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202. 신혼여행(1)
“준비 다 마쳤어?”
“뭐 대강은? 그나저나 여행도 오랜만이네.”
일리아나는 은현의 질문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이번에는 은현의 목적이 분명한 여행이기도 했고, 신혼여행의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다.
“저도 준비는 마쳤어요.”
엘레노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든 출발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해왔다.
“겸사겸사 앨리스의 얼굴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니, 걔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
과거에 함께 여행을 했던 동료 중 한 명, 정령술사인 앨리스는 전쟁이 끝나고, 자연의 품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제라드에게서 들었다.
정령과의 교감을 더욱 강하게 다지기 위해서 떠났다는 그녀의 말에 대해 은현은 한 가지 짐작이 가는 장소를 떠올랐다.
마침 자신의 아내가 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데리고 한 번 방문을 할 생각이었기에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을 한 것에 일리아나가 의문을 품은 것이었다.
“거기에 앨리스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찾을 수 없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번 여행의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그럼 뭔데?”
“성묘.”
“…흐응.”
담담하게 말하는 은현의 얼굴을 바라보고, 일리아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구의 묘비를 찾아가려는 것일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 성묘의 여행길에, 자신과 엘레노아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 그 묘비 속의 누군가에게 자신과 엘레노아를 소개시키고 싶어서라는 것을 일리아나가 알아채는 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달의 마을.”
“달의 마을? 그게 어딘데.”
“대륙에 남아있는 엘프들이 사는 숲 속의 마을 이름이야.”
“…엘프?”
느닷없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종족의 이름이 나오자, 일리아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고대 시절에 존재했다는 그 숲의 종족들…말인가요?”
“응.”
정식으로 혼인을 하게 되면서, 은현은 엘레노아의 요청에 의해 그녀에게 사용하는 존대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엘레노아가 은현에게 아직도 존대를 하고 있는 이유는 아직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다른 이유로, 이전 결혼반지를 건 내주면서이루어졌던 일리아나의 조교를 통한 ‘주인과 노예’라는 역할 놀이가 아직도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은현은 모른다.
그저 한사코 말을 놓지 않는 엘레노아의 태도에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이해하기 힘들어 하면서도, 은현은 엘레노아의 의지를 존중해주었다.
“…정말로 실재했어?”
일리아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야 지금까지 남아있는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은현은 흘끗 자신의 위를 바라보았고, 일리아나 또한 은현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허공에 떠있는 여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직 실재하고 있구나.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세계수? 그건 뭔가요?”
긍정하는 베르단디의 말에 일리아나가 여신에게 질문했다.
첫 대면 때의 베르단디와 일리아나는 서로를 어색하게 여겨,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 은현을 제외한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점차 어색한 관계를 개선해나갔다.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서 마음을 놓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은현을 편애하고 있는 베르단디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신의 위엄과 권위를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대화를 임해왔던 노력이 크게 작용한 부분이었다.
은현을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같은 어색한분위기를 연출했던 처음과 비교하면,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었다.
게다가 베르단디 또한 굳이 은현과의 관계를 구체화하자면, 여신과 사도를 넘어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와 마찬가지로 은현과 관계를 맺었던 여성이다.
인간과 신이라는 아득한 차이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할 수가 있었다고 일리아나는 생각했다.
[엘프들이 사는 삶의 터전을 굽어 살피고, 엘프들이 신성시 여기고 있는 신목(神木)의 이름이지.]
“신목….”
엘레노아는 신목이라는 단어를 듣고 순간적으로 아이테르에 존재하는 ‘소망의 나무’라고 불리우는 ‘페르니아스의 신목’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녀의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은 은현이 설명을 보충했다.
“아이테르에 있는 신목하고는 경우가 좀 틀려. 그 나무는 신수의 유해에서 흘러나오는 강대한 기운을 흡수하면서 밀도가 높은 특별한 마나들을 만들어내어 환경을 조성하는 특별한 나무는 맞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신의 힘을 품은 나무는 아니야. 그냥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이 멋대로 신목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인 거지.”
“그럼…그 세계수라는 나무는 정말로 신목이라는 건가요?”
“맞아. 처음 탄생했을때부터, 신의 힘을 품고 태어난 진짜 신목이지.”
“그런 나무의 존재가…어째서 대륙에 이름을 알려지지 않았죠?”
“신목은 그 이름에걸맞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땅을 풍족하게 만들고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주는 나무니까. 그 나무를 신성시 여기는 엘프들이 몇 백 년 동안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폐쇄적인 관습을 지금까지도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에는 이 나무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도 있어.”
“아, 그건…저희 왕국의 페르니아스 왕가가 ‘소망의 나무’에 대한 비밀을 감추려는 것과 비슷한 이유군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이테르에 퍼져있는 대기 중의 마나의 밀도가 높아지고, 마나에 쉽게 노출되어 쉬운 마력의 각성과 최대 보유량이 쉽게 증가하는 효능이 있다는 사실이 공개가 된다면, ‘소망의 나무’를 노리고 타국에서 수작질을 걸어올 것이라 추측을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맞아.”
