도 궁금하구나.]

육체가 없는 베르단디에게는 지금의 일리아나와 엘레노아가 느끼는 행복감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것보다 여신님은 현이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항상 은현의 주위를 따라다녔던 베르단디가 이번에는 자신들을 따라온 것이 처음있는 일이다.

[너희들에게도 이제는 나의 힘의 일부가 깃들어 있지 않느냐. 그저 소통을 하는 것 정도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지금은 아이를 조금 혼자 두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흐응….”

일리아나는 세계수의 아래에 묻혀있다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있던 은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떠올리고 있던 엘프가 ‘여성’이라는 것도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일리아나  만이 아니었다.

“저어, 여신님. ‘실비아’라는 엘프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베르단디는 신계에서 은현의 기나긴 세월을 빠짐없이 모두 지켜본 여신이다.

[그 숲의 아이는….]

엘레노아의 질문을 받은 베르단디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가만히 여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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