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9화 〉199. 협상 테이블(2) (199/730)



〈 199화 〉199. 협상 테이블(2)

“아! 현아! 어…?”

복도에서 은현을 발견한 에린이 기쁜 얼굴로 달려오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여성의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교…수님?”

세실리아 또한 에린의 얼굴을 발견하고, 안경을 살짝 들어 올려 고쳐 쓰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에린.”

“안녕하세요. 교수님!”

“응. 오랜만이야.”

“에린. 복도에서는 뛰면 안 돼지. 여기는 집이 아니라 공작님의 저택이잖아.”

가볍게 준 은현의 주의에 에린이 살짝 어깨를 떨더니 얼굴을 붉히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 미안….”

“괜찮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해라. 장소를가리지않고 나오는 경거망동한 행동은 네 보호자인 은현을 욕보이는 일이기도 하니까.”

“으윽…주의할게요. 죄송합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알렉스의 말이 비수가 되어 에린의 가슴에 박혔다.

“뭐 내 평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이런 쪽은 크게 신경 쓰지 마.”

“시, 싫어! 네 평가잖아!”

자신의 평가가 깎이는 것보다, 자신의 행동으로 은현에 대한 평가가 깎이는 것이, 에린의 입장에서는 더 싫은 일이었다.
이상한 것으로 옥신각신하고 있는 은현과 에린을 보고, 세실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보이네.”

“아…. 네. 헤헤.”

아이테르를 그만두면서, 세실리아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공작령으로 왔기 때문인지, 에린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보다 날 찾아온 거야?”

“응? 아, 맞다! 나 기사님들하고 대련에서 5승 채웠어. 전에 5승하면 선물 준다고 했었잖아!”

잔뜩 흥분하며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은현에게 자랑을 늘어놓는 에린의 말을 듣고, 알렉스가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벌써?”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페르닌의 근위기사단인 크라시르나 리오드가 이끌고 있는 아르티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는것은당연한 사실이다.
공작령의 기사들 대부분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대부분 공작령 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귀족들의 자제들 안에서 희망자의 한해서 선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로 입단 시험 같은 까다로운 자격 요건을 보고 통과해야 하는 크라시르나 아이테르보다는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르미타스의 기사들 또한 정식으로 아이테르에 입학하고 졸업과 동시에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기사들이자, 성인 남성들.
처음 대련했을 때는 나이어린 연약한 소녀라는 것에 방심을 하여 졌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에린을 무시하는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힌 기사들 사이에서 5연승을 따냈다는 것, 그들과 대련을 통해서 승리를 거머쥘 수준이라는 것은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녀에 불과한 에린이 얼마나 가파르게 성장을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너무칭찬하지 마. 아직 멀었으니까.”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자상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소녀의 성장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냉정했다.
은현의 그 말에 서운함을 느끼고 에린의 입술이 삐죽 앞으로 튀어나왔다.

“조, 조금은 칭찬 해줘도 되잖아! 나 정말로 노력했는데!”

“그래. 잘했어.”

“마음이 담겨있지가 않아….”

“그래도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나도 알아. 약속했던 선물은…조만간 보여주도록 할게.”

“…정말?”

“당연하지.”

“알았어!”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세실리아님의 말상대를 부탁할게. 나와 알렉스는 손님맞이의 준비로 바빠서.”

“아, 응. 알았어.”

에린은 은현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세실리아님. 저택의 사람을 시켜서 세실리아님의 짐을 손님방에 옮겨두었습니다. 저녁 시간 전에 따로 말씀을 드릴 테니, 그전까지는 편하게 있어주세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고요.”

“응. 고마워.”

공적인 이야기를 마치고, 사적인 관계로 다시 돌아가자, 세실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리 말하고 복도를 걸어 자리를 떠나는 은현과 알렉스의 등을 응시하고, 이내 에린도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희도 이만 가요.”

“응.”

앞장서 손님방으로 안내하는 메이드의 뒤를 따라, 세실리아와 에린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안내받은 손님방에 도착하고, 세실리아는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며 피곤한 숨을 토해냈다.