엘레노아의 적절한 비유에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지금 네가 성묘를 하러 가려는 대상은 엘프의 묘비라는 뜻이네.”
“응.”
굳이 엘프의 묘비에 자신과 엘레노아를 데려가, 소개를 시키려는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아도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은현 스스로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고, 결별을 하기 위해 마무리를 지으러 가는 여행이다.
“알았어. 엘레노아. 가자.”
“네.”
은현의 심정을헤아린 일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법을 이용해 짐들을 허공에 띄우고 운반하기 시작했다.
“아…가는 거야?”
“응.”
거실에서 짐을 운반하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에린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가면…언제와?”
“글쎄. 아마 아무리짧아도 3개월에서 6개월 정도가 될 것 같은데.”
“너무 길어…. 나도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은현 뿐 만이 아니라, 일리아나도, 엘레노아도 함께 자리를 비우게 된다.
심지어 이번 여행에서 은현은 엘빈도 데려갈 예정이었다.
목적지에 있을지 모르는 정령술사에게 엘빈의 상태에 대한 조언을 듣고, 더 안정적이고 장시간 영체를 실체화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데려가는것이었기에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단지 모두가 여행을 가는 데에 자신만을 두고 떠나는 것이 굉장히 서운할 뿐이었다.
“일리아나. 밖에서 대기해줘. 금방 끝나니까.”
“알았어.가자. 엘레노아.”
“네.”
일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레노아를 데리고 미궁 주택을 나갔다.
“에린. 따라와.”
“응….”
앞장서아래층의 공방으로 내려가는 은현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에린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방에 도착하고, 은현이 직접 제작하여 진열되어 있는 무구들 중 고급 진 케이스를 꺼내어 그 안의 물건을 집어 에린에게 내밀었다.
“이건….”
정성스럽게 디자인이 된 고급스러운 손잡이와 얇은 검신을 감싸고 있는 검집.
자신이 애용하는 무기인 레이피어임을 알아보고 에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현아, 혹시 이거….”
“맞아. 전에 약속했잖아. 아르미타스의 기사들과의 대련에서 5연승을 채우면 선물을 주기로. 그 선물이야.”
“아….”
에린은 조심스레 손을 내뻗어 은현에게서레이피어를 받아들었다.
“가벼워.”
평소 쓰는 목검이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철로 된 레이피어의 굉장히 가벼운 무게감에 에린이 다시 한 번 놀란다.
“마음에 들어?”
“응!”
얇은 검신의 레이피어를 가슴에 꽉 끌어안고 밝게 미소 지으며 기운차게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에 아까 전까지 풀이 죽어있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반동이라도 생겼는지, 은현의 품에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자신의 뺨을 비볐다.
“고마워! 정말 좋아해! 현아!”
“다 큰 여자애가 이제는 이렇게 아무한테나 안기면 안 돼지.”
작년까지야, 에린의 멘탈이 너무나도 위태위태하여 일일이 케어를 해줘야 했던 연약한 소녀였기에 어쩔 수 없었던 조치였지만, 그런 소녀도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나이이다.
“괜찮아! 헤헤.”
“에린. 우리가 없는 동안, 에린한테 숙제를 내줄게.”
“숙제?”
“이번엔 10연승. 한 번 채워봐.”
“1, 10승….”
지난번에 5연승을 채운 것만으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10승이라는 숫자는 에린에게는 까마득하게 먼 곳처럼 느껴졌다.
초기에는 에린의 실력에 대해서 방심하는 부분을 이용하여 에린이 승리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아르미타스 기사들은 절대로 에린을 얕보지 않았다.
오히려 에린과 기사들 사이에는 서로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최근의 대련에서는 초반만큼의 우세를 점하기도 힘들고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한창이다.
“물론 그냥 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지.”
까마득히 먼 목표에는 그만큼의 의욕을 상승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에린이 10연승을 채운 상태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소원?”
“응. 소원.”
“뭐든지 들어줄 거야?”
“응?”
“그게 어떤 것이든?”
“……? 응.”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기야?”
“어, 그래. 뭐….”
순간 집요하게 캐묻는 에린의 질문에 은현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어린 소녀가 바라는 소원이 터무니 없어봐야 별 거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며 간단하게 승낙했다.
“좋아! 알았어! 나 정말 열심히 할게!”
에린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은현이 선물해준 레이피어를 품에 꽉 끌어안으며공방을 나갔다.
나갈 때까지 헤실헤실 웃으며 주체할 수 없는 소녀의 표정이 얼마나 기쁜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이야.]
“네?”
[아이는 지금 무엇을 포상으로 내건 것인지 모르는 것이냐?]
“으음. 애가 생각하는 소원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무기에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준 걸 보아하니, 소원으로 더 강력한 무기를 원해오지 않을까요?”
[…에휴.]
“여신님?”
시간이 지나면서, 의존과 동경을 연심으로 조금씩 자각한 소녀의 마음과 결심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의 아이의 말에 여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은현은 의아해 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두 여성과 결혼해서 유부남이 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베르단디는 이것을 자신의 아이에게 말을 해줘야 하는 것일까, 한참을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