“후우….”

“피곤하세요?”

“응? 음…솔직히 좀 지치긴 했지….”

쉬지 않고 며칠을 마차 위에서 보낸뒤에, 도착하자마자 알렉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쌓여 있던 피로가 단숨에 몰려오고 있던 와중에 은현과 알렉스의 계획을 듣고 조만간 만들어질 귀족들과의 협상테이블에 대해서 걱정이 앞섰던 것도 한숨을 내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곳에 내려와서 안도의 기분이 들었던 딱 한 가지의 이유는.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저 말씀이신가요?”

“응.”

에린은 느닷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화제로 꺼내지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마음이 걸렸거든. 아이테르를 그만두고 그렇게 떠나버렸으니까.”

세실리아는 페르닌에 나돌았던 마약 사건의 주범과 일당들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웠던 에린이 궁정회의장에서 왕비가 내렸던 포상을 거부하고, 스스로 귀족의 지위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던 사실을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궁정귀족들 사이에서 리오드와 같이 어느 파벌에도 들지 않고, 중립의 태도를 유지했던 세실리아의 아버지는 그런 에린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당찬 소녀라고 칭찬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에린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아직도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거든.”

“아….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교수님께 죄송한 걸요. 작별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페르닌을 떠나게 돼서….”

세실리아는 아이테르 안에서 에린이 믿고 의지할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사람이었다.
에린이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다며 시치미를 떼거나, 스스로 학대의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에린의 태도를 비롯해, 확실한 증거와 여지를 남기지 않는 학생들의 용의주도함 때문에 에린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지금은 은현에게 구원받아, 웃으면서 지내고 있는에린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처럼 위태위태했던 과거의 에린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의 한쪽이 계속 욱신거렸다.
에린이 정령이 된 엘빈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눈에 띄게 밝아진 에린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세실리아는 그 마음 한쪽의 욱신거림을 해소할 수 있었다.

“후후, 괜찮아.”

세실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 ◆ ◆

저택의 내부, 중앙홀에 멀뚱멀뚱 서 있던 귀족들은 하나같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웅성거리며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도무지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은현이 흑랑단을 시켜 그들에게 보낸 편지로, 공작가문과 치료제를 가지고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온 귀족들이 자신들뿐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쪽도…?”

“오, 오르바 백작께서도 설마…?”

비밀리에, 은밀히 보내져온 전갈을 통해서 자신에게만 제안을 해온 협상인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수의 귀족들에게 보내진 전갈이었으며,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쟁자들이 생겨난 셈이었다.

“끄응….”

한 귀족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하고 신음을 흘렸다.
각자가 자신의 딸자식들의 회복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만큼, 이번만큼은 누구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지위가 높고 재력도 상당한 귀족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치료제를 가지고 있는 공작가문과 협상을 제시할 것이라는 예상은 안 봐도 뻔한 이야기나 마찬가지.
그렇게 귀족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만 있을 때였다.

“모두 와주셨군요.”

알렉스는 은현이귀족들에게 보냈던 전갈의 숫자와 귀족들의 수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위층에서 계단을 타고 천천히 중앙의 홀로 내려온 알렉스는 미리 배치되어 있던 중앙의 의자에 앉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이게 어떻게  일이오. 소공작.”

많은 귀족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열어 알렉스에게 추궁을 해온 것은 오르바 백작이었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공작은…공작은 어디에 있소?”

“아버지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이번 협상에 나오지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협상에서 저희 측의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입니다.”

아브로스가 몸이 편치 않아 귀족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알렉스에게 앞으로 있을 영지 운영과 공작 가문의 중대사안의 결정 권한을 위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공식 석상으로 드러내어 발표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브로스는 지난번 애슈턴의 사건으로 더 이상의 정치와 영지의 운영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권한을 알렉스에게 위임하고 지금은 휴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원래는 가문의 작위까지 아예 승계를 하려 했지만, 그것은 알렉스가 거절했다.

“나는…그 치료제에 대한 협상을 하러 왔소. 그런데 도대체 이곳에 와있는 귀족들의 숫자는 무엇이오? 설마 나를 속인 것이오?”

“속이다니요. 저는 오르바 백작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백작께 보낸 편지에 백작만을 부르겠다는 글은 한 단어도 적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정확히 그 편지의 내용을 흑랑단에게 적게 시키고 많은 귀족들에게 전갈을 보냈던 것은 은현의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우리들을 모아놓고 무엇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많은 귀족들을불러 모아놓고, 느긋한 태도를 취하며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는 알렉스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한 귀족이 참다못해 알렉스에게 소리쳤다.

“이곳에 모이신 열 분 중에서, 다섯 분에게만 치료제를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됩니다!”

“그 다섯 분, 안에 들어가는조건은 간단합니다. 이곳에 모이신  분의 귀족 분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신 분이 계십니까?”

“그것은….왕당파의….”

한 귀족이 작게 중얼거린 것처럼,  명 모두가 왕당파벌의 귀족들이자, 애슈턴의 개인의 죄를 공작가문 전체로몰아가며 가문 전체를 몰락시키려 했던 핵심 귀족들이다.
그 사건의 시발점은 애슈턴이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그것을 기회로 삼아 공작가문에 이빨을 들이댄 왕당파벌의 귀족들도 용서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
알렉스는 당연히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으며, 이것은 은현이 깔아준 판 위에서 그들을 철저히 물어뜯기 위한 과정이다.

“이보게 소공작. 우리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잊어?”

도저히 흘려넘길 수 없는 발언을 내뱉은 귀족을 쳐다보는 알렉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떻게 그때 겪었던 수모와 굴욕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중앙에 앉혀놓고 사방팔방 포위를 하며 집안 전체를 물어뜯으려던 그런 작자들을 용서한다니,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

“하, 하지만 전 소공작인 애슈턴의 잘못은 맞지 않았소! 우리는 왕국의 법도에 따라 배임 횡령을 주도한 그자가 속해있던 공작 가문에 책임을 물었던 것이오!”

한 귀족의 외침에 몇몇 귀족들이 움찔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애슈턴의 비리에 동참했던 왕당파벌의 귀족들이다.

“그렇죠. 애슈턴이 저질렀던 비리는 저희 공작 가문에 평생 남아있을 수치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몇몇 귀족들을 쳐다보며 말을 열었다.

“그 논리대로라면, 그때 궁정회의장에서 애슈턴이 주도했던 비리에 동참했던 당신들이 오히려 자신은 관계가 없던 일인 양, 시치미를 떼고 저와 제 아버지를 그렇게 추궁했던 이들이 무슨 염치로 저를 찾아온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 그것은…!”

“그럼 저자들을 제외시키고, 나에게 치료제를 파시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제 아들도 지금 굉장히 위급한 상태인데…!”

몇 주 전까지, 궁정회의장에서 합심을 하여 공작 가문을 물어뜯어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고 의기양양하고, 혈안이 되어 있던 왕당파벌들의 귀족들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핏줄을 살리려고 같은 파벌의 귀족들을 깎아내리고 우위에 서서, 치료제를 팔겠다고 제시한 다섯 명 중의 숫자에 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모양새가 굉장히 우습다.

그리고 그 우스운 생각과 별개로 동시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차가운 표정 속에서 불타오르는 분노의 눈빛으로 노려보는 알렉스의 말에 지적을 당한 귀족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며 할 말을 잃었다.
이내 그중 한 귀족이 무릎을 꿇으며 알렉스에게 간절히 외쳤다.

“내가…내가 잘못했네! 그러니, 그러니 부디…아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치료제를 팔아주게!”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무릎을 꿇어, 귀족의 자존심과 존엄을 버리는 귀족의 태도에 알렉스는 그를 응시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무릎을 꿇은 귀족이 다급함에 못 이겨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앞으로 절대로 공작가문에 수작질을 걸지 않겠네! 약속하지!”

간절하게 외치는 귀족의 애원에 알렉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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